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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 잡기 / 조온윤

중심잡기 조온윤 천사는 언제나 맨발이라서 젖은 땅에는 함부로 발을 딛지 않는다 추운 겨울에는 특히 더 그렇게 믿었던 나는 찬 돌계단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언 땅 위를 혼자 힘으로 살아가는 방법에 골몰했다 매일 빠짐없이 햇볕 쬐기 근면하고 성실하기 버스에 승차할 땐 기사님께 인사를 하고 걸을 땐 벨을 누르지 않아도 열리는 마음이 되며 도무지 인간적이지 않은 감정으로 인간을 위할 줄도 아는 것 혹은 자기희생 거기까지 가닿을 순 없더라도 내가 믿는 신이 넘어지는 나를 붙잡아줄 것처럼 눈 감고 길 걸어보기 헛디디게 되더라도 누구의 탓이라고도 생각 않기…… 그런데 새벽에 비가 왔었나요? 눈을 떠보니 곁에는 낯선 사람들이 있고 겨드랑이가 따뜻했던 이유는 그들의 손이 거기 있었기 때문 나는 그들의 부축을..

♧...참한詩 2022.04.21

묵시 / 조온윤

묵시 조온윤 내가 창가에 앉아있는 날씨의 하얀 털을 한 손으로만 쓰다듬는 사람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다섯 개의 손톱을 똑같은 모양으로 자르고 다시 다섯 개의 손톱을 똑같은 모양으로 자르고 왼손과 오른손을 똑같이 사랑합니다 밥 먹는 법을 배운 건 오른쪽이 전부였으나 밥을 먹는 동안 조용히 무릎을 감싸고 있는 왼손에게도 식전의 기도는 중요합니다 사교적인 사람들의 점심식사에 둘러앉아 뙤약볕 같은 외로움을 견디는 것도 침묵의 몫입니다 혼자가 되어야 외롭지 않은 혼자가 있습니다 밥을 먹다가 왜 그렇게 말이 없냐는 말로 말을 걸어오면 말이 없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다 말이 없어집니다 다섯 개의 손톱이 웃는 모양이라서 다섯 개의 손톱도 웃는 모양이라서 나는 그저 가지런히 열을 세며 있고 싶습니다 말을 아끼기에는 나..

♧...참한詩 2022.04.21

어느 봄날

어느 봄날 김욱진 개와 개나리 사이 무슨 연분이 있을 리도 만무하고 아파트 담벼락 활짝 핀 개나리 앞에서 산책 나온 개 두 마리 난리를 치네요 멀건 대낮 입마개한 사람들은 벚꽃 벗고-옷 그러며 지나가는데 누런 수캐는 혀를 빼물고 꽁무니 빼는 암캐 등에 확 올라탑니다 개 나리, 난 나리 쏙 빼닮은 개를 낳고 싶어요 코로나로 들끓는 이 난리 통에도, 참 사랑은 싹이 트네요 개 난리 통에 개나리는 참 난감했겠습니다 이 화창한 봄날 성이 차지 않은 게 어디 걔들뿐이었겠습니까 마는 사정없이 떠나는 봄도 어지간히 다급했나 봅니다 (2022 시인부락 봄호)

♧...발표작 2022.04.03

천리 불꽃 / 장석주

천리 불꽃 장석주 비 오시는데 종일 헤어진 여자 허리 생각에 몸 뒤척인다 저기 타는 천리 불꽃 빗발로는 끝내 진화할 수 없는 것인가! 온몸 달아 간절했으니 신체의 한 末端이 타버리는 모양이다 오매 사람 잡네, 이 灼熱感! 점점 골똘해지는 씹 생각에 몸이 다 탄다 날 저물고 비 그쳐 淨口業眞言* 합장하고 千手經 일절 뒤 나무관세음보살…… 천 번 입 속으로 읊조렸더니 시끄러운 몸이 겨우 잠든다 *입으로 지은 업을 맑게 하는 진언

♧...참한詩 2022.01.20

엄마의 런닝구 / 배한권

엄마의 런닝구 배한권 작은누나가 엄마보고 엄마 런닝구 다 떨어졌다. 한 개 사라 한다. 엄마는 옷 입으마 안 보인다고 떨어졌는 걸 그대로 입는다. 런닝구 구멍이 콩만하게 뚫어져 있는 줄 알았는데 대지비만하게 뚫어져 있다. 아버지는 그걸 보고 런닝구를 쭉 쭉 쨌다. 엄마는 와 이카노. 너무 째마 걸레도 못한다 한다. 엄마는 새걸로 갈아입고 째진 런닝구를 보시더니 두 번 더 입을 수 있을 낀데 한다.

♧...참한詩 2022.01.14

이들의 반란

이들의 반란 김욱진 이 없으면 잇몸으로 살지, 뭐 이 말 엿들은 어떤 이는 몽니를 부렸고 또 어떤 이는 치를 떨었다 치심이 곧 민심인 이 세상 이간질하는 이들 다독이며 이 수리 센터 갔다 언제 뽑혀나갈지도 모르는 이들 위아래 닥지닥지 붙어 서서 난생처음 사진을 찍었다 저마다 표정이 사뭇 달랐다 나는 웃는다고 웃었는데, 이들은 비웃었다 개중엔 억지로 웃다 찡그린 이도 있었고 웃자, 웃자 그러는 이도 있었다 웃는 게 웃는 게 아닌 이들, 속으로는 다 이 악물고 있었다 한 곳에 뿌리 내리고 살아온 이들 환갑 진갑 다 지나고 보니, 그 이가 그 이 온데 물어뜯고 할퀴며 땟거리 장만해주던 송곳니도 언제 어디서나 잘도 씹어재끼던 어금니도 사시사철 수문장 노릇하며 대문 든든히 지켜주던 대문니도 이 평생 더부살이해온 ..

♧...발표작 2021.11.27

비참거사우참오기소참하고

비참거사우참오기소참하고 김욱진 비 비슬산 참꽃 시화전 참 참꽃 따먹어 본 사람들은 다 왔더라 거 거시기, 시 시하고 그 그림하고 사 사바사바했다는 얘기 아이가 우 우리 나엔 다 그림의 떡이구먼 참 참꽃 그 그림 기막히게 잘 그렸더라 오 오가는 길을 막고, 기를 막고 기 기막히게 몸부림치더라 소 소쩍이는 소쩍소쩍 참 참새는 짹짹 하 하늘다람쥐는 입맛만 쪽쪽 다시더라 고 고게 다 시더라, 그림이더라 (2021 대구알리기 문학 페스티벌)

♧...발표작 2021.11.26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자년 말 고삐 잡고 말 엉덩이 툭, 쳐 봅니다 다급히, 지나가는 말처럼…… 우리 속엔 말이 말을 물고 돌아다니는 코로나라는 말만 우글거렸어요 일 년 내내 우리는 그 말을 길들였지요 말 많은 나는 된서리를 맞았어요 우리 속에 갇힌 수많은 말들이 말문을 잃어버렸거든요 참다, 참다 못해 말꼬리라도 한번 슬몃 잡으면 그 말은, 말인즉슨 말이 아닌 비말 취급을 받고 말았으니 말이지요 말들은 다 숨죽이고 살 수밖에요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 했던가요 말과 말 사이 오간 비말은 거짓말처럼 번졌어요 말이란 말에는 다 끼어들고 소문이란 소문은 다 퍼뜨렸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들은 말머리 돌리지 않고 말꼬리만 잘랐지요 아무도 그 말을 하지 않았어요 아니, 할 수가 없었지요 저기, 끄레기 벗고 뚜벅뚜..

♧...발표작 2021.11.26

바이킹 / 고명재(2020조선일보 신춘문예)

바이킹 고명재 ​ 선장은 낡은 군복을 입고 담배를 문 채로 그냥 대충 타면 된다고 했다 두려운 게 없으면 함부로 대한다 망해가는 유원지는 이제 될 대로 되라고 배를 하늘 끝까지 밀어 올렸다 모터 소리와 함께 턱이 산에 걸렸다 쏠린 피가 뒤통수로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원래는 저기 저쪽 해 좀 보라고 여유 있는 척 좋아한다고 외치려 했는데 으어어억 하는 사이 귀가 펄럭거리고 너는 미역 같은 머리칼을 얼굴에 감은 채 하늘 위에 뻣뻣하게 걸려있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공포가 되었다 나는 침을 흘리며 쇠 봉을 잡고 울부짖었고 너는 초점 없는 눈으로 하늘을 보면서 무슨 대다라니경 같은 걸 외고 있었다 삐걱대는 뱃머리 양쪽에서 우리는 한 번도 서로를 부르지 않았다 내가 다가갈 때 너는 민들레처럼 머리칼을 펼치며 날아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