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노송의 주례 말씀
김욱진
고향 친구 딸내미 예식 가서
주례 없는 혼례식을 보고
예식장 마당 벤치에 나와 앉아있다니
전깃줄로 탱탱 묶인 노송 한 그루
반짝반짝 불이 들어오자
주례 말씀 한 마디 하신다
서로 다른 누구랑 붙어산다는 것
일촉즉발의 위기지요
나는 늘 푸른 줄만 알았어요
일 촉 전구쯤이야, 하고 살았는데
그 일 촉들이 한꺼번에 번쩍
벌떼처럼 달려들 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소
그런 줄도 모르고
야, 저 소나무 늘 짜릿하겠다
비바람 몰아치고 어둠 찾아와도
저토록 뜨겁고 환상적인 밤
또 어디 있겠냐고
남들은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지만, 나
무의 생 또한 저기, 저
솔방울들처럼 붙어살다 가는 객일 뿐이오
이 세상 늘 푸른 솔이 어디 있소
(시집『어느 노송의 주례 말씀』, 2025 시인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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