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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나 사이 / 이생진

아내와 나 사이이생진​​ 아내는 76이고나는 80입니다지금은 아침저녁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걸어가지만 속으로 다투기도 많이 다툰 사이입니다​요즘은 망각을 경쟁하듯 합니다나는 창문을 열러 갔다가창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고아내는 냉장고 문을 열고서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누구 기억이 일찍 돌아오네 기다리는 것입니다​그러나 기억은 서서히 우리 둘을 떠나고마지막에는 내가 그의 남편인 줄 모르고그가 내 아내인 줄 모르는 날도 올 것입니다서로 모르는 사이가서로 알아 가며 살다가다시 모르는 사이로 돌아가는 세월그것을 무어라고 하겠습니까인생?철학?종교?우린 너무 먼 데서 살았습니다.

♧...참한詩 2024.07.16

그놈의 애 / 김욱진

그놈의 애김욱진 나에겐 늘 애 하나가 착, 달라붙어 있다그 애가 누구 애인지 모르지만애물단지처럼 나를 졸졸 따라다닌다영화관 앞 지나가면 영화보자 그러고고기 굽는 냄새 풍기면 고기 사먹자 그러고예쁜 여자 지나가면 저 여자 훔쳐보자 그러고가끔 성가실 때도 있지만 애처롭다는 생각 들어그 애가 웃으면 같이 따라 웃고찡그리면 나도 같이 찡그린다어딜 가다 밥 먹자 그러면 밥 먹고잠자자 그러면 잠자고똥마렵다 그러면 애써 똥 누고그러지 않으면, 금세 화 버럭 내는 그 애왜 이러지, 나를 온종일 부려먹고도밤이면 젖먹이처럼 칭얼거리고 보채고버르장머리 확 뜯어고쳐줘야겠다 싶어그놈의 애 저만치 뚝 떼놓고애간장 끓이듯 녹차 한 사발 끓여나 한 잔 그 애 한 잔여기, 지금, 누가 차를 마시고 있냐고애먹은 놈이 애먹인 놈한테 물었..

♧...발표작 2024.07.11

나비 / 최승호

나비최승호 짐짝을 등에 지고 날거나,헬리콥터처럼 짐짝을 매달고날아가는 나비를, 나는 본 적이 없다. 나비는 바늘처럼 가벼운 몸 하나가 있을 뿐이다.몸 하나가 전 재산이다.그리고 무소속이다.그래서 나비는 자유로운 영혼과 같다.무소유(無所有)의 가벼움으로 그는 날아다닌다.꽃들은 그의 주막이요, 나뭇잎은 비를 피할 그의 잠자리다.그의 생은 훨훨 나는 춤이요, 춤이 끝남은 그의 죽음이다.그는 늙어 죽으면서 바라는 것이 없다.바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죽을 때에도 그는 자유롭다. -덧붙임(반칠환 시인)“사실 나비는 영업사원이다.그는 천 개의 거래처 주막을 드나든다.한 주막에서 한 잔씩 잔술을 마신다.술에 약하지만 거절할 수 없다.고치에서 깨자 배운 게 이 직업이다.화려하면서도 쓸쓸한 주막을 나서면대낮에도 허공을 헛..

♧...참한詩 2024.06.06

행복은 내 안에 / 이진흥

행복은 내 안에이진흥   열세 살짜리 손녀 노트 첫 장에 ‘행복은 내 안에’라고 쓰여 있다. 행복은 잡을 수 없는 파랑새라는데 어린 것이 참 당돌하다. 파랑새를 찾아서 산 넘고 물 건너 멀리 갔다가 허탕 치고 지쳐서 돌아왔더니 그 새는 뜰앞 나뭇가지에 앉아있었다는 시구가 생각난다. 문득 창밖에서 새소리가 들린다. 커튼 사이로 내다보니 곤줄박이가 난간에 앉아 햇살을 쪼고 있다. 방금 티비가 보여주는 거짓과 위선이 난무하는 뉴스에 속이 상했는데, 저 작고 예쁜 새가 쪼는 햇살이 얼핏 내 안에 부싯돌처럼 반짝이며 왠지 모를 생명의 기쁨과 황홀의 순간을 열어준다. 그렇구나 아이야, 행복은 산 너머 저쪽 파랑새가 아니라 지금 내 안에서 반짝이는 햇살이구나. 바로 여기 생생하게 살아있는 자신을 잊고 산 너머 저쪽만..

♧...참한詩 2024.06.02

방천시장의 봄 / 이하석

방천시장의 봄이하석 ​대구 중구에서봄을 제일 먼저 파는 데는당연히, 방천시장 입구다.​겨울의 끝에서 먼 데 할머니가 캐 와서새삼, 수줍수줍 펴 보이는냉이의 봄 뿌리가 파라니희다.​어떻게 한 움큼 쥐어주든천 원을 안 넘어,아무도 못 깎는 절대의 봄값.​시장의 아침 그렇게 열어놓고일찍 장사 끝낸 할머닌또 손주 밥 먹일 때라며 서둘러버스로 돌아간다.​시장통 입구에종일 밝게 남아 있는,할머니 냉이꽃처럼 앉았던봄 성지(聖地)

♧...참한詩 2024.05.20

청보리밭 / 사윤수

청보리밭사윤수  이 짐승은 온몸이 초록 털로 뒤덮여 있다머리털부터 발끝까지 남김없이 초록색이어서눈과 코와 입은 어디에 붙어있는지 모르겠다초록 짐승은 땅 위에 거대한 빨판을 붙인 채 배를 깔고검은 밭담이 꽉 차도록 엎드려 있다 이 짐승의 크기는 백 평 이백 평 단위로 헤아린다크지만 순해서 사납게 짓는 법이 없고검은 밭담 우리를 넘어가는 일도 없다, 만약밭담을 말〔馬〕처럼 만든다면 짐승은 초록 말로 자라고말은 초록 갈기를 휘날리며 꿈속을 달리겠지 바람이 짐승의 등줄기를 맨발로 미끄러져 다닌다바람의 발바닥에 시퍼렇게 초록 물이 들었다굽이치는 초록 물결 초록 머리채짐승은 바람의 안무에 초록 비단 춤을 춘다

♧...참한詩 2024.05.20

묘연 / 김욱진

묘연김욱진 엄니 살던 흙집에 갈 때마다고양이 먹을거리 주섬주섬 챙겨간다어떤 날은 식구들 발라먹은 생선 가시 조심스레 가져가애간장 녹이듯 나눠주고어쩌다 치킨이라도 한 마리 시켜먹은 날은바삭거리는 껍데기 날개뼈 오도독뼈에다고소한 냄새까지 듬뿍 담아가엄청 큰 보시하듯 훅 던져주면녀석들은 벌떼처럼 달려들어한 동가리씩 오도독오도독 씹어재끼고는땅바닥 뒹굴다가 히죽히죽 웃다가 날 보고 꾸벅!것도 재롱이라고 다음날은아침상에 오른 프라이한 계란 노른자 집사람 몰래 숨겨가노랑나비 날갯짓하듯 한 조각씩 나풀나풀 날려주고그래서인지, 내 발자국 소리만 들리면동네 고양이들이 텅 빈 집으로 우르르 몰려와젖먹이 녀석들은 대놓고 야옹, 야옹 졸라대고나먹은 녀석들은 내 눈치 살살 보며 입맛 쫄쫄 다신다먹이에 길들여진 고양이들어느새 나만..

♧...발표작 2024.05.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