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니처럼
김욱진
앉았다 일어서니 빙 둘렸다
방전이 된 건지
유효 기간이 다 되어 가는 건지
겨우 119 불러 병원 갔다
다짜고짜 빈혈 검사해보자며
피 한 대롱 뽑고
간수치는 괜찮은데, 의사 선생 고개 갸우뚱갸우뚱
입이 자주 마르고 체중이 좀 줄었습니다
그럼, 정밀 당뇨 검사도 해봐야 된다며
또 피 한 대롱 뽑고
혹, 숨이 차다거나 몸이 가렵지는 않습니까
이참에 콩팥 검사해보는 게 좋겠어요
그러면서, 또 피 한 대롱 뽑고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피 한 사발 마셔도 시원찮을 판에
피 세 대롱 야금야금 빼앗기고 나니
나도 모르게
암울한 세포가 스멀스멀 기어가는 거 같고
허수아비가 되어버린 기분도 들고
이러다 진짜 쓰러지는 거 아닌가 싶다가도
이게 다 유전이라니, 얼마나 다행인지
핏줄 따라 죽 거슬러 올라가 보면, 나
무의 유전자 정보가 깨알같이 드러날 테고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 그랬거늘
어지러우면 어지러운 대로
가려우면 가려운 대로
엄니처럼 그냥 그렇게
논두렁 밭두렁 돌아다니며
달래 냉이 쑥 캐고
빈혈 당뇨 혈압 살살 달래며
어우렁더우렁 살다 가면 되지, 뭐
(2023 죽순 57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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