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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사이 / 박소란

모르는 사이 박소란 ​ ​ 당신은 말이 없는 사람입니까 이어폰을 꽂은 채 줄곧 어슴푸레한 창밖을 내다보고 있군요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를 태운 7019번 버스는 이제 막 시립 은평병원을 지났습니다 광화문에서부터 우리는 나란히 앉아 왔지요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나는 인사하고 싶습니다 당신이 눈을 준 이 저녁이 조금씩 조금씩 빛으로 물들어간다고 건물마다 스민 그 빛을 덩달아 환해진 당신의 뒤통수를 몰래 훔쳐봅니다 수줍음이 많은 사람입니까 당신은 오늘 낮에 혼자 밥을 먹었습니다 행복한 사람들이 가득한 광장을 혼자 걸었습니다 언젠가 당신은 그곳에서 우연히 친구를 만난 적이 있지요 밥이나 한번 먹자 악수를 나누고서 황급히 돌아선 적이 있지요 나는 슬퍼집니다 그렇고 그런 약속처럼 당신은 벨을 누..

♧...참한詩 2021.05.16

심야 식당 / 박소란

심야 식당 박소란 당신은 무얼 먹고 지내는지 궁금합니다 이 싱거운 궁금중이 오래 가슴 가장자리를 맴돌았어요 충무로 진양상가 뒷편 국수를 잘하는 집이 한군데 있었는데 우리는 약속도 없이 자주 왁자한 문 앞에 줄을 서곤 했는데 그곳 작다란 입간판을 떠올리자니 더운 침이 도네요 아직 거기 그 자리에 있는지 모르겠어요 맛은 그대로인지 모르겠어요 실은 우리가 국수를 좋아하기는 했는지 나는 고작 이런 게 궁금합니다 귀퉁이가 해진 테이블처럼 잠자코 마주한 우리 그만 어쩌다 엎질러버린 김치의 국물 같은 것 좀처럼 딱이지 않는 얼룩 같은 것 새금하니 혀끝이 아린 순간 순간의 맛 이제 더는 배고프다 말하지 않기로 해요 허기란 얼마나 촌스러운 일인지 혼자 밥 먹는 사람, 그 구부정한 등을 등지고 혼자 밥 먹는 일 형광등 거..

♧...참한詩 2021.05.16

진달래 / 강윤후

진달래 강윤후 진달래는 고혈압이다 굶주린 눈멀어 우글우글 쏟아져 나오는 빨치산처럼 산기슭 여기저기서 정맥 터질 듯 총질하는 꽃 진달래는 난장질에 온 산은 주리가 틀려 서둘러 푸르러지고 겨우내 식은 세상의 이마가 불쑥 뜨거워진다 도화선 같은 물줄기 따라 마구 터지는 폭약, 진달래 진달래가 다 지고 말면 풍병風病든 봄은 비틀비틀 여름으로 가리라

♧...참한詩 2021.05.02

보라빛 여자도 / 곽재구

보라빛 여자도 곽재구 바람이 불어오면 나는 알지 우리가 함께 손잡고 걸어가던 시간이 그곳에 있었음을 달천에서 작은 여객선을 타고 우리가 서러운 눈망울 속에 서러운 눈에 든 갈매기 울음소리를 듣는 동안 연안의 섬들이 뜨거운 긴 손을 내미네 내 어릴 적 보라색 크레용을 좋아해서 보라색 엄마를 그리고 보라색 기차를 타고 보라색 배를 타고 보라색 꽃이 핀 세상에 길들을 외톨이 고등어처럼 떠돌고 싶었네 오늘 당신과 나 보라색 파도와 함께 여자도로 가네 보라색의 섬들이 보라색의 별처럼 보라색의 꽃다발 되어 우리들 가슴에 담기네 보라색 여인이 살고 있어요

♧...참한詩 2021.04.29

담쟁이 넝쿨 / 황동규

담쟁이 넝쿨 황동규 건물 벽에 그어지는 균열은 건물의 상처겠지. 서달산 가는 길에 만나곤 하던 낡기 시작한 빌라 콘크리트 벽에 번갯불 형국으로 조금씩 벌어지던 틈새, 지난해부터 검푸른 잎들이 기어올라 가려주기 시작했다. 포도과 담쟁이 넝쿨. 남의 상처 가리는 삶은 남는 삶이겠지. 색깔도 보는 마음 편케 검푸르네. 오늘은 까마중 같은 귀여운 열매까지 달고 있군. 걸음 멈췄다. 검푸른 잎들 속에서 잎 하나가 빨갛게 불타고 있었지. 벽의 균열 가리는 검푸름 일색 잎들 속에 저렇게 혼자 불타는 놈도 있었군. 잎 하나가 건물 벽을 온통 설레게 하는구나. 걸음 떼기 전, 이 세상 사는 동안 어떤 건물의 벽이 마음의 끈을 이처럼 세차게 당겼지?

♧...참한詩 2021.04.28

어느 봄날

어느 봄날 개와 개나리 사이 무슨 연분이 있을 리도 만무하고 아파트 담벼락 활짝 핀 개나리 앞에서 산책 나온 개 두 마리 난리를 치네요 멀건 대낮 입마개한 사람들은 벚꽃 벗고-옷 그러며 지나가는데 누런 수캐는 혀를 빼물고 꽁무니 빼는 암캐 등에 확 올라탑니다 개 나리, 난 나리 쏙 빼닮은 개를 낳고 싶어요 코로나로 들끓는 이 난리 통에도, 참 사랑은 싹이 트네요 개 난리 통에 개나리는 참 난감했겠습니다 이 화창한 봄날 성이 차지 않은 게 어디 걔들뿐이었겠습니까 마는 사정없이 떠나는 봄도 어지간히 다급했나 봅니다 (2021 문경문학 16호)

♧...발표작 2021.04.13

살맛나는 세상

살맛나는 세상 김욱진 얼마 전 정년퇴직을 했거든요 고향 친구들 간간이 전화 와서 요즘 백수 된 기분 어떠냐고 물으면 살맛이 난다 그러지요 그래도 꼬치꼬치 물으면 진담 반 농담 반 봄 꼬치꼬치 흐드러지게 피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고 한참 너스레를 떨지요 아침 먹고 동네 한 바퀴 돌다 보면 개나리 목련 벚꽃 죽 나와 서서 인사하는 거 다 받아줘야지요 이름 모를 새들 날아와서 노래 부르는 거 다 들어줘야지요 멀리서 친정집처럼 찾아온 벌 나비들 가족사진 한 장씩 찍어둬야지요 눈 퀭한 길고양이들 새우깡이라도 한낱 던져줘야지요 그러고 노인정 앞 툇마루 둘러앉아 윷놀이하는 할머니들 윷말 다 써줘야지요 도 앞에 개 나온 할머니 인상이 죽을 맛인데 멍멍 짖고 지나가는 개 멍하니 쳐다보는 척하며 윷말을 은근슬쩍 윷에다..

♧...발표작 2021.04.12

나무의자 / 김욱진(2021대구문학 4월호 월평)

나무의자 김욱진 물속에 가라앉은 나무의자 하나 미라처럼 등을 바닥에 대고 못 한 모퉁이 조용히 누워있다 지나가다 언뜻 보면 평생 누군가의 엉덩이 치받들고 꼿꼿이 앉아 등받이 노릇만 하고 살다 이제 두 다리 쭉 뻗고 누워 노후를 편히 쉬는 듯한 모양새다 그 자세가 부러웠던지 물오리 떼 간간이 찾아와 근심 풀듯 물갈퀴 풀어놓고 앉아 쉬, 하다 가고 그 소문 들은 물고기들도 어항 드나들듯 시시때때로 와서 쉬었다 가는데, 저 나 무의 자는 더 이상 나무도 아니고, 의자도 아니다 앉으나 누우나, 성당 못 오가는 사람들 쉼터 되어주다 못 속으로 돌아가 못 다 둘러빠지는 그 순간까지 십자가 걸머지고 가는 나 무의 자는 나무로 왔다 의자로 살다 못으로 돌아간 성자 -김욱진,「나무의자」전부 지금 시인의 눈은 성당못 한켠..

아름다움에 대하여 / 윤제림

아름다움에 대하여 윤제림 내 심장을 꿰뚫을 수도 있었을, 화살 하나가 종잇장 하나를 매달고 장대(將臺) 기둥에 날아와 꽂혔다 적장의 편지였다 역관(譯官)을 불러 읽어보라 했다 수레바퀴만한 달이 성곽을 타고 넘어가는 봄밤이오 오늘도 나는 변복을 하고 동서남북을 두루 살피고 돌아와 이제 막 저녁을 먹었다오 망루며 포대며 당최 치고 떄릴 데가 없더이다 나는 이 아름다운 성에 이미 무릎을 끓었소 날 밝으면 성문 앞 팽나무 그늘에서 바둑이나 한 판 둡시다, 우리 내가 지면 조용히 물러가리다 혹여, 내가 그대를 이긴다면 어찌하면 이렇게 아름다운 성을 쌓을 수 있는지 기술이나 두어 가지 일러주지 않겠소?

♧...참한詩 2021.04.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