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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족

대가족 김욱진 엄니 살아생전 우리 집은 손이 귀하다고 늘 그러시며 고양이들만 찾아와도 손주 본 듯 반갑게 이밥에다 멸치 동가리 몇 얹어 봉당에 놓아두고 그러셨는데 엄니 떠난 그 집엔, 어느새 고양이 3대가 옹기종기 모여 산다 주인 노릇하면서 간간이 돌아다니는 생쥐도 잡고 이 골목 저 골목 땟거리 구하러 다니다가도 큰 볼일 작은 볼일 볼 때면 우리 집 텃밭으로 쫓아와 엉덩이 넙죽 까발리고 거름 주듯 똥 누고 언저리 흙 긁어 덮고 물 주듯 오줌 누고, 그 기운에 고추는 주렁주렁 가지는 반들반들 방울토마토는 올망졸망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다 그러다가도 가끔 나만 찾아가면 고양이 여섯 마리 마당 한복판 오도카니 둘러앉아 입맛 쪽쪽 다신다 엄니 생각에 계란노른자 후라이해서 하나씩 던져주면 손주 녀석들은 게 눈 감..

♧...발표작 2023.07.06

AI

AI 김욱진 저 아이 요즘 뭐든지 물으면 척척 대답을 다해준다고? 에이, 세상에 그런 아이가 어디 있어 태어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말로만 듣던 AI, 딴 세상 얘기처럼 들리더니만 어느새 그 아이가 이렇게 많이 컸어 챗GPT라고 부른다면서 그래, 맞아 조무래기라고 얕보지 말게 지난 번 이세돌 하고 바둑 둬서 이겼다는 그 아이야 그럼, 돌아이구만 이게 어디 사람 사는 세상인가 야, 이 친구야 지금, 여기 농담할 상황 아닐세 머잖아 자동차 자율주행 운전도 저 아이가 하고 자네가 몇날며칠 끙끙거려 짓는다는 시 한 편 저 아이는 몇 초 만에 후딱 써버린다네 시면 시, 소설이면 소설 심지어 나의 일기까지도 줄줄 다 써준다네 짧다 그러면 금방 늘여주고 좀 길다 그러면 눈치껏 줄여주고 “…해줘" “…알려줘" 하면..

♧...발표작 2023.07.03

2023년 제3회 <구지가문학상> 수상작 / 박형권

소금을 뿌리고 후추를 뿌리는 사이 박형권 ​ ​고등어 한 손 사서 한 마리는 굽고 한 마리는 찌개를 끓이는 게 좋을 것 같다 바다로 씻어낸 무늬가 푸를 때 침묵으로 말하는 통통한 몸을 갈라 복장을 꺼내고 무구정광다라니경을 생각해 보자 당장 읽을 수 없다면 비늘을 벗겨보자 지느러미를 쳐내 보자 부엌방의 전등 빛으로 읽어 내려가자 마지막 소절에서는 바다의 일몰을 불러내어 몸으로 건설한 저녁 한 끼를 불그스름하게 경배하자 생선 구워 밥상에 올리면 그곳이 세계의 중심 혀로 말씀을 삼키기도 한다 오늘도 피 흐르는 가을, 단풍을 뿌리며 단풍에 베인다 그리하여 단풍은 피보다 비리다 이 가을도 오래 가지 않을 터 몇 마리 더 사서 따로 남는 추억은 냉동실에 넣는다 생선 한 손은 왜 두 마리이어야 하는지 한 손은 들고 ..

새의 집 / 이규리

새의 집 이규리 귓속에 요란하게 비가 쏟아졌다 전정기관에 비가 집을 짓는다 가재도구가 흔들리고 새가 둥지를 틀었나 불빛이 들여다본다 어지러울 수 있다고 의사는 말했다 그렇다고 웃음을 거두라는 말은 아니라고도 했다 뭐, 너무 반듯이 걸으려고 하지 마세요 벽을 의지하고 걷다 보면 벽을 이해하지 않을까요 비유법을 쓰는 의사를 신뢰하기로 하면서 벽을 믿어보았다 내가 밀렸다 천장에 동그라미들이 흩어지고 모이고 사라지는 동안 회전목마가 돌고 아버지는 오지 않고 치마가 짧아지고 있었다 여기가 우듬지구나 우듬지는 새의 집이구나 만질 수 없는 소리들이 가득 들어있구나 고개를 돌릴 때마다 특히 어지러웠는데 눈보라가 날리고 그때 아주 잠깐 피안이 있었고 눈이 베이고 황홀이야 그게 내가 낫기를 바라지 않는 이유였다 나는 새의..

♧...참한詩 2023.06.24

김욱진 시인, 2023 아르코문학창작기금 발표지원 선정(시 7편)

AI 김욱진 저 아이 요즘 뭐든지 물으면 척척 대답을 다해준다고? 에이, 세상에 그런 아이가 어디 있어 태어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말로만 듣던 AI, 딴 세상 얘기처럼 들리더니만 어느새 그 아이가 이렇게 많이 컸어 챗GPT라고 부른다면서 그래, 맞아 조무래기라고 얕보지 말게 지난 번 이세돌 하고 바둑 둬서 이겼다는 그 아이야 그럼, 돌아이구만 이게 어디 사람 사는 세상인가 야, 이 친구야 지금, 여기 농담할 상황 아닐세 머잖아 자동차 자율주행 운전도 저 아이가 하고 자네가 몇날며칠 끙끙거려 짓는다는 시 한 편 저 아이는 몇 초 만에 후딱 써버린다네 시면 시, 소설이면 소설 심지어 나의 일기까지도 줄줄 다 써준다네 짧다 그러면 금방 늘여주고 좀 길다 그러면 눈치껏 줄여주고 “…해줘”“…알려줘” 하면 ..

정오의 聖所 / 강문숙

정오의 聖所 강문숙 아픔 없는 인생 없다 상처 없는 삶이 없다, 나는 시의 입을 빌려 말했지 병도 나의 스승이었고 꽃은 저 나무의 상처라고 가만히 고개 숙여 나를 위로했지 가시의 나중이 장미였거나 처음부터 가시였던 장미이거나 참을 수 없이 가벼운 혹은, 참을 수 없이 무거운 목숨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고 할 때 그 간절함으로 장미가 핀다는 걸 오래된 저 담장만이 알고 있지 가시를 껴안았더니 장미꽃이 피었구나 울고 있는데 가시관을 쓴 그의 이마에 흐르는 피 나를 들어 올린다 장미를 받아 적는 저 담장에 잠언처럼 가시가 박히는 붉은 정오의 聖所

♧...참한詩 2023.05.26

지금 물의 기분은 최상입니다 / 마경덕

지금 물의 기분은 최상입니다 마경덕 ​ 불꽃이 혀를 날름거리며 냄비 바닥을 핥습니다 자극이 없으면 그저 냄비는 냄비, 물은 물일뿐입니다 예민한 양은 냄비는 한 방울 두 방울 수면으로 기포를 끌어올립니다 물의 껍질이 톡톡 벗겨지고 있습니다 맥박이 뛰고 물은 흥분하기 시작합니다 점점 격렬해집니다 적극적인 자세입니다 물의 탈피는 기화(氣化), 아니 우화입니다 물은 날개를 달고 증기는 천장까지 날아오릅니다 건조하고 까칠한 실내 공기가 촉촉하고 말랑해집니다 한 바가지 물이 반 컵으로 졸았습니다 냄비는 바짝 수위를 낮추고 물의 입자들이 빠르게 창밖으로 증발합니다 이곳을 탈출해 구름이 되려는 물의 체위는 순항입니다 지금 물의 기분은 최상입니다 완벽하게 존재를 지우고 하늘의 품으로 달려가는 중입니다 탈피를 마친 물은 ..

♧...참한詩 2023.05.16

의자 / 이정록

의자 이정록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참한詩 2023.04.17

시월 / 이복규

시월 이복규 네가 떠나고 다시 볼 수 없을 때 나는 함양에 갔다고 할 것이다 함양시장 입구 황태해장국집 지나 가을볕에 꼬들꼬들 잘 마른 할머니들이 내놓은 산약초 좌판을 지나 병곡순대 집에 갔다고 할 것이다 오다가 진주 중앙시장 사거리 리어카에 튀김옷 입고 끓는 기름에 정갈하게 몸을 눕힌 새우와 고추를 한입 물고 골목 안 제일식당을 지나 하동집에서 양은냄비에 졸복 지리 한 그릇 먹고 왔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어디로 갈지 몰라 서성거리다가 해질녘 남강 둔치에서 유등을 한참이나 보았다고, 축제마다 떠돌던 각설이들 다 팔아도 남는 것도 없던 사람들 등 뒤로 해 지는 남강을 바라보며 거제로 돌아와 처음 신혼살림을 차렸던 능포, 새마을식당 지나 어린 딸을 업고 해풍을 잠재웠던 방파제에 앉았다가, 낚시꾼에게 오늘 무..

♧...참한詩 2023.0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