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를 장미라 부를 때
김욱진
지붕에서 비가 샜습니다
한밤중 쏟아지는 빗소리에 말도 샜습니다, 할매는
그놈의 장미, 참 오래도 간다 하시면서
그냥 방바닥에다
고무다라이 세숫대야 냄비 줄줄이 받쳐놓고
밤새 뚝뚝 떨어지는 빗방울 한가득씩 받았습니다
물 부자 된 담날 아침
그 물로 나는 세수하고 머리 감고
엄마는 설거지하고 빨래도 하고
할매는 장독대 위에다 정화수 한 그릇 떠놓고
소지 한 장 불 사르며
손 귀한 우리 집 자손 번성하고
식구들 그저 몸이나 성케 해달라고
천지사방 삼신 할매한테 빌었습니다
그 기도발이 먹혔던지
시집간 막내 고모는 떡두꺼비 같은 아들 낳고
풍으로 쓰러진 할배는 죽을 고비 넘기시고
포도알처럼 송알송알 맺힌 물방울 천장 스며들어
장밋빛으로 불그스레 물들었습니다
장마가 그려놓은 장미 한 송이
내 가슴 속 천장엔 아직도
어릴 적 장마 때마다
할매한테 주워들은 장미라는 비
꽃 넝쿨 채로 착, 달라붙어있습니다
(2024 도동문학 연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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