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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유나무의 농사 / 문태준

산수유나무의 농사문태준 산수유나무가 노란 꽃을 터뜨리고 있다산수유나무는 그늘도 노랗다마음의 그늘이 옥말려든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보아라나무는 그늘을 그냥 드리우는 게 아니다그늘 또한 나무의 한 해 농사산수유나무가 그늘 농사를 짓고 있다꽃은 하늘에 피우지만 그늘은 땅에서 넓어진다산수유나무가 농부처럼 농사를 짓고 있다끌어모으면 노란 좁쌀 다섯 되 무게의 그늘이다

♧...참한詩 2025.04.15

얼굴 / 안상학

얼굴안상학 세상 모든 나무와 풀과 꽃은그 얼굴 말고는 다른 얼굴이 없는 것처럼늘 그 얼굴에 그 얼굴로 살아가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내 얼굴을 보지 않아도내 얼굴이 내 얼굴이 아닌 때가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꽃은 어떤 나비가 와도 그 얼굴에 그 얼굴나무는 어떤 새가 앉아도 그 얼굴에 그 얼굴 어쩔 때 나는 속 없는 얼굴을 굴기도 하고때로는 어떤 과장된 얼굴을 만들기도 한다진짜 내 얼굴은 껍질 속에 뼈처럼 숨겨두기 일쑤다 내가 보기에 세상 모든 길짐승, 날짐승, 물짐승도그저 별 다른 얼굴 없다는 듯늘 그렇고 그런 얼굴로 씩씩하게 살아가는데나는, 아니래도 그런 것처럼, 그래도 아닌 것처럼진짜 내 얼굴을 하지 않을 때가 많다 나는 오늘도쪼그리고 앉아야만 볼 수 있는 꽃의 얼굴과아주 오래 아득해야만 볼 수..

♧...참한詩 2025.04.15

바깥에 갇히다 / 정용화

바깥에 갇히다정용화 우리 집 현관 문에는 번호키가 달려있다 세 번,비밀번호를 잘못 누르면 가차 없이 문이 나를 거부한다쓰레기를 버리러 나왔다가 지갑도 휴대폰도 없이제대로 바깥에 갇히고 말았다 안과 밖이 전도되는 순간열리지 않는 문은 그대로 벽이 된다 계단에 앉아 있는 30분 동안겨울이 왔다바람은 골목을 넓히려는 듯 세차게 불고추위를 모르는 비둘기는연신 모이를 쪼아댄다 내 것이면서 내가 어쩌지 못하는 것이어디 문 뿐이겠는가낡을대로 낡은 현수막이바깥에 갇힌 나를 반성도 없이 흔든다 걸터앉은 계단이제멋대로 흩어지는 길 위의 낙엽이새들이 자유롭게 풀어놓은 허공이나를 구속하고 있는 바깥이라니!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나는 지금 바깥이다

♧...참한詩 2025.04.15

어느 대나무의 고백 / 복효근

어느 대나무의 고백복효근  늘 푸르다는 것 하나로내게서 대쪽 같은 선비의 풍모를 읽고 가지만내 몸 가득 칸칸이 들어찬 어둠 속에터질 듯한 공허와 회의를 아는가고백컨대나는 참새 한 마리의 무게로도 휘청댄다흰 눈 속에서도 하늘 찌르는 기개를 운운하지만바람이라도 거세게 불라치면허리뼈가 뻐개지도록 휜다, 흔들린다제 때에 이냥 베어져서난세의 죽창이 되어 피 흘리거나태평성대 향기로운 대피리가 되는정수리 깨치고 서늘하게 울려 퍼지는 장군죽비하다못해 세상의 종아리를 후려치는 회초리의 꿈마저꿈마저 꾸지 않는 것은 아니나흉흉하게 들려오는 세상의 바람소리에어둠 속에서 먼저 떨었던 것이다아아, 고백하건대그 놈의 꿈들 때문에 서글픈 나는생의 맨 끄트머리에나 있다고 하는 그 꽃을 위하여시들지도 못하고 휘청, 흔들리며, 떨며 다만..

♧...참한詩 2025.04.05

꽃향시향-대나무꽃

대나무꽃  “대나무도 꽃이 핀다. 그러나 열대 지방의 대는 곧잘 꽃을 피우나 우리나라 같은 데서는 매우 보기 어렵다. 식물인 이상 꽃은 반드시 피우는데 언제 피는지는 잘 알 수 없다. 영양의 부족 때문이라든가 태양의 흑점에 관계가 있다고도 하나 확실한 증거는 없고, 일본에서는 대꽃이 피면 기근이 있다고도 하는데, 전설에 불과하다고 한다. 대나무에 꽃이 필 때는 대숲 전체가 뿌리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늙은 대나무도 어린 대나무도 일제히 피고 그 후는 전부 시들어 죽는다.”― 동아일보, 1956년 10월 15일“경북 칠곡군 인동면과 고령군 고령면 일대에 대나무꽃이 피어 주민들은 대나무 꽃이 피면 흉조라고 옛 미신을 믿고 있는 듯 화제를 모으고 있다. 경북도경은 12일 이 같은 사실에 대해 ‘대나무는 영물인 봉..

♧...자료&꺼리 2025.04.05

로또를 포기하다 /복효근

로또를 포기하다복효근​똥을 쌌다누렇게 빛을 내는 황금 똥깨어보니 꿈이었다들은 바는 있어 부정 탈까 발설하지 않고맨 처음 떠오르는 숫자를 기억해두었다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렸다어려운 두 누나 집도 지어주고자동차를 바꾸고 아내도아니, 아내는 이쁜 두 딸을 낳아주었으니남 보는 눈도 있고 하니 좀 더 생각해 볼 것이다직장도 바꾸고물론 시도 쓰지 않을 것이다제대로 쓰지도 못하면서 시인이라는 이름이 버겁기만 하고머리털 빠지는 그 짓을뚝심 좋은 이정록 같은 이에게나 맡길 것이다내일 퇴근길에 들러서 사 올까너무 늦은 것은 아닐까 어디서 로또를 사지또 뭐라고 말해야 할까 똥 꿈을 꾸었다고 쑥스럽게그건 그렇고 내가 부자가 되면화초에 물은 누가 줄 것이며 잡초는 어떻게 하고…안 되겠다로또를 포기하기로 했다나는 갑부가 되지 말..

♧...참한詩 2025.04.02

눈짓 / 이진흥

눈짓이진흥 신들의 대화가 눈짓*이라면 연인들의 대화도 눈짓이다.입말은 거짓이 가능해도 눈으로는 속일 수 없어 연인들은 말하지 않고 눈을 맞춘다.석가가 말없이 연꽃을 들어 보이자 가섭이 눈 맞추고 미소하지 않았던가.꽃이 소리 없이 미소 지으면 어디선가 나비가 날아오고,당신이 밤하늘 바라보면 별이 깜빡이는 게 그 까닭이다. *휠덜린의 말

♧...참한詩 2025.03.30

삶이 나를 불렀다 / 김재진

삶이 나를 불렀다 ​김재진  ​삶이 나를 불렀다한 때는 열심히 사는 것만이 삶인 줄 알았다남보다 목소리 높이진 않았지만결코 턱 없이 손해보며 살려하진 않던 그런 것이삶인 줄 알았다북한산이 막 신록으로 갈아입던 어느날지금까지의 삶이 문득 목소리 바꿔 나를 불렀다나는 지금 어디까지 와 있는가?어디를 그렇게 바삐 가고 있는 건가?반짝이는 풀잎과 구르는 개울하찮게 여겨왔던 한 마리 무당벌레가 알고 있는미세한 자연의 이치도 알지 못하면서아무것도 모르면서 다 알고 있는 듯 착각하며그렇게 부대끼는 것이 삶인 줄만 알았다.북한산의 신록이 단풍으로 바뀌기까지노적봉의 그 벗겨진 이마가 마침내 적설에 덮이기까지아무것도 모르면서나는 그렇게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살아왔다

♧...참한詩 2025.02.03

연못을 웃긴 일 / 손택수

연못을 웃긴 일 손택수  못물에 꽃을 뿌려보조개를 파다​연못이 웃고내가 웃다​연못가 바위들도 실실물주름에 웃다​많은 일이 있었으나기억에는 없고​못가의 벚나무 옆에앉아 있었던 일​꽃가지 흔들어 연못겨드랑이에 간질밥을 먹인 일​물고기들이 입을 벌리고올라온 일​다사다난했던 일과 중엔 그중이것만이 기억에 남는다

♧...참한詩 2025.0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