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한詩 965

저녁을 짓다 / 손택수

저녁을 짓다손택수 ​​짓는 것 중에 으뜸은 저녁이지 짓는 것으로야 집도 있고 문장도 있고 곡도 있겠지만 지우면 곧 사라지는 것이 저녁 아니겠나 사라질 것을 짓는 일이야말로 일생을 걸어볼만한 사업이지 소멸을 짓는 일은 적어도 하늘의 일에 속하는 거니까 사람으로선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을 매일 같이 연습해 본다는 거니까 멸하는 것 가운데 뜨신 공깃밥을 안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이 지상에 습관처럼 지극한 것도 없지 공깃밥이라는 말 좋지 무한을 식량으로 온 세상에 그득한 공기로 짓는 밥 저녁 짓는 일로 나는 내 작업을 마무리하고 싶네 짓는 걸 허물고 허물면서 짓는 저녁에 이름으로

♧...참한詩 2025.07.01

탕자의 기도 /손택수

탕자의 기도손택수 나무는 종교가 없는데도 늘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여러 종교를 가져보았지만단 한번 기도다운 기도를 드린 적이 없다 풀잎은 풀잎인 채로, 구름은 구름인 채로,바람은 바람인 채로 이미 자신이 되어 있는데기도도 없이 기도가 되어 있는데 사람인 나는 내가 까마득하다가도 가도 닿을 수 없는 타향살이다 제자리걸음으로 천만리를 가는 별이여떠난 적도 없이 끝없이 떠나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바위여누가 세상 가장 먼 여행지를 자기 자신이라고 했던가 명소란 명소는 다 돌아다녀봤지만흔들리는 꽃 한송이 앞에도 당도한 적 없는 여행자 하여, 나는 다시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이 부끄러움이나마 잊지 않고 살게 해달라고 이생에 철들긴 일찌감치 글러먹었으니애써 철들지 않는 자의 아픔이나마 잊지 않게 해달라고

♧...참한詩 2025.06.11

어떤 슬픔은 함께할 수 없다 외 34편/ 손택수

어떤 슬픔은 함께할 수 없다손택수 아파트를 원하는 사람은 위험인물이 아니다더 좋은 노동조건을 위해 쟁의를 하는 사람도 결국은노동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그들은 적어도 자신이 속한 세계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하루종일 구름이나 보고 할 일 없이 떠도는 그를더는 참을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어떻게 소유의 욕망 없이도 저리 똑똑하게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혼자서 중얼거리는 사람, 혼자서 중얼거리는행인들로 가득 찬 지하철역에서도그의 중얼거림은 단박에 눈에 띄었다허공을 향해 중얼중얼 말풍선을 불듯심리 상담과 힐링과 명상이네온 간판으로 휘황하게 점멸하는 거리어떤 슬픔은 도무지 함께 할 수 없는 것이다혼자서 중얼거리는 사람이 사라지자 혼자서중얼거리는 사람들로 거리가 가득 찼다​책소개문학동네시인선 180번으로..

♧...참한詩 2025.06.09

녹슬지 않는 눈물이 있다 / 조두섭

녹슬지 않는 눈물이 있다조두섭 서쪽 하늘별 하나 눈물을 고요에 담금질하고 있다 이별일까시 쓰고 있는 걸까 금가는 눈물은기다림이 아니라고유성으로 날아가는 눈물은그리움이 아니라고 잠 못 이루는 눈물은 눈물을 알아본다 반짝이는 눈물은순금의 순금이 아니라고고요에 떠오르는 눈물은청동이 아니라고 내려치는 망치 소리마저 고요에 연금하는별 하나 서쪽 하늘녹슬지 않는 눈물이 있다 만남일까시일까

♧...참한詩 2025.06.02

아프지 마, 라고 네가 말할 때 / 강문숙

아프지 마, 라고 네가 말할 때강문숙 한 사흘 대답 없던 톡에깨알 숫자 사라지고 댓글 뜬다 주말엔 폰을 아예 책상 서랍에 넣고 지내일찍 난로를 꺼버린 탓에감기가 왔나 봐이제 난 좀 괜찮아졌지만걱정했을 네가 더 걱정이야너는 아프지 마 아프지 마, 라는 말 참 아프게 다정한 말봄꽃 피려다가 꽃샘바람에 움츠러들 때가는 입술 벌려 봄볕 받아먹고 있던저 나뭇가지를 꺾어서 쓰는 말 어떤 색으로 피어날지 알면서도난생 처음 본 색깔인 양 신기한 꽃잎 속하얀 입김 같은 말 말에도 온도가 있어 느린 게이지 곡선으로 끌어올리다노을 같은 발음으로 아프지 마, 네가 말할 때아프다가도 나는 안 아프고 그래서 더 아프고

♧...참한詩 2025.05.29

나비, 참을 수 없이 무거운 / 강문숙

나비, 참을 수 없이 무거운강문숙 나비의 날갯짓을 가벼움의 상징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보편적이다, 하지만 나비의 고요한 순응이 진심이 아닐지도 그 날갯짓의 무게는 참을 수 없이 무거운 것일지도 모른다 얘야, 나비 곁에서 눈 비비지 마라 네 눈이 멀어 버리질지도 몰라 허공에 찍힌 필사적인 날개의 지문을 보았는지 엄마는 꽃밭 근처에도 못 가게 했다 날개가 공기의 저항을 극복하는 데 필요한 체온은 30도, 있는 힘 다해 허공의 계단을 짚으며 날아가던 나비의 근육이 터지기 직전 날개는 찢어질 듯 얇아지며 천천히 접혔다 펼쳐지는 동어반복으로 겨우 허공을 간섭하다가 끝내 꽃에게로 투신한다 그 순간의 고요함이란 가까스로 태풍의 눈 속에 들어가 먼바다를 건너는 나비의 꿈이 시작되었다는 에두름이다 하필 ..

♧...참한詩 2025.05.29

고요한 그릇 / 강문숙

고요한 그릇강문숙 의자는 그릇이다, 흔들리면서 누군가의 몸을 담는다그저 겸손히 받아들이면서 그의 생을 한순간 안아보는 것인데설레임보다는 예고 없이 쿵, 떨어지는 심장 같은 것일 때가 많다한 생이 담겨진다는 것은 희로애락의 지난한 은유일 뿐오랜 시간 흘러왔을 내밀한 그리움과 고독, 또는숨 가쁘게 걸어왔던 순간들이 버무려져 의자는 보이지 않게 우묵해진다삐걱삐걱삐걱, 그래그래그래, (여자도 오랫동안 그릇이었으니)저 소리는 한 생의 무게를 다 읽어낸 흐느낌이 배어 있는 그릇이마음의 흔들림을 빙자하여 제 속에 고인 울음을 다스리려는 방편(方便)이 아닐까저녁이 되는 것도 모르는 채 흔들의자와 여자는 오롯이 한 몸이다한 생을 다한다는 것의 숭고함이란 누군가의 몸을 담아 보아야 안다한 때 아이를 담고 있던 그 여자의 ..

♧...참한詩 2025.05.28

혼자 가는 길 / 강문숙

혼자 가는 길강문숙 내 마음 저 편에 너를 세워 두고혼자 가는 길, 자꾸만 발이 저리다 잡목 숲 고요한 능선 아래 조그만 마을거기 성급한 초저녁 별들 뛰어 내리다 마는지어느 창백한 손길이 들 창을 여닫는지아득히 창호지 구겨지는 소리, 그 끝을 따라 간다둥근 문고리에 찍혀 있는 지문들낡은 문설주에 문패자국 선연하다 아직 네게 닿지 못한 마음 누르며혼자 가는 이 길,누가 어둠을 탁탁 치며 걸어 오는지내 마음의 둥근 문고리 잡아 당기는지

♧...참한詩 2025.05.28

청동우물 / 강문숙

청동우물 강문숙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그의 아내와 지나간다.댕기머리 아들이 천자문을 끼고 지나간다.헛기침하며 교자 탄 나으리 지나가고농사꾼 방물장수 유기전의 사내들이 떠들며 지나간다.쪽진 머리의 그의 아낙들 젖통을 흔들며 지나간 뒤소와 말, 돼지와 홰를 치던 닭들이, 쥐새끼들이 지나갔으리. 천체박물관 전시실 안, 앙부일구(仰釜日晷)* 청동의 육중한 원을 따라 하염없이 감겼다가 풀리는 소리들이 있다. 웅웅거리며, 무수한 결을 따라 돌다가 전시실을 가득 채운다. 그 소리는 푸르다.기록되지 않은 역사란 때로, 소리가 되어 떠돌기도 하는 것인지, 저 깊은 시간의 우물 속을 들어다보노라니 머리끝이 쭈뼛해진다. 사소한 기억까지도 담고 있는 청동우물.손바닥을 대어보니, 사라진 것들이 속속 들어와 울음 섞인 노래를 풀..

♧...참한詩 2025.05.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