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벅, 절하는 섬 꾸벅, 절하는 섬 먼 나라 얘기처럼 까마득하다 남태평양 섬나라 피지 한 초등학교로 일 년간 파견 근무하러 간 딸내미 매일 아침 꼬박꼬박 저금하듯 카톡으로 꾸벅, 절하고 출근한다 함께 살 땐 세뱃돈 거들먹거리며 설날에나 겨우 한 번 엎드려 받던 절 공짜로 톡톡 받아먹으니 날마다 .. ♧...참, 조용한 혁명 2016.11.09
등나무 사는 얘기 등나무 사는 얘기 계산 성당 맞은 편 등줄기 뻗어 기둥 세우고 지붕 덮고 사는 등나무 집 한 채 해 달 별 번갈아 와서 자고 간다 소소한 집안일은 손수 다하고 바깥일은 제집처럼 드나드는 새들이 다 봐준다 등꽃 흐드러지게 핀 봄이면 사랑 고백하는 청춘남녀 머리 위에 꽃비 내리고 굽은.. ♧...참, 조용한 혁명 2016.11.09
접붙이다 접붙이다 좌익우익이 뭔지도 모르는 어린 시절 할아버지는 고욤나무에다 감나무 접붙였다 감나무 눈을 떼다 억지로 고욤나무 눈에다 흙을 바르고 붙였으니 둘 다 눈앞이 캄캄하고 어리둥절했겠다 눈과 눈 경계 허물어진 봄이 되자 고욤나무에서 감나무 이파리 돋았다는 소문이 온 동네 .. ♧...참, 조용한 혁명 2016.11.09
그늘 그늘 등나무 아래서 등 굽은 할머니 두 분 마주보고 앉아 주고받는 얘기 등 너머로 엿듣는다 지난 번 디스큰가 뭔가 튀어나왔다더니 수술은 했어? 아니, 가끔 다리 좀 저려도 그냥 등 굽히고 살기로 마음먹었어 드나나나 등 굽히고 꾸벅꾸벅 절하며 지내보니 아들 딸 며느리도 좋아하고 .. ♧...참, 조용한 혁명 2016.11.09
상생의 손 상생의 손 호랑이 꼬리 닮은 호미곶에 가면 육지와 바다는 한 몸이다 육지는 왼손을, 바다는 오른손을 번쩍 쳐들고 있다 손과 손이 만나 뭍과 바다를 낳고 더불어 사는 세상 쥐락펴락하는 손아귀도 한낱 가느다란 손가락일 뿐이다 부끄럽게도 나는 오늘 손가락 같지 않은 손가락을 내밀.. ♧...참, 조용한 혁명 2016.11.09
엄지손가락 엄지손가락 후손들 앞에서 항상 나를 먼저 치켜세워주고 거미줄처럼 얽히고설킨 세상 큰일 펑 터질 때마다 손도장 꾹 눌러 찍으며 버팀목이 되어주던 나의 일급비서 지난 늦가을 오후 늘그막에 함께 살 흙집 한 채 지으려고 주민센터 인감 한 통 떼러갔더니 엄지손가락 지문 다 없어졌다.. ♧...참, 조용한 혁명 2016.11.09
기도발 기도발 바람 잘 날 없이 잔병치레 잦은 아들놈 그저 몸이나 성케 해달라고 명당이라는 명당 다 찾아다니며 자나 깨나 합장하고 엎드려 절만 하시던 어머니 명당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으셨는지 해만 뜨면 비슬산 문필봉 빤히 내려다보는 양리 한복판 경로당 가서 기웃거리십니다 팔순 반고개 훌쩍 넘어서야 기도발 제대로 받으시는지 경로당 고스톱 판만 벌어지면 명당자리 차고앉아 싸 붙인 똥은 소리실댁이 다 주워 먹는다네요 그 끗발로 한 푼 두 푼 노잣돈 모으시는 어머니 밤마다 십 원짜리 동전 세는 재미 솔솔하시답니다 ♧...참, 조용한 혁명 2016.11.09
소리실댁 소리실댁 처녀 공출 바람에 양반 가문이라는 소문만 듣고 땟거리도 없는 종갓집 열여섯에 시집 온 산골 여자 서른 다 되도록 손 이을 자식 하나 낳지 못해 입 꼬리 촉 처진 여자 이집 저집 동냥한 쌀 한 됫박 이고 담뱃대 문 시어미 눈치 보며 삼십 리 밖 돌부처한테 흠뻑 빠진 그 여자 이 .. ♧...참, 조용한 혁명 2016.11.09
새옷 한 벌 새옷 한 벌 마실 나갔다 신물 다 빠진 월남치마 얻어 입고는 새옷 샀다며 식구들 앞에서 자랑하던 어머니 나에겐 철철이 새옷 사주셨다 아버지 돌아가시기 전부터 일본 가서 사는 오촌 당숙이 사 둔 다랑논 서마지기 부쳐 먹는 빌미로 치매든 팔순 종조부까지 모시고 산 어머니 화병 생긴.. ♧...참, 조용한 혁명 2016.11.09
고양이 밥을 주다 고양이 밥을 주다 등창 도려낸 자국처럼 움푹 팬 할머니 제삿밥 몇 숟갈 어둠에 짓이겨 고수레 하였더니 어미 고양이 한 마리 귀신같이 와서 먹고 갔다 그 다음날 밤 생쥐 한 마리 꽉 문 채 새끼 줄줄 데리고 왔다 재취로 시집오신 할머니처럼 가시조차 발라먹지 않은 조기 시렁 위에 가지.. ♧...참, 조용한 혁명 2016.1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