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5 8

아프지 마, 라고 네가 말할 때 / 강문숙

아프지 마, 라고 네가 말할 때강문숙 한 사흘 대답 없던 톡에깨알 숫자 사라지고 댓글 뜬다 주말엔 폰을 아예 책상 서랍에 넣고 지내일찍 난로를 꺼버린 탓에감기가 왔나 봐이제 난 좀 괜찮아졌지만걱정했을 네가 더 걱정이야너는 아프지 마 아프지 마, 라는 말 참 아프게 다정한 말봄꽃 피려다가 꽃샘바람에 움츠러들 때가는 입술 벌려 봄볕 받아먹고 있던저 나뭇가지를 꺾어서 쓰는 말 어떤 색으로 피어날지 알면서도난생 처음 본 색깔인 양 신기한 꽃잎 속하얀 입김 같은 말 말에도 온도가 있어 느린 게이지 곡선으로 끌어올리다노을 같은 발음으로 아프지 마, 네가 말할 때아프다가도 나는 안 아프고 그래서 더 아프고

♧...참한詩 2025.05.29

나비, 참을 수 없이 무거운 / 강문숙

나비, 참을 수 없이 무거운강문숙 나비의 날갯짓을 가벼움의 상징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보편적이다, 하지만 나비의 고요한 순응이 진심이 아닐지도 그 날갯짓의 무게는 참을 수 없이 무거운 것일지도 모른다 얘야, 나비 곁에서 눈 비비지 마라 네 눈이 멀어 버리질지도 몰라 허공에 찍힌 필사적인 날개의 지문을 보았는지 엄마는 꽃밭 근처에도 못 가게 했다 날개가 공기의 저항을 극복하는 데 필요한 체온은 30도, 있는 힘 다해 허공의 계단을 짚으며 날아가던 나비의 근육이 터지기 직전 날개는 찢어질 듯 얇아지며 천천히 접혔다 펼쳐지는 동어반복으로 겨우 허공을 간섭하다가 끝내 꽃에게로 투신한다 그 순간의 고요함이란 가까스로 태풍의 눈 속에 들어가 먼바다를 건너는 나비의 꿈이 시작되었다는 에두름이다 하필 ..

♧...참한詩 2025.05.29

고요한 그릇 / 강문숙

고요한 그릇강문숙 의자는 그릇이다, 흔들리면서 누군가의 몸을 담는다그저 겸손히 받아들이면서 그의 생을 한순간 안아보는 것인데설레임보다는 예고 없이 쿵, 떨어지는 심장 같은 것일 때가 많다한 생이 담겨진다는 것은 희로애락의 지난한 은유일 뿐오랜 시간 흘러왔을 내밀한 그리움과 고독, 또는숨 가쁘게 걸어왔던 순간들이 버무려져 의자는 보이지 않게 우묵해진다삐걱삐걱삐걱, 그래그래그래, (여자도 오랫동안 그릇이었으니)저 소리는 한 생의 무게를 다 읽어낸 흐느낌이 배어 있는 그릇이마음의 흔들림을 빙자하여 제 속에 고인 울음을 다스리려는 방편(方便)이 아닐까저녁이 되는 것도 모르는 채 흔들의자와 여자는 오롯이 한 몸이다한 생을 다한다는 것의 숭고함이란 누군가의 몸을 담아 보아야 안다한 때 아이를 담고 있던 그 여자의 ..

♧...참한詩 2025.05.28

혼자 가는 길 / 강문숙

혼자 가는 길강문숙 내 마음 저 편에 너를 세워 두고혼자 가는 길, 자꾸만 발이 저리다 잡목 숲 고요한 능선 아래 조그만 마을거기 성급한 초저녁 별들 뛰어 내리다 마는지어느 창백한 손길이 들 창을 여닫는지아득히 창호지 구겨지는 소리, 그 끝을 따라 간다둥근 문고리에 찍혀 있는 지문들낡은 문설주에 문패자국 선연하다 아직 네게 닿지 못한 마음 누르며혼자 가는 이 길,누가 어둠을 탁탁 치며 걸어 오는지내 마음의 둥근 문고리 잡아 당기는지

♧...참한詩 2025.05.28

청동우물 / 강문숙

청동우물 강문숙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그의 아내와 지나간다.댕기머리 아들이 천자문을 끼고 지나간다.헛기침하며 교자 탄 나으리 지나가고농사꾼 방물장수 유기전의 사내들이 떠들며 지나간다.쪽진 머리의 그의 아낙들 젖통을 흔들며 지나간 뒤소와 말, 돼지와 홰를 치던 닭들이, 쥐새끼들이 지나갔으리. 천체박물관 전시실 안, 앙부일구(仰釜日晷)* 청동의 육중한 원을 따라 하염없이 감겼다가 풀리는 소리들이 있다. 웅웅거리며, 무수한 결을 따라 돌다가 전시실을 가득 채운다. 그 소리는 푸르다.기록되지 않은 역사란 때로, 소리가 되어 떠돌기도 하는 것인지, 저 깊은 시간의 우물 속을 들어다보노라니 머리끝이 쭈뼛해진다. 사소한 기억까지도 담고 있는 청동우물.손바닥을 대어보니, 사라진 것들이 속속 들어와 울음 섞인 노래를 풀..

♧...참한詩 2025.05.28

나의 시답잖은 시론

나의 시답잖은 시론김욱진 오늘 참 먼 길을 왔습니다. 여기까지 오는데 68년이 걸렸네요. 제가 이 집까지 오게 된 것은 참으로 기적입니다. 멀고도 가까운 이곳 강문숙 선생님과의 시절 인연이 여기, 지금, 나와 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 순간 귀하고 소중한 인연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시답잖은 시집 한 권이 因이었고 성주에 있는 선원 카페에 강물소리 몇몇 시인님들과 동행한 것이 緣이었습니다. 아슬아슬하게 닿은 이 인연의 줄이 이토록 끈끈하게 이어질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마는 나는 분명 지금, 여기 있습니다. 여기 함께하신 선생님들 모두 나를 한번 찾아 보십시오. 여기, 지금, 나는 어디 있습니까? 저기 마당에 서있는 나무를 한번 보십시오. 제 말에 속지 말고 저 나무에 속아 넘어가지 마십시오..

♧...자료&꺼리 2025.05.14

어느 노송의 주례 말씀

어느 노송의 주례 말씀김욱진 고향 친구 딸내미 예식 가서주례 없는 혼례식을 보고 예식장 마당 벤치에 나와 앉아있다니전깃줄로 탱탱 묶인 노송 한 그루반짝반짝 불이 들어오자주례 말씀 한 마디 하신다서로 다른 누구랑 붙어산다는 것일촉즉발의 위기지요나는 늘 푸른 줄만 알았어요일 촉 전구쯤이야, 하고 살았는데그 일 촉들이 한꺼번에 번쩍벌떼처럼 달려들 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소그런 줄도 모르고야, 저 소나무 늘 짜릿하겠다비바람 몰아치고 어둠 찾아와도 저토록 뜨겁고 환상적인 밤또 어디 있겠냐고남들은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지만, 나무의 생 또한 저기, 저솔방울들처럼 붙어살다 가는 객일 뿐이오이 세상 늘 푸른 솔이 어디 있소 (시집『어느 노송의 주례 말씀』, 2025 시인동네)

♧...발표작 2025.05.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