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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운기 소리 / 문인수

경운기 소리 문인수 그 집 할아버지는 평생 농사만 지었다. 할아버지, 점심 때 집에 왔으나 할머니가 아직 오지 않아 대강 챙겨 자시고 다시 부지런히 경운기 몰고 밭으로 나갔다. 할머니, 아랫마을 갔다가 부랴부랴 집에 와 보니 에고, 이 양반, 맹물에 밥 말아 그냥 밥 떠 넣고 장 떠 넣고 한 눈치. 할머니 못내 속이 상해서 쯧, 쯧, 평소처럼 일거들 요량으로 한참 걸어 밭으로 나갔다. 할머니, 와락 달려들어 영감! 영감님을 부여안아 일으켰으나 119구급차가 도착했을 땐 이미 숨을 거두어 묻은 흙 묻은 손. “오늘 아침엔 경운기 시동이 참 잘 걸리네요.” “그래, 기분이 좋구만.” 별다른 뜻이 없어도 오래 아프게 된 말, 송사에 답사. 상가엔 꼭 상복을 입은 이별 장면, 별사가 따로 있다. 무쇠 팔 경운기..

♧...참한詩 2021.06.10

굿모닝 / 문인수

굿모닝 문인수 어느 날 저녁 퇴근해오는 아내더러 느닷없이 굿모닝! 그랬다. 아내가 웬 무식? 그랬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후 매일 저녁 굿모닝, 그랬다. 그러고 싶었다. 이제 아침이고 대낮이고 저녁이고 밤중이고 뭐고 수년째 굿모닝, 그런다. 한술 더 떠 아내의 생일에도 결혼기념일에도 여행을 떠나거나 돌아올 때도 예외없이 굿모닝, 그런다. 사랑한다 고맙다 미안하다 수고했다 보고 싶었다 축하한다 해야 할 때도 고저장단을 맞춰 굿모닝, 그런다. 꽃바구니라도 안겨주는 것처럼 굿모닝, 그런다. 그런데 이거 너무 가벼운가, 아내가 눈 흘기거나 말거나 굿모닝, 그런다. 그 무슨 화두가 요런 잔재미보다 더 기쁘냐, 깊으냐. 마음은 통신용 비둘기처럼 잘 날아간다. 나의 애완 개그, ‘굿모닝’도 훈련되고 진화하는 것 같다...

♧...참한詩 2021.06.10

이것이 날개다 / 문인수

이것이 날개다 문인수 이들의 평균수명은 그 무슨 배려라도 해주는 것인 양 턱없이 짧다 마침, 같은 처지들끼리 감사의 기도를 끝내고 점심식사중이다 떠먹여주는 사람 없으니 밥알이며 반찬, 국물이며 건더기가 온데 흩어지고 쏟아져 아수라장, 난장판이다 그녀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이정은 씨가 그녀를 보고 한껏 반기며 물었다 #@%, 0%.$&%ㅒ#@!$#*?(선생님, 저 죽을 때도 와주실 거죠?) 그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왈칵, 울음보를 터트렸다 $#.&@/.%, *&#…(정식이 오빤 좋겠다, 죽어서…) 입관돼 누운 정식씨는 뭐랄까, 오랜 세월 그리 심하게 몸을 비틀고 구기고 흔들어 이제 비로소 빠져나왔다, 다 왔다, 싶은 모양이다. 이 고요한 얼굴, 일그러뜨리며 발버둥치며 가까스로 지금 막 펼친 안심, ..

♧...참한詩 2021.06.09

용서 / 이산하

용서 이산하 어릴 적 새벽마다 옆집의 달걀을 몰래 훔쳐 먹었다. 어른들이 이빨에 톡톡 쳐서 먹는 게 너무 멋있어서 나도 계속 훔쳐서 흉내를 냈다.... 1주일 후 옆집 아저씨가 알도 못 낳는 게 모이만 축낸다는 이유로 암탉을 잡아 삶았다. 우리 집에도 맛보라며 삼계탕 한 그릇을 가져왔다. 아버지가 장남이 먹어야 한다며 나한테 주었다. 그날 이후 지금까지 난 삼계탕을 먹은 적이 없다. 영문도 모른 채 억울한 누명으로 목숨을 잃은 50년 전의 암탉에게 용서를 빈다.

♧...참한詩 2021.06.06

남루에 대하여 / 이상국

남루에 대하여 이상국 지난 해 봄 시집을 묶으며 몸을 전부 비웠는데 아직 시가 남았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한때 그가 찾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던 시절이 있었다 그에게 속을 다 내보이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거나 어쩌다 저 맘에 드는 생각을 해내고는 길 가다 혼자 웃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생은 날마다 상처를 밀치고 올라오는 새살 같은데 나의 시는 남루와 같아서 어느 날 깊은 산속에 데리고 가 나뭇가지에 걸어놓고 오고 싶다

♧...참한詩 2021.06.03

물의 이데아 / 이진엽

물의 이데아 이진엽 수직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호수는 둥근 파문으로 고이 받아준다 빗줄기가 더욱 세차게 내리쳐도 호수는 크고 작은 바퀴들을 만들어 물의 살갗 위로 부드럽게 굴러가게 한다 세상의 어떤 것도 물 위에 몸을 던질 때면 둥근 팔 안에 안겨버린다 물의 가슴에서 밤새 감기는 저 신비한 태엽들 원형은 분명 우주의 고요한 근원이다 빗방울이 호수의 눈썹을 들출 때마다 물 위에서 일렁이는 수많은 눈동자들 그 동공에 비치는 우리들의 얼굴도 온갖 열매들과 따뜻한 자궁마저도 모두가 물의 원형을 복제한 것이다

♧...참한詩 2021.05.31

나무도 꿈꾼다 / 이종대

나무도 꿈꾼다 이종대 나무도 분명 걷고 싶을 때 있는 것 같다 걷고 걸어서 좀 더 트인 곳으로 탈출하듯 달려가고 싶은 것 같다 그러기에 발가락 꿈틀거려 두터운 흙더미 밀쳐내며 조금씩 지평을 넓혀가지 않는가 걷고 싶기에 보도블록도 지긋이 들어 올리고 근육질 허벅지 드러내 보이지 않는가 나무도 분명 날고 싶은 때 있는 것이다 날고 날아서 높은 곳 더 잘 보이는 곳으로 가고 싶은 것이다 그러기에 가지 흔들리면서도 조금씩 제 몸통 밀어 올리지 않는가 제 살 내어주며 키운 새들을 저렇게 멀리 날려 보낼 수 있는 게 아닌가 나무도 걷고 뛰고 날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돌 틈 비집어 뿌리 길게 내리고 태양 향해 손 길게 뻗으며 세상을 알아가는 것이다 그러기에 진천에서 보이는 잣나무가 서울에서도 보이고 평양에서도 보이는..

♧...참한詩 2021.05.30

김욱진 시인 고향 시편-행복 채널 외 16편

행복 채널 김욱진 가끔 채널을 돌리고 싶을 때가 있다 묏등에 염소 고삐 풀어놓고 술래잡기하며 뒹굴던 코흘리개 시절로 어머니 손잡고 산비탈 굽이굽이 돌아 외갓집 가는 길 어스름 서리하던 복숭나무 아래로 꽁보리밥 싸가는 게 부끄럽다고 생떼부리며 드러누웠던 골목길로 고주박이 한 짐 걸머진 지게머리 참꽃다발 수북 꽂아 버텨두고 도랑가재 잡아 구워먹던 불알들 곁으로 성황제 지낸 고목 아래 함초롬 밝혀둔 불 종지 몰래 주워와 시렁에 모셔놓고 집안 액운 다 태워달라며 밤새 빌던 정월 대보름 새벽 달빛 속으로 푹 빠져들고 싶을 때가 있다 아직 내 맘속의 주파수가 얼마인지는 잘 모르지만 행복채널에 머물고 싶을 때가 있다 더러는 녹색 신호등 앞에서 강생이 한 마리가 내 채널을 휙, 돌려놓고 갈 때도 있다 한두레마을 염소 ..

♧...자료&꺼리 2021.0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