[제1회 시와세계작품상 수상작]
날치고 훔치고 외 4편
김이듬
번개처럼 떨어지는 접시를 받았다
바나나가 있는 접시였다
바나나가 좋아
난 바바나가 좋아
다 주세요
위에 대고 소리 질렀다
내일부터 접시 닦기를 할 거예요
내 꿈은 작고 웃기는 거
껍질을 벗기면 하얀 과육이 나오고 빨면 즙이 나오는
바나나는 신기해
나는 아껴서 핥아먹었다
눈을 감고
달빛이 펼쳐진 장원에 누워
조금만 부드럽게
어서 자둬
내일은 바쁠 거야
내 신발에 축축한 발을 담고 있는 너
만나기 전인지 후인지
지금 생각해보니 그날이 마지막으로 널 본 날이었어
우리가 큰돈을 벌 생각은 아니었잖니
오늘은 푹 자자 내일부터 바쁠 거야
눈을 떠보니 학교였고
새벽 두 시에
난 물을 마시려고 수도 아래 입을 벌리고 있었다
도플갱어
나는 투표소에 가는 사람
주민등록증 가지러 도로 와서는 안 나가는 사람
내가 믿는 바를 스스로 믿지 못하는 사람
나는 검은 코트를 입고 휴대전화로 통화하는 사람들
거침없이 말하며 후회하기를 타고난 사람
나는 슬리퍼 끌고 편의점에서 술을 사는 한밤중 바코드의 사람들
나는 도로 위에 흰 스프레이 페인트로 그려진 사람들
빈둥거리며 지척에 흩날리는 나
꿈에 늑대를 타고 달리지만 대부분 걸어 다니는 사람
사운드가 없으면 금방 다리가 아픈 사람
죽느냐 사느냐 고뇌하는 사람들의 성장기를 거치지 않고
죽일 것인가 살릴 것인가 망설임조차 결여된 사람
정부는 출산여성에게 인센티브를 준다는데, 그깟 놈들 말 듣지 말라는 정부를 둔 사람
나는 콩나물해장국을 마구 퍼먹는 사람들
대가리 떨어지고 뿌리도 시들시들 말라가는
내가 던진 막대기를 물고 뛰어오는 나
공원에서 주운 개목걸이에 딸린
권태로운 첫사랑
나는 신생아처럼 더럽고 쪼글쪼글하다
그는 지독히 달라붙는 꼬마였고 나는 조로한 소녀였다
수학여행 가는 길에 배가 막 아프더니 속리산 밑에서 애를 낳았다 그때가 몇 살이더라 처음 보는 사람은 아무나 나를 십대로 보지 않았으니
내일도 올까요? 사흘 뒤에 올까요? 아니면 일주일에 한 번?
언뜻 봐도 그는 달라붙는 꼬마였고 나는 조로한 여자다
우리는 인터넷 카페에서 만나 횡천으로 갔다 그는 연탄을 가져왔고 나는 화덕을 껴안고 있었다 그는 우울했고 나는 사는 게 지겨웠다
테이프로 창문 틈을 막고 연탄불을 피우고 우리는 나란히 누웠다
나는 지독히 달라붙는 꼬마였고 나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늙어빠진 여자였다
놓치지 말고 봐! 커튼을 활짝 열어젖혔다
나는 기운이 딸렸고 그는 침대 모서리에 사정을 했다
자살하기 전에 섹스를 하니 현관문 쪽으로 기어가고 싶었다
어지러웠고 나는 기운 없는 할머니였고 엄마 빼고는 안겨본 적 없는 그는 꼬마였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쪼글쪼글했고 머리칼은 뒤죽박죽 엉켜있었으며 줄곧 망령과 노망기에 시달렸다 제길 짧은 청춘도 없었다니 그를 만나기 전부터 그가 보내오는 이모티콘이 맘에 들었고 종종 난 그의 동그란 코와 생기 넘치는 탱탱한 엉덩이를 씻겨준다 욕조에서 입 맞추고 비누거품으로 장난치는게 좋다
웬 걸, 그의 마음을 어떻게 알겠는가
그는 지독히 달라붙는 꼬마였고 망할 놈의 우리는 죽음을 빌었다는 것 밖에
나는 누워서 죽음을 기다리는 일이 지겹고 꼬치꼬치 묻는 너에게 싫증났었고 벌써 이 꼬마에게도 싫증을 느껴 무슨 일도 끝까지 해보기 싫으니
이쪽도 빨아줘 내 머리칼에서 흘러내리는 이것은
아, 이걸 어떻게 말하지
좋아 말하지 말자
아아, 지겨워 이 글도 여기서 멈추자
함박눈
여긴 눈이 와, 함박눈이야
네 목소리를 듣고
별안간 난
한 번도 함박눈을 맞아보지 못한 걸 알았어
평범한 기쁨을 떠나있는 것 같아
엄청난 사태로부터도
늙은 시인에게서 사랑 없는 일생을 살았다는 말을 들을 때처럼 싱거운 얘기지
눈을 감고 눈을 상상해
폭설이 난무하는 언덕에 서 있어
두 팔을 벌려야 해
입을 쫙 벌린 채 눈덩이를 받아먹어
함박눈은 솜사탕만할 거야
네게 한번이라도 함박눈이 되었으면 좋겠어
눈발이 거세지고 조금씩 나는 파묻혀가고 있어
난 하얀 구릉이 되어 솜사탕처럼 녹아가네
눈은 죽은 비라고 루쉰이 그랬나?
네 얼굴에 내가 내리면
넌 코가 찡하겠니?
나를 연신 핥으며 달콤해 아 달콤해 속삭일 거니?
나를 베개하고 나를 안겠지
우린 잠시 젖은 후 흘러갈 거야
너무 싱거운 거 같아 망설인다면
삽으로 떠서 길가로 던지겠지
사생아들
어떤 계집애가 기분 나쁜 시선으로
야릇한 미소를 띤 채 나를 쳐다봤다
당장 버스에서 내려 승강장에 서 있던 년의 팔을 쥐고
공중화장실로 끌고 갔다
돌려차기 세 번으로 완전히 쓰러뜨렸다
화장실 입구에는 내 몽타주가 붙어있었다
꽤 미남에다 권태로워보였다
우리 함께 거닐어, 노는 것을 보네
너무 쨍쨍하게 햇살, 꿈에 흘러 넘쳐
얼리고 녹이고 얼리고
내게 책을 선물 받은 자식이 책 감상을 제 블로그에 올렸다
나는 전화를 걸어 제발 지워달라고 말했다
그의 누나는 엠티 가서 모두가 술에 취해 잠든 시각,
근처에서 합류한 놈팡이와 사랑에 빠졌다
그녀의 순진하고 어리버리한 태도에 넘어가지 않는 이가 없었다
나도 넘어갔다
그의 형은 선지자인 양하는 휴머니스트 로맨티스트 범벅의 과대망상증 환자다
오만상 찡그리지 마세요, 부모님이 나타나시면 저는 으스스해집니다, 때리지 마세요, 얼고 녹고 얼고, 제 손은 이미 늙었어요
아닌 척 하지만 그들은 복수의 욕구로 시를 쓴다
그들의 순정한 어투와 연약한 심성과 동화적 상상력이 대중에게 먹히길 빈다
그들과 나는 패밀리이다
우릴 내동댕이친 세상에 이름을 날려야 한다
사람들은 기분 나쁜 시선으로 쳐다볼 뿐
아무도 우리의 천성과 재능을 몰라본다
권태롭거나 분노한 표정으로 단체사진을 찍고
집으로 돌아와 칼끝으로 얼굴을 찍는다
더! 더! 더!
우린 외롭게 무리지어 겁을 먹고 망설입니다
얼리고 녹이고 불태우고
절대로 유년시절을 쓰고 싶지 않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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