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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 노래 / 문성해

모래, 노래 문성해 옛날의 노래는 모래였다네 손가락 사이로 부드럽게 흘러내렸다네 발가락 사이로 따뜻하게 파고들었다네 누군가 와서 상한 깃털 같은 마음을 모래 속에 파묻고 가면 파도가 데려가 씻기고 씻기고 햇볕은 말리고 바다는 절여주고 갈매기는 품어주었다네 흰 알처럼 옛날의 노래는 하루종일 손으로 만질 수 있었다네 그 위에 뒹굴 수 있었다네 부드러운 요처럼 부서져 내린 노래는 스스로 마을로 흘러들어 부뚜막에도 뜨락에도 요대기 위에도 포슬포슬 기어들어 까슬까슬 눈동자 속을 파고들었다네 심장 속에도 붉게 박혔다네 어떤 노래는 아주 사적이라서 죽을 때까지 아무도 퍼갈 수 없었다네

♧...참한詩 2023.11.05

고독이 거기서 / 이상국

고독이 거기서 이상국 동해안 국도를 지나다보면 바닷가에 '고독'이라는 까페가 있다 통나무로 지은 집인데 지날 때마다 마당에 차 한대 없는 걸 보면 고독이 정말 고독하다는 생각이 든다 고독은 아주 오래된 친구 한때는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영혼이나 밤을 맡겨놓고 함께 차를 마시거나 며칠씩 묵어가기도 했는데 지금은 외딴 바닷가 마을에서 온몸을 간판으로 호객행위를 하며 사는 게 어려워 보인다 ​나는 언제나 길 위에 있으므로 그저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데 가끔 동해안 국도를 지나다보면 고독이 거기서 늘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게 보인다

♧...참한詩 2023.11.05

그 바람에

그 바람에 김욱진 은행들이 다 털렸다 졸지에 알거지 신세가 되어버린 은행들은 길바닥에 나앉았고 그 소문은 일파만파로 번졌다 구린내가 났다 누구 소행인지 따져볼 겨를도 없이 줄도산 당한 은행들은 속수무책이었다 그 바람에 은행 주가는 폭락했고 빚쟁이들은 눈덩이처럼 불어난 빚 짓뭉개듯 은행 짓밟고 지나갔고 바람은 그냥 빚잔치 한 판 속 시원하게 벌인 듯 지나갔다 그 바람에 빚진 늦가을 바람은 큰길가 신호등 언저리 보도블록 위 은행 신용불량자 딱지처럼 딱 붙어있는 일수대출 광고지 직빵 전화번호부터 슬그머니 떼어내고 있었다 (2022 김명배문학상 작품상 수상작)

♧...발표작 2023.11.03

무료급식소

무료급식소 김욱진 수성못 둑을 돌다 보면 둑 가에 죽 둘러서서 새우깡을 새우처럼 방생하는 이들이 있다 그 소문은 일파만파로 퍼져 눈치코치 없는 꼬맹이 물고기들도 다 안다 온종일 북적이는 무료급식소 새우깡 몇 물속으로 던져주면 금세 새우들은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고 어디선가 그 냄새 맡고 몰려온 물고기들은 새우 한 마리 먼저 낚아채려고 죽기 살기로 달려든다 개중엔 동네 건달 행세하며 떼 지어 몰려다니는 패거리족도 있고 새끼 입에 들어가는 새우 꼬리 깡 물고 뜯어먹는 얌체족도 있지만 그래도 부지기수는 자식새끼 먹여 살릴 땟거리 구하려고 한평생 헤엄치며 돌아다닌 나 많은 물고기들 물 한 모금으로 아침 때우고 오늘은 어딜 가서 밥값을 하나 허구한 날 고민했을 이상화 시비 앞에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귀동냥만..

♧...발표작 2023.11.03

숯을 굽다 / 사윤수

숯을 굽다 사윤수 ​ ​ 베어낸 굴참나무를 수레에 실어왔다 둥치가 튼실한 걸 보니 하늘을 이고 자랐겠구나 우듬지에 따라온 두 평 반 구름이 높이 떠가고 가지마다 앉았던 새소리가 흩어졌다 ​ 참나무는 빈 몸이 되었다 세월을 자르고 바람을 토막 내고 잔가지와 잎은 불쏘시개로 쓸 테니 버릴 것이 없다 궁핍도 때로는 쓸모 있는 시절인 것을, 너를 구워 나를 익게 하리라 ​ 숯가마를 가득 채운 직립의 참나무에 불을 지핀다 세월이 타고 고뇌가 타고 나무의 기억들이 춤춘다 이레 여드레 꺼지지 않는 불꽃 속에서 나무는 죽고 또 죽어야 숯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으므로 나는 오로지 맑고 희거나 검게 빛나는 덩이를 얻고자 했으므로 ​ 한 때 숯을 굽는 일은 나의 실학이 되었다 숯이 된 굴참나무는 탈 때 연기가 나지 않고 오..

나의 힘은 내일을 비추는 오늘 - 순암을 읽다 / 김은숙

나의 힘은 내일을 비추는 오늘-순암을 읽다 ​김은숙 ​ 세상은 늘 원본이자 진본이라서 훗날이 반드시 고증해 온다 ​ 남는 건 기록이고 기록은 길이라서 정사(政事)를 버리고 정사(正史)만을 저록한다 ​ 사람의 심연을 다스리는 성현의 도는 저택과 같다 공리공론에 빠지지 않으려 선입견 버리고 붓을 드는 순간 갓을 고쳐 쓴 아집은 돌담 밖에서도 기웃거리지 못한다 ​ 실체가 끊어지면 정처 없이 걷고 실체가 보이면 한 달 내내 서고에 틀어박혀 혜안을 넓힌다 ​ 스무 권을 완성하는 동안 벼루는 움푹 패고 열 번째로 닳은 붓이 편년을 헤아린다 ​ 그러니 역사를 쓴 것은 내가 아니라 역사가 나를 집필한 것이다 ​ 잠시 흩어진 중심을 하나로 모아 머리말을 적지 않고 퇴고로 쓴 시간만큼 거슬러간다 ​ 밖을 보니 문득 새벽이..

한두레 마을 염소 이야기

한두레 마을 염소 이야기 김욱진 초등학교 때 나는 염소 동아리 반장을 한 적 있다 요즘 말로 하자면 근로 장학생인 셈이다 가정 형편 어려운 나는 장학금 턱으로 어린 암염소 한 마리를 받았다 소 키우는 집이 엄청 부러웠던 그 시절 학교만 갔다 오면 나는 염소 고삐 잡고 졸졸 따라다니며 허기진 배를 채웠다 그 염소가 자라 이듬해 새끼 두 마리를 낳았다 그 중 수놈은 팔아 중학교 입학금 마련하고 암놈은 건넛집 할머니랑 사는 여자아이에게 분양했다 희망 사다리 오른 그 아이도 어미 염소 되도록 길러 새끼 낳으면 릴레이식으로 건네주는 염소 동아리 염소 한 마리가 새끼를 낳고 그 새끼가 또 새끼 낳고 낳아 육십여 호 되는 한두레 마을은 어느새 염소 한 마리 없는 집이 없었다 뿔 맞대고 티격태격하던 이웃들 염소 교배시..

♧...발표작 2023.10.25

노숙 / 김사인

노숙 김사인 헌 신문지 같은 옷가지들 벗기고 눅눅한 요 위에 너를 날것으로 뉘고 내려다본다 생기 잃고 옹이 진 손과 발이며 가는 팔다리 갈비뼈 자리들이 지쳐보이는구나 미안하다 너를 부려 먹이를 얻고 여자를 안아 집을 이루었으나 남은 것은 진땀과 악몽의 길뿐이다 또다시 낯선 땅 후미진 구석에 순한 너를 뉘었으니 어찌하랴 좋던 날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만 네 노고의 헐한 삯마저 치를 길 아득하다 차라리 이대로 너를 재워둔 채 가만히 떠날까도 싶어 네게 묻는다 어떤가 몸이여

♧...참한詩 2023.0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