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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둘레에 둥근 원이 있다 / 나나오 사카키

내 둘레에 둥근 원이 있다 나나오 사카키 일 미터 크기의 원 안에서는 자리에 앉아 기도를 하고 명상을 할 수 있다. 십 미터 크기의 집 안에서는 편히 잠들 수 있고, 빗소리 또한 자장가처럼 들린다. 백 미터 크기의 밭에서는 농사를 짓고 염소를 키울 수 있다. 천 미터 크기의 골짜기에서는 땔감과 물과 약초와 버섯을 구할 수 있다. 십 킬로미터 크기의 삼림에서는 너구리, 찌르레기, 나비들과 뛰어놀 수 있고 백 킬로미터 크기의 원 안에서는 여름엔 남쪽의 산호초를 구경할 수 있고 겨울엔 북해에 떠다니는 얼음산을 보러 갈 수 있다. 하지만 일만 킬로미터 크기의 원 안에서는 지구의 어디로든 걸어갈 수 있으리라. 십만 킬로미터 크기의 원 안에서는 반짝이는 별들의 바다를 항해할 수 있고 백만 킬로미터 크기의 원 안에서..

♧...참한詩 2022.08.01

줍다 / 나희덕

줍다 나희덕 ​ 조개를 주우러 해변에 갔었어요 검은 갯벌 속의 조개들 그러나 손에 잡히는 건 빈 껍데기뿐이었지요 ​조개를 줍든 이삭을 줍든 감자를 줍든 상자를 줍든 ​몸을 최대한 낮추고 굽혀야 한다는 것 무엇을 만들거나 사지 않아도 돼요 줍고 또 줍는 것 이것이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죠 ​쓰레기, 라는 말을 너무 함부로 쓰지 않나요? 누군가 남긴 음식이나 물건이 그렇게 표현되는 건 슬픈 일이지요 그들은 버림으로써 남긴 거예요 나의 나날은 그 잉여만으로도 충분해요 ​어떤 날은 운이 아주 좋아요 누군가 먹다 남긴 피자가 상자째 놓여 있기도 하지요 ​유통기한이 지났지만 신선한 통조림 기분좋은 말 몇 마디나 표정을 주워오기도 해요 이따금 인상적인 뒷모습이나 그림자를 줍기도 하지요 ​자아, 둘러보세요 주울 것들은 ..

♧...참한詩 2022.07.20

옻골마을

옻골마을 김욱진 물빛 시회 연다는 소문만 듣고 꼭꼭 숨겨진 옻골 어렵사리 찾아갔다 북에는 팔공산 동에는 검덕봉 서로는 긴 등이 못 안골까지 이어져 병풍처럼 펼쳐지고 남으로는 느티나무 고목들이 숲을 이룬 옻골 사방을 둘러봐도 옻나무 한 그루 눈에 띄지 않는데 옻골이라고 마을 들머리 옷걸이처럼 걸렸다 금세 나는 옻에 닿았다 '칠하다' '칠흑 같다' 라는 말, 문득 시절 인연처럼 왔다 간다 그래, 오늘의 시제는 '칠하다'가 좋겠어 양지는 음지를 칠하고 음지는 양지를 칠하며 사백 성상 뿌리내린 경주최씨 세거지 옻나무 골까지 왔으니 이참에, 옻닭이라도 한 마리 푹 꽈먹고 여태 썩고 썩은 속 옻칠이나 해둬야겠다 대암산 꼭대기 우뚝 솟은 거북바위 등처럼 거무죽죽하게

♧...발표작 2022.06.30

하늘나라의 옷감 / 예이츠

하늘나라의 옷감 예이츠 내게 금빛 은빛으로 수놓아진 하늘의 옷감이 있다면 밤의 어두움과 낮의 밝음과 어스름한 빛으로 된 푸르고 희미하고 어두운 색의 옷감이 있다면 그 옷감을 그대 발밑에 깔아드리련만, 나는 가난하여 가진 것은 꿈밖에 없으니 그대 발밑에 내 꿈을 깔아드리오니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그대가 밟는 것은 내 꿈이기에.

♧...참한詩 2022.06.13

숲에 살롱 / 최은우

숲에 살롱 최은우 자꾸 이야기하다 보니 말이 생깁니다 기분이 달라지고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요 기분 탓인가요? 그러자고 한 건 아닌데 수다장이가 돼서 오물조물 오래 씹어 쉴 새 없이 꺼냈어요 이야기라면 해도 해도 할 게 많아요 귀를 여는 자가 없다면 저 무성한 나뭇잎들이 있잖아요 이리 와서 들어봐요 늘 같은 이야기지만 오늘은 하나 더 추가시킬 예정이에요 극적인 요소는 늘 있어요 마녀들이 밤에 모여 항아리에 대고 떠들던 주문 같은 것도 있다니까요 인생은 재미 아니겠어요? 문밖 무성한 화분들은 신경 쓰지 마세요 이야길 엿듣고 흉내 내느라 줄거리가 아니 줄기가 생겨서 풍성해졌어요 염치도 없이 나무 옆에 나무를 낳네요 자꾸만 나무들이 생기는 오후에 하나 더 있다고 하나 더 없다고 나무가 나무 아닌 것은 아니겠..

♧...참한詩 2022.06.01

홍길동이 성춘향에게 / 이종근

홍길동이 성춘향에게 이종근 내게도 봄내 그윽한 매화인 듯 나눠 주겠소 연거푸 몇 번 속내 드러내듯 프러포즈하는 서찰 꼬깃꼬깃해서 보냈건만 따뜻한 공깃밥 구경은커녕 편히 잠 이룰 수 없는 밤이 길었소 나 역시도 아버지 정이 진정 그리워 어린 나이 내내 회앓이로 아팠고 한동안 피 토하듯 소낙비로 울었소 광한루원(廣寒樓園) 곳곳이 풋바람 나고 요천(蓼川)의 흐르는 물 건너는 각기 다리마다 후들후들하오 그 변치 않을 절개 때문에 남원골 찾아왔소 본디 내 족보는 열에 아홉 중 탐탁지 않고 가슴팍에 숨긴 마패의 힘이 없어도 애끓는 순정은 과히 그넷줄의 품 넘친다오 어서 강 따라 바다 건너 평등 이룬 섬 저어기 율도국(栗島國)으로 함께 가오 서자(庶子)의 격한 울분이고 차분한 반란이오

♧...참한詩 2022.05.26

오월 / 유홍준

오월 유홍준 벙어리가 어린 딸에게 종달새를 먹인다 어린 딸이 마루 끝에 앉아 종달새를 먹는다 조잘조잘 먹는다 까딱까딱 먹는다 벙어리의 어린 딸이 살구나무 위에 올라앉아 지저귀고 있다 조잘거리고 있다 벙어리가 다시 어린 딸에게 종달새를 먹인다 어린 딸이 마루 끝에 걸터앉아 다시 종달새를 먹는다 보리밭 위로 날아가는 어린 딸을 밀짚모자 쓴 벙어리가 고개 한껏 쳐들어 바라보고 있다

♧...참한詩 2022.05.25

덤 / 길상호

덤 길상호 감자 한 바구니를 사는데 몇 알 더 얹어주며 덤이라 했다 모두 멍들고 긁힌 것들이었다 허기와 친해진지 오래인 혼자만의 집, 이 중 몇 개는 냉장고 안에서 오래 썩어가겠구나 생각하는 조금은 비관적인 저녁이었다 덤은 무덤의 줄임말일지도 모른다고 썩어가기 위해 태어난 감자처럼 웅크리며 걸었다 하긴 평균연령 40세를 넘지 못하던 시대가 바로 얼마 전이었는데 나는 지금 덤으로 살고 있는 것 아니지 덤으로 썩고 있는 것 상처를 모르는 철없는 싹처럼 노을 뒤에서 별 하나가 겨우 돋았다 덤으로 받아든 감자 몇 알이 추가된 삶의 과제처럼 무거운 길, 한 번도 불을 켜고 기다린 적 없는 집은 오늘도 무덤처럼 조용하기만 했다

♧...참한詩 2022.05.15

까치 설날

까치 설날 설이, 설익은 설이 감나무골 둥지 틀고 사는 까치네 동네까지 설설 왔네요 까치발 들고 이 집 저 집 묵은 세배하며 돌아다니던 섣달그믐날 까치는 장돌뱅이 김 영감네 처마 밑 서리서리 엮어둔 과메기 한 동가리 쪼아 먹고, 꾸벅 옆집 꼬부랑 할머니 장독대 위 정안수처럼 떠놓은 감주 한 모금 고수레하듯 던져준 콩강정 한 조각 받아먹고, 꾸벅꾸벅 봉당에 벗어둔 꼬마아이 코고무신 한번 신어보고도, 꾸벅 오늘은 우리우리 설날이라며 마냥 설레던 밤 잠자면 눈썹 센다고 온 동네 소꿉친구 다 모여 이거리 저거리 각거리 천두만두 두만두… 각설이 타령하듯 흥얼거리며 밤새 잠 설쳐댄 까치 설날 이 설도 머잖아 눈 녹듯 사라져버리겠지요 (2022대구문학 4월호)

♧...발표작 2022.05.12

손님 / 오탁번

손님 오탁번 엄마가 어린 딸을 데리고 시장 가는 길 감나무에 조랑조랑 열린 풋감을 보고 '푸른 감이 가을이 되면 빨갛게 익는단다' 엄마 말에 고개를 갸옷갸옷 하던 딸은 감나무가지가 휘어지도록 우는 매미울음 따라 엄마 손 잡고 까불까불 걸어갔네 ​ 가을 어느 날 해거름에 시장 가는 길 빨갛게 익은 감이 탐스러운 감나무가지에 하얀 낮달이 꼬빡연처럼 걸려 있었네 다 저녁에 되어 엄마 손잡고 돌아올 때 밤하늘에 떠 있는 달을 보고 딸이 말했네 '엄마, 달님이 그새 빨갛게 익었어' ​ 개미가 기어다니는 보도블록을 걸어오는 길 엄마가 까치걸음 하는 딸을 보고 눈을 흘기자 '아기 개미를 밟으면 엄마 개미를 못 만나잖아?' 앙증스러운 어린 딸의 말을 듣고 엄마는 처녀적 시인의 꿈이 다시 생각나 미소지었네 시인은 못 됐..

♧...참한詩 2022.0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