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조용한 혁명 74

못 다한 말

못 다한 말 -골방에서 자장면 한 그릇 천 원 할 때 세 그릇 값으로 시집 한 권 샀던 그 시절 나는 쫄쫄 굶긴 배 띄워놓고 배부른 척하다 신세타령만 하는 비렁뱅이 시인이 되고 말았다 책장에 꽂힌 해묵은 시 몇 편 거들먹거리며 유명시인 헐값에 다 팔아먹고 이젠 골방으로 밀려난 시의 집들마저 경매로 넘겨야 할 판이니 내게로 와 굶어죽은 시혼들이여 지렁이처럼 구불텅구불텅 기어가다 걸려 넘어지고 잘리고 짓밟힌 숱한 문장들이여 그대 못 다한 말, 못 다한 저녁의 풍금소리 언제쯤 울려 퍼질 것인가 골방에 골백번 더 처넣었다 건져낸 말 아, 누가 숨은 상상과 행간의 말들을 읽고 갈까 자장면 한 그릇 값도 채 안 되는 나의 집 나의 시집 골방에서 말을 잃은 이 밤

그놈의 나1

그놈의 나1 김욱진 버릇없이 나도 아닌 것이 나처럼 달라붙어 나를 먹는 놈 곰살갑게 굴 때는 귀엽더니 이제는 나를 먹잇감으로 넘보기까지 그렇다고 모르는 척하기도 뭐하고 붙잡아 둘 수도 없는 먹어도 먹어도 배부르지 않는 나 더부살이하는 나를 향해 절박한 심정으로 물어본다 나 먹는다는 건 꼭꼭 숨은 나를 찾는 일 때로는 깜빡깜빡 까먹고 나도 모르게 헛구역질하는 그놈의 나는 대체 누구인가

그놈의 나2

그놈의 나2 김욱진 나는 도둑이었다 이 세상 와서 보니 훔치는 것보다 쉬운 일은 없다 그토록 길들여진 마음 녀석은 하루에도 수없이 이곳저곳 서성거리며 뭐든지 다 훔쳤다 눈 깜짝할 사이 그놈은 주인 없는 집 돌아다니며 주인 행세하였고 때로는 주인 앞에서도 버젓이 훔쳤다 그러나 주인은 한 번도 나를 신고하지 않았다 알고 보니 그놈은 나의 종이었고 나는 그놈의 주인이었다 그놈의 나는 도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