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비꽃 머리핀 / 공광규 제비꽃 머리핀 공광규 띠풀이 단정한 묏등에 제비꽃 한 송이 누군가 꽂아준 머리꽃핀이어요 죽어서도 머리에 꽃핀을 꽂고 있다니 살았을 때 어지간히나 머리핀을 좋아했나 봐요 제비꽃 머리핀이 어울릴만한 이생의 사람 하나 생각하며 돌아오는데 신갈나무 연두 잎 사이로 얼굴을 내민 진달래꽃이 이생의 그분처럼 시들고 있어요 ♧...참한詩 2022.05.05
시인의 재산 / 최서림 시인의 재산 최서림 누구도 차지할 수 없는 빈 하늘은 내 것이다. 아무도 탐내지 않는 새털구름도 내 것이다. 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도 내 것이다. 너무 높아서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것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은 다 내 것이다. ♧...참한詩 2022.05.02
초록의 폭력 / 이소연 초록의 폭력 이소연 아무 데서나 펼쳐지는 초록을 지날 때 머리에서 발끝까지 어떤 감정이 치밀어 오르는지 초록은 왜 허락 없이 돋아나는가 귀가 없으므로 초록은 명령한다 초록은 힘이 세다 초록에 동의한 적 없습니다 초록을 거절합니다 초록이 싫습니다 합의하의 초록이 아닙니다 "문란하구나" 누구에게 하는 말입니까? "초록을 싫어하는 인간은 없다" 나를 떠메고 가는 바람이 없다는 것을 알아챈 오후 웃음을 열었다가 닫는다 툭, 불거지는 질문처럼 아, 내가 지나치게 피를 많이 가지고 있었구나 시집 '나는 천천히 죽어갈 소녀가 필요하다' (2020 걷는사람) ♧...참한詩 2022.04.30
도반道伴 도반道伴 저녁 공양 마친 개 한 마리가 방선放禪하듯 절집 마당을 빙빙 돌고 있다 너덕너덕 기운 옷 걸친 노스님이 혓바닥 길게 내민 견공의 목줄을 잡고 묵정밭 매듯 무심히 따라 돌고 있다 연못 속에 우두커니 물구나무선 내 가랑이 새로 길을 낸 물고기들이 바깥세상 환히 들여다보고 있다 법당 앞 반석 위에 쪼그리고 앉은 밤 고양이의 눈빛 휘돌아나가는 보름달처럼 짧은시 2022.04.28
아카시2 아카시2 가슴 한복판으로 물길 지나가는 오월이면 무뎌진 나의 혓바닥에도 너의 향기 가득 스며온다 겨우내 군침 흘린 꿀벌처럼 올 봄엔 훨훨 네게로 날아가 누구도 지울 수 없는 입술자국 하나 숨겨두고 싶다 짧은시 2022.04.28
우포늪 우포늪 철없이 날아드는 새들의 공항이다 온종일 비행하고 돌아온 흰두루미 떼 활주로 한복판 둘러앉아 아직 회항하지 못한 피붙이들에게 연착륙 신호를 보내며 고요히 저녁기도를 한다 또 어디론가 비상하려는 영혼들을 위해 빈 둥지 트는데 어둠을 밀어내며 불시착하는 재두루미 한 마리 짧은시 2022.04.28
지게 지게 가랑이 쩍 벌리고 가파른 언덕배기 홀로서는 법 네게 배웠지 저보다 무거운 짐 걸머지고 가볍게 버티는 법 네게 배웠지 바람 불어 휘청거리는 날 지겟작대기 곧추세우고 세 발로 걸어가는 법 무심코 알게 되었지 짧은시 2022.04.28
전철 안에서 전철 안에서 여든 살은 족히 된 할머니 한 분 꼬부랑 허리 지팡이 삼아 긴 동굴 속 걸어 들어와 무덤자리 찾은 듯 노약석에 기대서서 눈 감으신다 영정 사진 한 장 맞은 편 유리창에 걸렸다 한 송이 저승꽃 앞에서 일제히 고개 숙인 문상객들 떼무덤을 판다 짧은시 2022.04.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