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작

어느 노송의 주례 말씀

김욱진 2025. 5. 8. 11:21

어느 노송의 주례 말씀

김욱진

 

고향 친구 딸내미 예식 가서

주례 없는 혼례식을 보고  

예식장 마당 벤치에 나와 앉아있다니

전깃줄로 탱탱 묶인 노송 한 그루

반짝반짝 불이 들어오자

주례 말씀 한 마디 하신다

서로 다른 누구랑 붙어산다는 것

일촉즉발의 위기지요

나는 늘 푸른 줄만 알았어요

일 촉 전구쯤이야, 하고 살았는데

그 일 촉들이 한꺼번에 번쩍

벌떼처럼 달려들 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소

그런 줄도 모르고

야, 저 소나무 늘 짜릿하겠다

비바람 몰아치고 어둠 찾아와도 

저토록 뜨겁고 환상적인 밤

또 어디 있겠냐고

남들은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지만, 나

무의 생 또한 저기, 저

솔방울들처럼 붙어살다 가는 객일 뿐이오

이 세상 늘 푸른 솔이 어디 있소

 

(시집『어느 노송의 주례 말씀』, 2025 시인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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