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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 / 이산하

용서 이산하 어릴 적 새벽마다 옆집의 달걀을 몰래 훔쳐 먹었다. 어른들이 이빨에 톡톡 쳐서 먹는 게 너무 멋있어서 나도 계속 훔쳐서 흉내를 냈다.... 1주일 후 옆집 아저씨가 알도 못 낳는 게 모이만 축낸다는 이유로 암탉을 잡아 삶았다. 우리 집에도 맛보라며 삼계탕 한 그릇을 가져왔다. 아버지가 장남이 먹어야 한다며 나한테 주었다. 그날 이후 지금까지 난 삼계탕을 먹은 적이 없다. 영문도 모른 채 억울한 누명으로 목숨을 잃은 50년 전의 암탉에게 용서를 빈다.

♧...참한詩 2021.06.06

남루에 대하여 / 이상국

남루에 대하여 이상국 지난 해 봄 시집을 묶으며 몸을 전부 비웠는데 아직 시가 남았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한때 그가 찾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던 시절이 있었다 그에게 속을 다 내보이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거나 어쩌다 저 맘에 드는 생각을 해내고는 길 가다 혼자 웃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생은 날마다 상처를 밀치고 올라오는 새살 같은데 나의 시는 남루와 같아서 어느 날 깊은 산속에 데리고 가 나뭇가지에 걸어놓고 오고 싶다

♧...참한詩 2021.06.03

물의 이데아 / 이진엽

물의 이데아 이진엽 수직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호수는 둥근 파문으로 고이 받아준다 빗줄기가 더욱 세차게 내리쳐도 호수는 크고 작은 바퀴들을 만들어 물의 살갗 위로 부드럽게 굴러가게 한다 세상의 어떤 것도 물 위에 몸을 던질 때면 둥근 팔 안에 안겨버린다 물의 가슴에서 밤새 감기는 저 신비한 태엽들 원형은 분명 우주의 고요한 근원이다 빗방울이 호수의 눈썹을 들출 때마다 물 위에서 일렁이는 수많은 눈동자들 그 동공에 비치는 우리들의 얼굴도 온갖 열매들과 따뜻한 자궁마저도 모두가 물의 원형을 복제한 것이다

♧...참한詩 2021.05.31

나무도 꿈꾼다 / 이종대

나무도 꿈꾼다 이종대 나무도 분명 걷고 싶을 때 있는 것 같다 걷고 걸어서 좀 더 트인 곳으로 탈출하듯 달려가고 싶은 것 같다 그러기에 발가락 꿈틀거려 두터운 흙더미 밀쳐내며 조금씩 지평을 넓혀가지 않는가 걷고 싶기에 보도블록도 지긋이 들어 올리고 근육질 허벅지 드러내 보이지 않는가 나무도 분명 날고 싶은 때 있는 것이다 날고 날아서 높은 곳 더 잘 보이는 곳으로 가고 싶은 것이다 그러기에 가지 흔들리면서도 조금씩 제 몸통 밀어 올리지 않는가 제 살 내어주며 키운 새들을 저렇게 멀리 날려 보낼 수 있는 게 아닌가 나무도 걷고 뛰고 날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돌 틈 비집어 뿌리 길게 내리고 태양 향해 손 길게 뻗으며 세상을 알아가는 것이다 그러기에 진천에서 보이는 잣나무가 서울에서도 보이고 평양에서도 보이는..

♧...참한詩 2021.05.30

김욱진 시인 고향 시편-행복 채널 외 16편

행복 채널 김욱진 가끔 채널을 돌리고 싶을 때가 있다 묏등에 염소 고삐 풀어놓고 술래잡기하며 뒹굴던 코흘리개 시절로 어머니 손잡고 산비탈 굽이굽이 돌아 외갓집 가는 길 어스름 서리하던 복숭나무 아래로 꽁보리밥 싸가는 게 부끄럽다고 생떼부리며 드러누웠던 골목길로 고주박이 한 짐 걸머진 지게머리 참꽃다발 수북 꽂아 버텨두고 도랑가재 잡아 구워먹던 불알들 곁으로 성황제 지낸 고목 아래 함초롬 밝혀둔 불 종지 몰래 주워와 시렁에 모셔놓고 집안 액운 다 태워달라며 밤새 빌던 정월 대보름 새벽 달빛 속으로 푹 빠져들고 싶을 때가 있다 아직 내 맘속의 주파수가 얼마인지는 잘 모르지만 행복채널에 머물고 싶을 때가 있다 더러는 녹색 신호등 앞에서 강생이 한 마리가 내 채널을 휙, 돌려놓고 갈 때도 있다 한두레마을 염소 ..

♧...자료&꺼리 2021.05.24

선생님이 주신 선물 / 권영하

선생님이 주신 선물 권영하 선생님이 벌 대신 수정테이프를 주셨어요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라고 수정테이프에는 하얀 길이 감겨있었어요 펜이 길을 잘못 가면 기다리고 있다가 달려 나왔어요 지우개로 지워지지 않는 길도 공책에 잘못 쓴 발자국도 뚜벅뚜벅 걸어 나와 덮어주었어요 참고 있다가 잘못을 살며시 덮어주었어요 다시 걸어갈 수 있도록 새 길을 놓아주었어요 며칠 후, 친구와 또 말다툼을 했는데 선생님은 어깨만 토닥토닥 두드려 주셨어요 꾸중 대신 또 수정테이프를 주셨어요

♧...참한詩 2021.05.23

하얀 저수지 / 문성해

하얀 저수지 문성해 저수지가 얼고 그 위로 눈이 왔다 맨얼음 위로는 감히 올라가지 않더니 땅과 물의 경계가 없어지자 사람들이 겁도 없이 그 위로 걸어들어간다 얼음판 가운데 서 있으니 내가 오래전에 이 저수지에 빠져 죽은 사람 같다 내 발밑으로 사람을 뜯어 먹고 산다는 잉어 한마리 지나가는가 머리카락이 키를 넘기게 자란 그 여자가 지나가는가 클클거리는 얼음판 밑이 지금은 아우성이고 폭풍 속 같은 데고 얼음판 위는 물속처럼 적막하다 퍼런 물살 한 조각 신발에 묻히고 걸어나오면 잉여된 목숨을 사는 듯 피가 훈훈히 데워지고 신발코를 하얗게 밝힌 채 사람들이 집으로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참한詩 2021.05.20

노래 / 이경림

노래 이경림 나 세상에 안 가본 길 많아 몸이 아픕니다 그 길들 자꾸 내 몸에 휘감기어 숨이 막힙니다 문득 눈떠 보면 낯선 길 만발하고 어질머리처럼 세상 도는데 나 아직 안 해본 짓거리 너무 많아 눈이 어둡습니다 해지면 남몰래 이야기를 만드는 불빛 뻔한 집들 메밀꽃처럼 피어나는 도시의 불빛들 아우트라인만 너무 환한 저 유곽들 나 그것들에 눈멀어 자꾸 몸이 상합니다 시도 때 없이 우우우 관절이 일어납니다 나 아직 안 울어본 울음 많아 목젖이 붓습니다 꺼이꺼이 울 일 아직도 많아 미리 목젖이 붓습니다 아 그런 날은 내 몸이 화로입니다

♧...참한詩 2021.0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