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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러스 / 조영심

바이러스 조영심 산 사람만 걸리겠나 숨구멍을 여닫고 살아야 하는 목숨들 네발짐승 날개 달린 것들도 걸려서 소도 돼지도 닭도 오리도 그것도 떼로 걸리면 오고 가는 문을 닫아걸고 산 채로 묻어 버리지 않던가 꼼짝 못 하고 서 있는 나무도 풀도 걸린다 나무가 떼죽음을 당하고 곡식이 부스러지듯 쓰러지고 꽃이 피다가 누렇게 뜬다 신음도 내지 못하고 서서히 쪼그라져 끝내 숨이 밭아 버린다 서로 씨를 말릴 수도 있지 서로 씨가 마를 수도 있지 보이든 보이지 않든 서로의 줄에 매달려 있는 것들 하나를 끌면 모두가 끌려오는 인드라망 이 목숨줄 그 주인은 누구인가

♧...참한詩 2022.10.20

폐사지처럼 산다 /정호승

폐사지처럼 산다 정호승 요즘 어떻게 사느냐고 묻지 마라 폐사지처럼 산다 요즘 뭐 하고 지내느냐고 묻지 마라 폐사지에서 쓰러진 탑을 일으켜세우며 산다 나 아직 진리의 탑 하나 세운 적 없지만 죽은 친구의 마음 사리 하나 넣어둘 부도탑 한번 세운 적 없지만 폐사지에 처박혀 나뒹구는 옥개석 한 조각 부둥켜안고 산다 가끔 웃으면서 라면도 끓여먹고 바람과 풀도 뜯어먹고 부서진 석등에 불이나 켜고 산다 부디 어떻게 사느냐고 다정하게 묻지 마라 너를 용서하지 못하면 내가 죽는다고 거짓말도 자꾸 진지하게 하면 진지한 거짓말이 되는 일이 너무 부끄러워 입도 버리고 혀도 파묻고 폐사지처럼 산다

♧...참한詩 2022.10.14

자전거 탄 쿠쿠 / 장하빈

자전거 탄 쿠쿠 장하빈 홈플러스 들러 쿠쿠 전기밥솥 사서 짐받이의자에 앉히고 자전거 탄 풍경 노래 흥얼거리며 돌아오네 달카당달카당 바퀴가 구를 때마다 밥솥이 굴러 떨어질세라 신주단지 모시듯 부둥켜안고서 어르고 달래며 집으로 오는 길 오고 가는 모든 것도 때가 있다는 시절인연 떠올려 보네 신혼살림 장만으로 집에 처음 들였던 쿠쿠! 우리네 식구에게 이밥 메밥 진밥 된밥 지어 바치느라 끼니때마다 새하얀 탄성 질러대던 쿠쿠! 이따금 탈도 나고 고비고비 잘도 넘겼다만, 십 년이면 입맛도 변하는가 나에게 넌 해질녘 노을처럼, 한 편의 아름다운 추억이 되네* 나 이제 너를 동네 고물상으로 보내고, 엉덩이 탐실한 새색시 맞아 꽃가마 대신 자전거 태우고 덩실덩실 어깨춤 추며 돌아오네, 내 사랑 쿠쿠! *자전거 탄 풍경의..

♧...참한詩 2022.09.30

폭우 /사윤수

폭우 사윤수 비가 이 세상에 올 때 얼마나 무작정 오는지 비에게 물어볼 수 없고 모르긴 해도 빈 몸으로 오는 건 분명하다 그런데 오면서 생각하니 급했던지 다 와서는 냅다 세상의 가슴팍을 때리고 걷어차고 다그친다 무엇을 내놓으라고 저렇게 퍼붓나 내가 비의 애인을 숨긴 것도 아닌데 쏟아붓는다 들이친다 하다가 안 되니까 제 몸을 마구 패대기친다 어쨌든 들어오시라 나는 수문을 열고 비의 울음을 모신다 비의 물고기들이 물밀 듯 밀려들어온다 방 안 가득히 차오르는 빗소리 인사불성 표류하는 비의 구절들 비는 이미 만취가 되었으므로 비가 들려주는 시, 비가 부르는 노래를 나는 알아들을 수 없다 다만, 그래 그래 알았어, 그래 괜찮아 하면서 달랜다, 비의 등을 다독인다 그새 얼마나 울었는지 비의 눈이 퉁퉁 부었다 밤낮을..

♧...참한詩 2022.09.25

그런데, 누가 약장수야? /사윤수

그런데, 누가 약장수야? 사윤수 입에 거품을 물고 목에 핏대를 세우고 사자후로 밀어붙이는데 저렇게 열정적으로 약을 파는데 내가 어떻게 약을 사지 않고 베기겠어 약장수의 열변을 들으면 아프지 않은 데가 없고 오만 병에 걸린 거 같고 저 약을 먹지 않으면 머지않아 내가 시들어버릴 거 같은데, 만병통치 불로장생이 이토록 감동을 주니 약을 향해 지금 손들지 않으면 북적이는 틈에서 소외될 거 같고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 안 올 거 같으니까 거금이라도 지를 만하잖아? 아직 카드 한도가 남았고 36개월 무이자 할부도 된다니 괜찮은 흥정이잖아? 약장수를 심으면 약 나무가 자라고 약이 주렁주렁 열리는 상상도 해봤지만 어쨌든 저 잘 생긴 약장수를 남겨놓고 나만 혼자 블랙홀에서 빠져나올 수도 없었어 그러니까 나는 부지런히 ..

♧...참한詩 2022.09.25

제6회 시산맥작품상-초당(草堂)두부가 오는 밤 /문성해

초당(草堂)두부가 오는 밤 문성해 옛날에는 생각도 못한 초당을 알아 서늘한 초당두부를 알아 동짓날 밤 선연한 선지를 썰 듯 썩둑썩둑 그것을 썰면 어느새 등 뒤로는 그 옛날 초당(草堂) 선생이 난을 칠 때면 뒷목을 서늘케 하며 일어서던 대숲이 서고 대숲을 흉흉히 돌아나가던 된바람이 서고 그럴 때면 나는 초당 선생이 밀지(密旨)를 들려 보낸 이제 갓 생리 시작한 삼베속곳 일자무식의 여복(女卜)이 된다 때마침 개기월식하는 하늘 분위기로 가슴에 꼬깃꼬깃 품은 종잇장과 비린 열여섯 해를 바꿀 수도 있을 것 같고 저잣거리의 육두문자도 오늘 밤만큼은 들리지 않는다 하고 밤 종일 붙어 다니는 개새끼들에게도 한눈팔지 않고 다만 초당 선생 정지 간에서 저고리 가슴께가 노랗게 번진 유모가 밤마다 쑹덩쑹덩 썰어 먹던 그것 한..

김욱진 시인, 제 5회 김명배문학상 작품상 수상(매일신문 2022.8.26)

김욱진 시인, 제5회 김명배문학상 작품상 수상 석민 디지털논설실장 sukmin@imaeil.com 매일신문 입력 2022-08-25 14:05:35 수정 2022-08-25 14:05:22 https://news.imaeil.com/page/view/2022082413363989100 김욱진 시인(전 한국문인협회 달성지부 회장) 김욱진 시인(사진·한국문인협회 달성지부 회장 역임)의 네 번째 시집 '수상한 시국(2020)'이 제5회 김명배문학상 작품상을 수상했다. 시상식은 오는 10월 10일 충남 천안에서 열린다. 의제헌 김명배문학상은 박목월 시인의 제자인 김명배 시인의 문학적 업적을 재조명하고 후학들의 시 창작 의욕을 북돋워주기 위해 제정됐다. 지난해 수상자는 사윤수 시인(대구)이다. 김욱진 시인은 경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