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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딱함에 대하여 / 이정록

삐딱함에 대하여 이정록 지구본을 선물 받았다. 아무리 골라도 삐딱한 것밖에 없더라. 난 아버지의 싱거운 농담이 좋다, 지구가 본래 삐딱해서 네가 삐딱한거야. 삐딱한 데다 균형을 맞추려니 넘어지고 미끄러지고 그러는거야 그래서 아버지는 맨날 술 드시고요? 삐딱하니 짝다리로 피워야 담배 맛도 제대로지 끊어 짜슥아! 아버지랑 나누는 삐딱한 얘기가 좋다. 참외밭 참외도 살구나무 살구도 처음엔 삐딱하게 열매 맺지. 아버지 얘기는 여기서부터 설교다. 소주병이란 술잔도 삐딱하게 만나고 가마솥 누룽지를 긁는 숫가락도 반달처럼 삐딱하게 닳지. 그러니까 말이다. 네가 삐딱한 것도 좋은 열매란 증거야, 설교도 간혹 귀에 쏙쏙 박힐 때가 있다. 이놈의 땅덩어리와 나란히 걸어가려면 삐딱해야지.

♧...참한詩 2023.03.23

거대한 뿌리 / 김수영

거대한 뿌리 김수영 ​ 나는 아직도 앉는 법을 모른다 어쩌다 셋이서 술을 마신다 둘은 한 발을 무릎 위에 얹고 도사리지 않는다 나는 어느새 남쪽식으로 도사리고 앉았다 그럴 때는 이 둘은 반드시 이북친구들이기 때문에 나는 나의 앉음새를 고친다 8. 15 이후 김병욱이란 시인은 두 발을 뒤로 꼬고 언제나 일본여자처럼 앉아서 변론을 일삼았지만 그는 일본 대학에 다니면서 4년 동안을 제철회사에서 노동을 한 강자다 나는 이사벨 버드 비숍 여사와 연애하고 있다 그녀는 1893년에 조선을 처음 방문한 영국왕립지학협회 회원이다 그녀는 인경전의 종소리가 울리면 장안의 남자들이 사라지고 갑자기 부녀자의 세계로 화하는 극적인 서울을 보았다 이 아름다운 시간에는 남자로서 거리를 무단통행할 수 있는 것은 교군꾼, 내시, 외국인..

♧...참한詩 2023.03.17

봄밤 / 김수영

봄밤 김수영 ​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인생이여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절제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영감이여

♧...참한詩 2023.03.17

공자의 생활난

공자의 생활난 김수영 꽃이 열매의 상부에 피었을 때 너는 줄넘기 작난을 한다 나는 발산한 형상을 구하였으나 그것은 작전같은 것이기에 어려웁다 국수 ― 伊太利語(이태리어)로는 마카로니라고 먹기 쉬운 것은 나의 반란성일까 동무여 이제 나는 바로 보마 사물과 사물의 생리와 사물의 수량과 한도와 사물의 우매와 사물의 명석성을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

♧...참한詩 2023.03.17

눈 / 김수영

눈 김수영 눈은 살아 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 놓고 마음 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 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참한詩 2023.03.17

오래된 기도 / 이문재

오래된 기도 이문재 가만히 눈을 감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기만 해도 맞잡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기만 해도 말없이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기만 해도 노을이 질 때 걸음을 멈추기만 해도 꽃 진 자리에서 지난 봄날을 떠올리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음식을 오래 씹기만 해도 촛불 한 자루 밝혀놓기만 해도 솔숲 지나는 바람소리에 귀 기울이기만 해도 갓난아기와 눈을 맞추기만 해도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걷기만 해도 섬과 섬 사이를 두 눈으로 이어주기만 해도 그믐달의 어두운 부분을 바라보기만 해도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바다에 다 와가는 저문 강의 발원지를 상상하기만 해도 별똥별의 앞쪽을 조금 더 주시하기만 해도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해도 나의 죽음은 언제나 나의 삶과..

♧...참한詩 2023.02.21

소리의 전령 / 이진엽

소리의 전령 이진엽- 흐르는 시간 속에서도 보이지 않는 얇은 막(幕)이 있는 것인가 여름, 그것이 끝나가는 길목이 그러하다 무엇인가 작은 드릴로 구멍을 뚫는 듯한 소리 똘똘똘 똘똘똘 그 소리에 투명한 막이 찢어지고 한 계절이 바뀌는 소식이 개울물처럼 밀려든다 조그만 미물 하나가 가녀린 촉수로 시간의 벽을 뚫고 맨 먼저 우주의 섭리를 이끌고 오는 저 소리 천지는 무심한 침묵 중에서도 이렇듯 어김없이 소리의 전령을 보내며 세계의 귀 먹은 밤을 열어 준다 귀뚜라미, 그 소리로

♧...참한詩 2023.02.17

노래의 눈썹 / 장옥관

노래의 눈썹 장옥관 새의 발가락보다 더 가난한 게 어디 있으랴 지푸라기보다 더 가는 발가락 햇살 움켜쥐고 나뭇가지에 얹혀 있다 나무의 눈썹이 되어 나무의 얼굴을 완성하고 있다 노래의 눈썹, 노래로 완성하는 새의 있음 배고픈 오후, 허기 속으로 새는 날아가고 가난하여 맑아지는 하늘 가는 발가락 감추고 날아간 새의 자취 좇으며 내 눈동자는 새의 메아리로 번져나간다

♧...참한詩 2023.0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