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수상작 85

숯을 굽다 / 사윤수

숯을 굽다 사윤수 ​ ​ 베어낸 굴참나무를 수레에 실어왔다 둥치가 튼실한 걸 보니 하늘을 이고 자랐겠구나 우듬지에 따라온 두 평 반 구름이 높이 떠가고 가지마다 앉았던 새소리가 흩어졌다 ​ 참나무는 빈 몸이 되었다 세월을 자르고 바람을 토막 내고 잔가지와 잎은 불쏘시개로 쓸 테니 버릴 것이 없다 궁핍도 때로는 쓸모 있는 시절인 것을, 너를 구워 나를 익게 하리라 ​ 숯가마를 가득 채운 직립의 참나무에 불을 지핀다 세월이 타고 고뇌가 타고 나무의 기억들이 춤춘다 이레 여드레 꺼지지 않는 불꽃 속에서 나무는 죽고 또 죽어야 숯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으므로 나는 오로지 맑고 희거나 검게 빛나는 덩이를 얻고자 했으므로 ​ 한 때 숯을 굽는 일은 나의 실학이 되었다 숯이 된 굴참나무는 탈 때 연기가 나지 않고 오..

나의 힘은 내일을 비추는 오늘 - 순암을 읽다 / 김은숙

나의 힘은 내일을 비추는 오늘-순암을 읽다 ​김은숙 ​ 세상은 늘 원본이자 진본이라서 훗날이 반드시 고증해 온다 ​ 남는 건 기록이고 기록은 길이라서 정사(政事)를 버리고 정사(正史)만을 저록한다 ​ 사람의 심연을 다스리는 성현의 도는 저택과 같다 공리공론에 빠지지 않으려 선입견 버리고 붓을 드는 순간 갓을 고쳐 쓴 아집은 돌담 밖에서도 기웃거리지 못한다 ​ 실체가 끊어지면 정처 없이 걷고 실체가 보이면 한 달 내내 서고에 틀어박혀 혜안을 넓힌다 ​ 스무 권을 완성하는 동안 벼루는 움푹 패고 열 번째로 닳은 붓이 편년을 헤아린다 ​ 그러니 역사를 쓴 것은 내가 아니라 역사가 나를 집필한 것이다 ​ 잠시 흩어진 중심을 하나로 모아 머리말을 적지 않고 퇴고로 쓴 시간만큼 거슬러간다 ​ 밖을 보니 문득 새벽이..

2023년 제3회 <구지가문학상> 수상작 / 박형권

소금을 뿌리고 후추를 뿌리는 사이 박형권 ​ ​고등어 한 손 사서 한 마리는 굽고 한 마리는 찌개를 끓이는 게 좋을 것 같다 바다로 씻어낸 무늬가 푸를 때 침묵으로 말하는 통통한 몸을 갈라 복장을 꺼내고 무구정광다라니경을 생각해 보자 당장 읽을 수 없다면 비늘을 벗겨보자 지느러미를 쳐내 보자 부엌방의 전등 빛으로 읽어 내려가자 마지막 소절에서는 바다의 일몰을 불러내어 몸으로 건설한 저녁 한 끼를 불그스름하게 경배하자 생선 구워 밥상에 올리면 그곳이 세계의 중심 혀로 말씀을 삼키기도 한다 오늘도 피 흐르는 가을, 단풍을 뿌리며 단풍에 베인다 그리하여 단풍은 피보다 비리다 이 가을도 오래 가지 않을 터 몇 마리 더 사서 따로 남는 추억은 냉동실에 넣는다 생선 한 손은 왜 두 마리이어야 하는지 한 손은 들고 ..

김욱진 시인, 2023 아르코문학창작기금 발표지원 선정(시 7편)

AI 김욱진 저 아이 요즘 뭐든지 물으면 척척 대답을 다해준다고? 에이, 세상에 그런 아이가 어디 있어 태어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말로만 듣던 AI, 딴 세상 얘기처럼 들리더니만 어느새 그 아이가 이렇게 많이 컸어 챗GPT라고 부른다면서 그래, 맞아 조무래기라고 얕보지 말게 지난 번 이세돌 하고 바둑 둬서 이겼다는 그 아이야 그럼, 돌아이구만 이게 어디 사람 사는 세상인가 야, 이 친구야 지금, 여기 농담할 상황 아닐세 머잖아 자동차 자율주행 운전도 저 아이가 하고 자네가 몇날며칠 끙끙거려 짓는다는 시 한 편 저 아이는 몇 초 만에 후딱 써버린다네 시면 시, 소설이면 소설 심지어 나의 일기까지도 줄줄 다 써준다네 짧다 그러면 금방 늘여주고 좀 길다 그러면 눈치껏 줄여주고 “…해줘”“…알려줘” 하면 ..

제6회 시산맥작품상-초당(草堂)두부가 오는 밤 /문성해

초당(草堂)두부가 오는 밤 문성해 옛날에는 생각도 못한 초당을 알아 서늘한 초당두부를 알아 동짓날 밤 선연한 선지를 썰 듯 썩둑썩둑 그것을 썰면 어느새 등 뒤로는 그 옛날 초당(草堂) 선생이 난을 칠 때면 뒷목을 서늘케 하며 일어서던 대숲이 서고 대숲을 흉흉히 돌아나가던 된바람이 서고 그럴 때면 나는 초당 선생이 밀지(密旨)를 들려 보낸 이제 갓 생리 시작한 삼베속곳 일자무식의 여복(女卜)이 된다 때마침 개기월식하는 하늘 분위기로 가슴에 꼬깃꼬깃 품은 종잇장과 비린 열여섯 해를 바꿀 수도 있을 것 같고 저잣거리의 육두문자도 오늘 밤만큼은 들리지 않는다 하고 밤 종일 붙어 다니는 개새끼들에게도 한눈팔지 않고 다만 초당 선생 정지 간에서 저고리 가슴께가 노랗게 번진 유모가 밤마다 쑹덩쑹덩 썰어 먹던 그것 한..

김욱진 시인, 제 5회 김명배문학상 작품상 수상

김욱진 시인, 제 5회 김명배문학상 작품상 수상 ◉작품상 : 김욱진 시인◉ 응모시집: 수상한 시국(2020년) 경북 문경 출생 경북대학교 사회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2003년 등단 2018년 제 49회 한민족통일문예제전 우수상 수상 2020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수혜 2022년 제 8회 박종화문학상 수상 시집 『비슬산 사계』『행복 채널』『참, 조용한 혁명』『수상한 시국』 한국문인협회 달성지부 회장 역임 거주지: 대구광역시 ▣수상 소감 / 김욱진▣ 이런 세상이 올 줄 몰랐습니다. 보이지 않는 코로나도 그렇고, 문학상도 그렇습니다. 저 멀리 충청도 천안 땅에서 뿌리내린 김명배 문학상이 대구에 살고 있는 저에게까지 와 닿을 줄은 참으로 몰랐습니다. 저마다 끼리끼리 주고받는 수상한 이 시국에 말이지요. 참, 올..

바이킹 / 고명재(2020조선일보 신춘문예)

바이킹 고명재 ​ 선장은 낡은 군복을 입고 담배를 문 채로 그냥 대충 타면 된다고 했다 두려운 게 없으면 함부로 대한다 망해가는 유원지는 이제 될 대로 되라고 배를 하늘 끝까지 밀어 올렸다 모터 소리와 함께 턱이 산에 걸렸다 쏠린 피가 뒤통수로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원래는 저기 저쪽 해 좀 보라고 여유 있는 척 좋아한다고 외치려 했는데 으어어억 하는 사이 귀가 펄럭거리고 너는 미역 같은 머리칼을 얼굴에 감은 채 하늘 위에 뻣뻣하게 걸려있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공포가 되었다 나는 침을 흘리며 쇠 봉을 잡고 울부짖었고 너는 초점 없는 눈으로 하늘을 보면서 무슨 대다라니경 같은 걸 외고 있었다 삐걱대는 뱃머리 양쪽에서 우리는 한 번도 서로를 부르지 않았다 내가 다가갈 때 너는 민들레처럼 머리칼을 펼치며 날아가 ..

안개라는 개犬 외 3편 / 김겨리-김명배 문학상

안개라는 개犬 김겨리 나무와 집과 소리와 여명까지 삼키는 잡식성 맹견 온몸이 어금니와 식도로 된 독종이다 컹컹 짖을 때 날리는 축축한 비말은 번식세포, 안개는 바람의 병법으로 빠르게 영역을 점령한다 부드러운 이빨로 무엇이든 질겅질경 씹다 통째로 삼키는 안개 한번 물면 놓지 않는 흡혈성 식도를 가진 안개는 아침이 주식이다 안개의 먹이사슬들은 눈이 퇴화되는 대신에 청력이 예민하다 나무도 돌도 물도 풀잎도 모두 청력이 발달된 종들 상처의 바탕, 울음의 면적, 고통의 질감처럼 안개를 개복하면 온갖 씨앗들이 발아한다 안개의 부리부리한 눈을 본 적이 있는가 마주치면 송두리째 빨려들 듯한 무자비한 혼곤으로 꼼짝없이 당하고야 마는, 촉촉이 젖는 공포에 대해 상온을 밑도는 체온이라 냉혈인 듯하지만 그의 소화기관을 거쳐 ..

32회 정지용 문학상-목도장 / 장석남

목도장 장석남 서랍의 거미줄 아래 아버지의 목도장 이름 세 글자 인주를 찾아서 한번 종이에 찍어보니 문턱처럼 닳아진 성과 이름 이 도장으로 무엇을 하셨나 눈앞으로 뜨거운 것이 지나간다 이 흐린 나라를 하나 물려주는 일에 이름이 다 닳았으니 국경이 헐거워 자꾸만 넓어지는 이 나라를 나는 저녁 어스름이라고나 불러야 할까보다 어스름 귀퉁이에 아버지 흐린 이름을 붉게 찍어놓으니 제법 그럴싸한 표구가 되었으나 그림은 비어있네

빨랫줄 저편 / 장정욱

빨랫줄 저편 장정욱 시인 질긴 죄목이었다 젖은 아이를 안고 무지개가 이어진 계단을 올랐다 아이의 입이 지워졌다 울음을 모르는 입에서 뚝뚝 이승의 끝과 끝이 파르르 떨렸다 환청의 기저귀를 채우고 빈 젖을 물리고 젖지 않는 오줌 아물지 않는 배꼽 무지개가 늘어지지 않도록 바지랑대를 세워 높이 아이를 널었다 -2018 수주문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