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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야 우리는 / 정끝별

언니야 우리는 정끝별 우리는 같은 몸에서 나고 같은 무릎에 앉아 같은 젖을 빨았는데 엄마 다리는 길고 언니 다리 짧고 내 다리는 더 짧아 긴 다리에 짧은 다리를 엇갈려 묻고 이거리 저거리 각거리, 천사만사 다만사, 조리김치 장독간, 총채 빗자루 딱, 한 다리씩을 빼주고 남는 한 다리는 술래 다리 언니야 우리는 같은 집에서 자라 같은 밥을 먹고 같은 남자들과 살았는데 너는 언니라서 머리가 길고 나는 막내라서 머리가 덜 길고 남자들을 위해서 씻고 닦고 삶고 빨고 낳고 먹이느라 죽을 듯이 엄마처럼 하얘지도록 너는 언니라서 더 꿇고 나는 동생이라서 조금 덜 꿇고 우리는 같은 사람으로 태어나 같은 학교에 다니고 같은 시대를 살았는데 아버지 오빠들이 우리에게 어떤 손자국을 남기고 어떤 무릎을 요구했는지 그들에게 사..

♧...참한詩 2021.08.26

거울 / 이상

거울 이상 거울속에는 소리가 없소 저렇게까지 조용한 세상은 참 없을 것이오 거울속에도 내게 귀가 있소 내 말을 못 알아 듣는 딱한 귀가 두 개나 있소 거울속의 나는 왼손잡이오 내 악수를 받을 줄 모르는 악수를 모르는 왼손잡이오 거울 때문에 나는 거울속의 나를 만져보지를 못하는구료마는 거울 아니었던들 내가 어찌 거울속의 나를 만나보기만이라도 했겠소 나는 지금 거울을 안가졌소마는 거울속에는 늘 거울속의 내가 있소 잘은 모르지만 외로된 사업에 골몰할게요 거울속의 나는 참나와는 반대요마는 또 꽤 닮았소 나는 거울속의 나를 근심하고 진찰할 수 없으니 퍽 섭섭하오

♧...참한詩 2021.08.18

김욱진 시인 매일신문 [지글지글-지면으로 익히는 글쓰기] 시-(1)'시'란 무엇인가

[지글지글-지면으로 익히는 글쓰기] 시(詩)- (1)'시'란 무엇인가 (imaeil.com) [지글지글-지면으로 익히는 글쓰기] 시(詩)- (1)'시'란 무엇인가 삶이지요. 삶은 일상입니다. 일상 속에서 주고받는 말들 가령, 밥 먹자. 학교 가야지. 차 한 잔 하자. 애인 생겼어. 눈이 내린다 등등… 우리는 가끔 이… news.imaeil.com

불이不二·2

불이不二·2 김욱진 맨발로 숲길을 걷는다 더럽게 맨발로 와서 온 숲을 오염시키느냐고 새들은 재잘재잘 돌멩이들도 구시렁구시렁 딴지를 건다 한 발 한 발 뗄 때마다 어떤 흙은 새끼발가락 새로 끼어들어 이 발가락새끼 간지러워 미치겠다며 깔깔 웃어재끼고 또 어떤 흙은 발바닥에 살살 달라붙어 젖먹이처럼 칭얼거린다 살과 살 사이 끼어들고 달라붙는 건 너나 나나 마찬가지 나는 흙의 발가락이 되고 흙은 나의 발바닥이 되는 순간 나의 발은 순한 흙발이 된다 흙이 숲길을 걷는다 맨발로 걸으니, 그러니 심사가 둘이 아님을, 뼈저리게 발가락은 오므라들었고 발바닥은 펴졌다 나도 모르게 외진 숲길 한 모퉁이서 맨발과 맨흙이 조용히 만나 둘이 하나가 된다 숲이 된다

♧...발표작 2021.08.13

지우개 / 송순태

지우개 송순태 잘못 써내려온 문장이 있듯이 잘못 살아온 세월도 있다 바닷가에 앉아서 수평을 보고 있으면 땅에서 잘못 살아온 사람들이 바다를 찾아오는 이유를 알겠다 굳은 것이라고 다 불변의 것이 아니고 출렁인다고 해서 다 부질없는 것이 아니었구나 굳은 땅에서 패이고 갈라진 것들이 슬픔으로 허물어진 상처들이 바다에 이르면 철썩철썩 제 몸을 때리며 부서지는 파도에 실려 매듭이란 매듭은 다 풀어지고 멀리 수평선 끝에서 편안해지고 마는구나 잘못 쓴 문장이 있듯이 다시 출발하고 싶은 세월도 있다

♧...참한詩 2021.08.09

노래의 눈썹 / 장옥관

노래의 눈썹 장옥관 새의 발가락보다 더 가난한 게 어디 있으랴 지푸라기보다 더 가는 발가락, 햇살 움켜쥐고 나뭇가지에 얹혀있다 나무의 눈썹이 되어 나무의 얼굴을 완성하고 있다 노래의 눈썹, 노래로 완성하는 새의 있음 배고픈 오후, 허기 속으로 새는 날아가고 가난하여 맑아지는 하늘 가는 발가락 감추고 날아간 새의 자취, 쫓으며 내 눈동자는 새의 메아리로 번져간다

♧...참한詩 2021.08.09

낙동강이여 깨어나라 / 신천희

낙동강이여 깨어나라 신천희 낙동강은 지금 묵언 중이다 골골에서 재잘거리며 모여든 개울물들이 웅성거리다가 모두 입을 닫아걸었다 이제 무명의 허상들 모두 침잠시켜버리고 고요히 무애자재한 강물로 자정하며 홀로 맑아져야 한다 찰나의 걸림도 없는 반야의 물살로 흐르며 녹조를 만나면 녹조를 죽이고 와류를 만나면 와류를 죽이고 피안의 바다에서 오도송을 읊으며 법희의 춤사위를 펼치기 위해 밤낮없이 수행 중인 낙동강은 지금 묵언 중이다

♧...참한詩 2021.08.03

저녁의 퇴고 / 길상호

저녁의 퇴고 길상호 앉은뱅이 밥상을 펴고 시 한 편 다듬는 저녁, 햇살이 길게 목을 빼고 와 겸상으로 앉는다 젓가락도 없이 시 한 줄을 쭈욱, 뽑아들더니 허겁지겁 씹기 시작한다 너무 딱딱한 단어 몇 개 가시처럼 발라내놓고 익지 않은 수사들은 퉤퉤 뱉어내놓고, 넘길 게 하나 없었는지 잇자국 가득한 언어들 수북이 밥상 위에 쌓인다 노을보다 더 벌게져서 얼른 창을 닫고 돌아오니 시는 시대로 나는 나대로 발목을 잃은 앉은뱅이, 먹을수록 허기진 밥상은 잠시 물려놓기로 한다 200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 《오동나무 안에 잠들다》 《모르는 척》 《눈의 심장을 받았네》 천상병詩문학상 수상...

♧...참한詩 2021.07.22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 김종삼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김종삼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시가 뭐냐고 나는 시인이 못됨으로 잘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무교동과 종로와 명동과 남산과 서울역 앞을 걸었다. 저물 녘 남대문 시장 안에서 빈대떡을 먹을 때 생각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엄청난 고생되어도 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 있으므로 슬기롭게 사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알파이고 고귀한 인류이고 영원한 광명이고 다름 아닌 시인이라고.

♧...참한詩 2021.07.04

밥그릇 / 조향순

밥그릇 조향순 바깥에 사는 고양이의 밥그릇을 채우느라 나는 늘 바쁩니다 아침 먹으로 왔는데 밥그릇이 비었잖아 실컷 놀고 출출한데 밥그릇이 비었잖아 밤참 먹으로 왔더니 밥그릇이 비었잖아 이럴까봐 아침에도 낮에도 밤중에도 밥그릇을 채웁니다 빈 밥그릇 앞에서 떨어뜨릴 꽃씨 같은 작은 눈물, 생각만 해도 아! 빈 밥그릇 앞에서 떨어지는 세상의 모든 눈물, 생각만 해도 아!아!

♧...참한詩 2021.0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