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한詩

얼굴 / 안상학

김욱진 2025. 4. 15. 23:07

얼굴

안상학

 

 

세상 모든 나무와 풀과 꽃은

그 얼굴 말고는 다른 얼굴이 없는 것처럼

늘 그 얼굴에 그 얼굴로 살아가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내 얼굴을 보지 않아도

내 얼굴이 내 얼굴이 아닌 때가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꽃은 어떤 나비가 와도 그 얼굴에 그 얼굴

나무는 어떤 새가 앉아도 그 얼굴에 그 얼굴

 

어쩔 때 나는 속 없는 얼굴을 굴기도 하고

때로는 어떤 과장된 얼굴을 만들기도 한다

진짜 내 얼굴은 껍질 속에 뼈처럼 숨겨두기 일쑤다

 

내가 보기에 세상 모든 길짐승, 날짐승, 물짐승도

그저 별 다른 얼굴 없다는 듯

늘 그렇고 그런 얼굴로 씩씩하게 살아가는데

나는,  아니래도 그런 것처럼,  그래도 아닌 것처럼

진짜 내 얼굴을 하지 않을 때가 많다

 

나는 오늘도

쪼그리고 앉아야만 볼 수 있는 꽃의 얼굴과

아주 오래 아득해야만 볼 수 있는 나무의 얼굴에 눈독을 들이며

제 얼굴로 사는 법을 배우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