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누가 약장수야?
사윤수
입에 거품을 물고 목에 핏대를 세우고
사자후로 밀어붙이는데
저렇게 열정적으로 약을 파는데
내가 어떻게 약을 사지 않고 베기겠어
약장수의 열변을 들으면
아프지 않은 데가 없고 오만 병에 걸린 거 같고
저 약을 먹지 않으면
머지않아 내가 시들어버릴 거 같은데,
만병통치 불로장생이 이토록 감동을 주니
약을 향해 지금 손들지 않으면
북적이는 틈에서 소외될 거 같고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 안 올 거 같으니까
거금이라도 지를 만하잖아?
아직 카드 한도가 남았고
36개월 무이자 할부도 된다니 괜찮은 흥정이잖아?
약장수를 심으면 약 나무가 자라고
약이 주렁주렁 열리는 상상도 해봤지만
어쨌든 저 잘 생긴 약장수를 남겨놓고
나만 혼자 블랙홀에서 빠져나올 수도 없었어
그러니까 나는 부지런히 속으며 충분히
어리석으며 썩으며 최선을 다해 약을 샀어
카드를 긁을 때 잠시 고뇌가 일었지만
모래알처럼 빽빽하고 고소하게 적힌 약효가
더 강렬하게 나를 사로잡았지
나는 나의 판단과 신념을 존중하기로 했어
내가 지금까지도 그렇듯 살아왔는데,
남은 한 팔로 영혼의 단칸방에서 죽을 쑤며
봐, 어쨌든 아직 나는 살아 있잖아
약발이 좋은지 운이 좋은 건지 말이야
약장수는 가고 약만 남아, 내가
종합병원의 계절이지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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