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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반란

이들의 반란 김욱진 이 없으면 잇몸으로 살지, 뭐 이 말 엿들은 어떤 이는 몽니를 부렸고 또 어떤 이는 치를 떨었다 치심이 곧 민심인 이 세상 이간질하는 이들 다독이며 이 수리 센터 갔다 언제 뽑혀나갈지도 모르는 이들 위아래 닥지닥지 붙어 서서 난생처음 사진을 찍었다 저마다 표정이 사뭇 달랐다 나는 웃는다고 웃었는데, 이들은 비웃었다 개중엔 억지로 웃다 찡그린 이도 있었고 웃자, 웃자 그러는 이도 있었다 웃는 게 웃는 게 아닌 이들, 속으로는 다 이 악물고 있었다 한 곳에 뿌리 내리고 살아온 이들 환갑 진갑 다 지나고 보니, 그 이가 그 이 온데 물어뜯고 할퀴며 땟거리 장만해주던 송곳니도 언제 어디서나 잘도 씹어재끼던 어금니도 사시사철 수문장 노릇하며 대문 든든히 지켜주던 대문니도 이 평생 더부살이해온 ..

♧...발표작 2021.11.27

비참거사우참오기소참하고

비참거사우참오기소참하고 김욱진 비 비슬산 참꽃 시화전 참 참꽃 따먹어 본 사람들은 다 왔더라 거 거시기, 시 시하고 그 그림하고 사 사바사바했다는 얘기 아이가 우 우리 나엔 다 그림의 떡이구먼 참 참꽃 그 그림 기막히게 잘 그렸더라 오 오가는 길을 막고, 기를 막고 기 기막히게 몸부림치더라 소 소쩍이는 소쩍소쩍 참 참새는 짹짹 하 하늘다람쥐는 입맛만 쪽쪽 다시더라 고 고게 다 시더라, 그림이더라 (2021 대구알리기 문학 페스티벌)

♧...발표작 2021.11.26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자년 말 고삐 잡고 말 엉덩이 툭, 쳐 봅니다 다급히, 지나가는 말처럼…… 우리 속엔 말이 말을 물고 돌아다니는 코로나라는 말만 우글거렸어요 일 년 내내 우리는 그 말을 길들였지요 말 많은 나는 된서리를 맞았어요 우리 속에 갇힌 수많은 말들이 말문을 잃어버렸거든요 참다, 참다 못해 말꼬리라도 한번 슬몃 잡으면 그 말은, 말인즉슨 말이 아닌 비말 취급을 받고 말았으니 말이지요 말들은 다 숨죽이고 살 수밖에요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 했던가요 말과 말 사이 오간 비말은 거짓말처럼 번졌어요 말이란 말에는 다 끼어들고 소문이란 소문은 다 퍼뜨렸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들은 말머리 돌리지 않고 말꼬리만 잘랐지요 아무도 그 말을 하지 않았어요 아니, 할 수가 없었지요 저기, 끄레기 벗고 뚜벅뚜..

♧...발표작 2021.11.26

바이킹 / 고명재(2020조선일보 신춘문예)

바이킹 고명재 ​ 선장은 낡은 군복을 입고 담배를 문 채로 그냥 대충 타면 된다고 했다 두려운 게 없으면 함부로 대한다 망해가는 유원지는 이제 될 대로 되라고 배를 하늘 끝까지 밀어 올렸다 모터 소리와 함께 턱이 산에 걸렸다 쏠린 피가 뒤통수로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원래는 저기 저쪽 해 좀 보라고 여유 있는 척 좋아한다고 외치려 했는데 으어어억 하는 사이 귀가 펄럭거리고 너는 미역 같은 머리칼을 얼굴에 감은 채 하늘 위에 뻣뻣하게 걸려있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공포가 되었다 나는 침을 흘리며 쇠 봉을 잡고 울부짖었고 너는 초점 없는 눈으로 하늘을 보면서 무슨 대다라니경 같은 걸 외고 있었다 삐걱대는 뱃머리 양쪽에서 우리는 한 번도 서로를 부르지 않았다 내가 다가갈 때 너는 민들레처럼 머리칼을 펼치며 날아가 ..

나의 하나님 / 김춘수

나의 하나님 김춘수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늙은 비애다.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시인 릴케가 만난 슬라브 여자의 마음 속에 갈앉은 놋쇠 항아리다. 손바닥에 못을 박아 죽일 수도 없고 죽지도 않는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또 대낮에도 옷을 벗는 여리디 여린 순결이다. 삼월에 젊은 느릅나무 잎새에서 이는 연두빛 바람이다.

♧...참한詩 2021.10.24

오후의 언덕 / 성향숙

오후의 언덕 성향숙 오늘의 종착지는 언덕입니다 애프터눈 티 카페, 오후만 존재하는 계절 삼단 접시의 휴식이 나오고 나는 차근차근 올라가 언덕의 체위를 호흡합니다 하이힐처럼 우뚝 흥겨운 바람입니다 수다 떨기 좋은 이파리와 노랑국화가 흘러가는 언덕, 멈추면 눈 감기 좋은 햇살이 스며듭니다 서두를 것 없이 느긋하게 24층에서 뛰어내린 영화배우가 여기 있다는데 죄책감 없이 호흡합니다 오랜 발목이 저릿합니다 오후만큼 달콤한 죽음을 수혈하기 좋은 언덕 굳은 발바닥은 부드럽게 풀어집니다 응답 없는 해피투게더의 비상구는 나른한 햇살이고 오늘의 내가 어제의 미남 배우를 만납니다 마지막 접시가 추가되고 근근 이어지는 오후지만 배우와 나의 간격은 한없이 평화롭습니다 고용와 그늘을 구분 짓는 언덕을 넘어 관념들, 침묵들, 안..

♧...참한詩 2021.10.23

소가죽 소파 / 정익진

소가죽 소파 정익진 우시장에서 소 한 마리 사들였다. 거실에 가둬 놓고 우리는 소를 길들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뻣뻣했던 소가 조금씩 부드러워졌다. 소와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소의 등 뒤에 누워 잠들기도 하고 소의 배 위에 올라타 오랜 시간 TV도 보고 책도 읽고 간식도 먹었다. 특히 우리 집은 소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각자의 몸무게를 던진다거나 옷을 있는 대로 걸쳐 놓기도 하고 과도를 잘못 던져 목 부위가 찔리기도 했다. 등뼈가 휘어질 정도로 심한 장난을 친 때문인지 소의 발목이 부러졌다. 임시로 부목을 대어 주고 붕대만 감아주었지 제대로 된 치료는 해주지 않았다. 소는 소였다. 한마디 아프다는 소리 하지 않았다. 소가 우리 집에 온 지 십 년이 넘어간다. 소의 껍질이 완전히..

♧...참한詩 2021.1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