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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욱진 시인 고향 시편-행복 채널 외 16편

김욱진 2021. 5. 24. 14:52

행복 채널

김욱진

 

 

가끔 채널을 돌리고 싶을 때가 있다

묏등에 염소 고삐 풀어놓고

술래잡기하며 뒹굴던 코흘리개 시절로

어머니 손잡고

산비탈 굽이굽이 돌아 외갓집 가는 길

어스름 서리하던 복숭나무 아래로

꽁보리밥 싸가는 게 부끄럽다고

생떼부리며 드러누웠던 골목길로

고주박이 한 짐 걸머진 지게머리

참꽃다발 수북 꽂아 버텨두고

도랑가재 잡아 구워먹던 불알들 곁으로

성황제 지낸 고목 아래 함초롬 밝혀둔

불 종지 몰래 주워와 시렁에 모셔놓고

집안 액운 다 태워달라며

밤새 빌던 정월 대보름 새벽 달빛 속으로

푹 빠져들고 싶을 때가 있다

아직 내 맘속의 주파수가 얼마인지는 잘 모르지만

행복채널에 머물고 싶을 때가 있다

더러는 녹색 신호등 앞에서

강생이 한 마리가 내 채널을 휙, 돌려놓고 갈 때도 있다

 

한두레마을 염소 이야기

 

초등학교 때 나는 염소 동아리 반장을 한 적 있다

요즘 말로 하자면 근로 장학생인 셈이다

가정 형편 어려운 나는

장학금 턱으로 어린 암염소 한 마리를 받았다

소 키우는 집이 엄청 부러웠던 그 시절

학교만 갔다 오면

나는 염소 고삐 잡고 졸졸 따라다니며

허기진 배를 채웠다

그 염소가 자라 이듬해 새끼 두 마리를 낳았다

그 중 수놈은 팔아 중학교 입학금 마련하고

암놈은 건넛집 할머니랑 사는 여자아이에게 분양했다

희망 사다리 오른 그 아이도

어미 염소 되도록 길러 새끼 낳으면

릴레이식으로 건네주는 염소 동아리

염소 한 마리가 새끼를 낳고

그 새끼가 또 새끼 낳고 낳아

육십여 호 되는 한두레마을은

어느새 염소한 마리 없는 집이 없었다

뿔 맞대고 티격태격하던 이웃들

염소 교배시킨 인연으로 부부 되고 사돈 맺는

고삐 풀린 그런 날 더러 있었는데

외박 나온 염소들도 마냥

하늘땅 치받으며 히죽히죽 웃기만 했다

 

빈집·2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흙집

지문은 다 사라지고

방문 왼손 편 벽 언저리엔

지팡이처럼 짚고 드나든

손자국만 하나 쿡, 찍혀있다

백일 전 돌아가신 어머니

시집 올 때 신고 온 코고무신 한 켤레

가지런히 놓여있는 봉당 앞에서

무심코 지붕 올려다보니, 그단새 처마 밑은

온통 부동산 투기꾼들로 북적인다

거미는 얼기설기 줄을 쳐뒀고

땅벌도 간간이 날아들어

이곳저곳 갸웃거리고

자식새끼 줄줄 딸린 제비 부부는

집터고 뭐고 따져볼 겨를도 없이

애비는 써레질한 무논에서

지푸라기 다문다문 짓이겨 와

다섯 식구 살 집 한 채 짓는 중이고

어미는 새끼들 땟거리 구하러 다니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하다

집 주인은 오간데 없는데

빈집에 큰 손은 잦아들고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다

어머니 살아생전

너그 잘 있으면 됐다

집 걱정은 하지 마라, 그러셨는데

 

노모 일기․2

 

모처럼, 미수米壽를 바라보는 어머니가 손수 장만한 칼국수

온 가족이 두레반에 둘러앉아 후루룩 소리 내어 먹는다

주물럭주물럭 반죽한 밀가루 안반 위에다 올려놓고

풍진 세상 모퉁이 돌고 돌아

홍두깨로 모난 녀석 볼 한 번 더 비벼주며

키 몸무게 자로 재듯 빚은 손칼국수

어머니 손맛이 절로 느껴지는 저녁이다

바른손 새끼손가락이 불쑥 튀어나올 상 싶으면

약지 중지 손구락은 원을 그리며 다독이고

왼손 엄지 중지에 지그시 힘 실어주는 어머니의 손끝은

섬섬옥수다

둥근 세상 일궈가는 어머니 손놀림 어깨 너머로 훔쳐보며

우리 칠 남매는 저마다 한 가락씩 하는 손가락을 내밀고

겻불에 국수 꼬랑지 구워 나눠 먹는 법 익혔다

그러는 사이, 바람에 밀리고 밀린 안반은 헛간으로 밀려나 버렸고

한평생 국수만 밀어댄 홍두깨는 부지깽이처럼 가늘어졌다

밀고 당기는 게 뭔지도 잘 모르는 국수 꼬랑지 녀석들은

제 앞길 틔운다며 이곳저곳 떠밀려 다니기 일쑤

세상은 어느새 우리 가족을

두레반 밖으로 제각기 밀어내고 있는 이 마당

한복판에다 나는 어릴 적 둘둘 말아뒀던 멍석을 깔고

마누라는 어머니 대를 이어 국수를 밀고

아이들은 마당 가 피워둔 모깃불 옆에서

앵앵대는 모기처럼 눈물 훔치며 국수 꼬랑지 구워 먹고

저 하늘 별들은 손칼국수 국물에 반짝반짝 빛나는 양념 듬뿍 뿌리며

옹기종기 모여 앉은 한여름 밤, 저녁은 별미겠다

 

시,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시집 한 권 냈다고

팔십 평생 땅뙈기 일구고 산 오촌 당숙께 보내드렸더니

달포 만에 답이 왔다

까막눈한테 뭘 이래 마이 지어 보냈노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시를, 우린

시래기 국만 끓여 먹고 살아도 배부른데

허기야, 물 주고 거름 주고 애써 지은 거

아무 맛도 모르고 질겅질겅 씹어 봐도 그렇고

입맛 없을 때 한 이파리씩 넣고 푹 삶아 먹으면 좋것다

요즘은 시 나부랭이 같은 시래기가 금값 아이가

이전에 장날마다 약장수 영감 따라 와서

한 많은 대동강 한 가락 불러 넘기고

한바탕 이바구하던 그 여자

시방도 어데서 옷고름 풀듯 말듯 애간장 태우며

산삼뿌리 쏙 빼닮은 만병통치약 팔고 있나 모르것다

그나저나 니 지어 논 시

닭 모이 주듯 시답잖게 술술 읽어보이

청춘에 과부 되어 시집 안 가고 산 아지매

고운 치매 들었다하이

내 맴이 요로코롬 시리고 아프노

시도 때도 없이 자식 농사가 질이라고 했는데

풍년 드는 해 보자고 그랬는데

 

돌리네

 

상주 함창 공갈못 따돌리고

시인 여섯, 나의 고향 문경문학관 가는 길

굽이굽이 돌고 돌다

황새골 돌리네 습지로 발길 대뜸 돌리네

으악새 슬피 우는 가을처럼

억새로 둘러싸인 돌리네

웅덩이 속 들여다보았네

봄나들이 나온 올챙이 오글오글 청첩장을 돌리네

꼬리진달래 활짝 피는 6월이면

두꺼비로 엉금엉금 기어 다닌다는 풍문도 살랑살랑

발가락 휘젓고 돌아다니는 소금쟁이들은

먼 길 돌고 돌아온 산 그리메 빙글빙글 돌리네

물속에 있는 둥 없는 둥 숨어서

요 벌레 조 벌레 잡아먹다 들통난 들통발

난, 수초란 말이야

민망한 듯 고개를 요리조리 돌리네

그 사이 황조롱이 한 마리 날아 앉아

돌리네 해설하는 영감님 말씀

고대로 씨불이기라도 하듯

키득키득 웃음 한바탕씩 죽 돌리네

따돌릴세라, 바람피우고 돌아온 원앙

수달 담비 삵 능구렁이 사진 앞에서

사랑가 한 곡절 부르며

구렁이 담 넘어가듯 눈길을 돌리네

이게 다 습이었네

돌고 돌아 닿은 돌리네 습

잠시 숨 돌리고 한 생각 돌려보니

습이란 습은 다 느릿느릿 왔다

제자리로 돌아가는 연습장이었네

이참에 바쁘게 길들여진 나의 습 한 무더기

여기다 버려두고 가야겠네

 

닭 잡았다!

 

산북초등학교 88주년 총동창회 막이 오른다

꼬꼬닭을 잡는 시합을 한다

그늘만 찾던 씨암탉들도 홰를 치며

기세등등 벼르는 입술이 닭볏이다

닭장에서 풀려 나온 것이야

너나 나나 마찬가지

손도 없는 너희들에 비할 바가 아니지

병아리가 웃을 일이지

볏 바짝 세운 48기 폐계가

애기 업은 영계를 닦달하며

뒤뚱뒤뚱 쫓는다

술 취한 수탉들과

다닥다닥 뒤엉킨 운동장

넘어지고 엎어지고 희희 풀어지는데,

닭 잡았다! 벼슬했다! 가문의 영광이다!

벼슬을 통째 잡은 이 횡재!

아직도 벼슬 앞에 맥 못 추는

은빛 갈대가 휘휘 바람을 탄다

관암산 꼭대기를 단숨에 오르는 교가,

늙지 않았다

 

귀한 똥

 

보리죽 먹고 싼 똥

장군을 지고

백의종군한 적 있다

장군이 떴다는 소문에

똥파리들 바글바글 몰려들었다

혓바닥 빼문 똥개도

꽁무니 졸졸 따라와

입맛 쭉쭉 다셨다

나는 입 꾹 다물고

철책 지키고 선

수숫대 가랑이 새로

장군의 똥

한 바가지씩 퍼부었다

첩자처럼 날아든 참새

똥 찔끔찔끔 받아먹었다는 이유로

기초생활수급자 명단에도 없는

독거노인 허수아비

몸보신 한번 시켜드렸다

 

보리밥

 

오지랖 넓은 고향친구 녀석

어디서 금세 퍼온 따끈따끈한 글이라며

보리밥 한 그릇 퍼 담아 보냈습니다

 

빙판에 넘어져 엉치뼈 부러진 노인

앉은뱅이 되었다가

보리죽 한 달 끓여먹고 벌떡 일어섰다네요

 

이전엔 지랄 염병하고 돌아다니는 역병도

보리죽 먹고 귀신처럼 다 나았다네요

 

이밥에 고깃국만 먹고 산 양반네들이야

콧방귀 뀔 얘기지만

보릿고개 넘기고 살아온 나야

눈 버쩍 뜨이는 반가운 소식이지요

 

ㅎㅎ친구야, 어릴 적 우리가 먹은

꽁보리밥이 코로나 백신이었네그려

 

시래깃국에다 보리밥 한 그릇

말아먹는 이 저녁

 

막장에서 만난 형

 

두 하늘을 모시고 사는 형이 있었다

파란 새벽하늘 쳐다보고 갱 속으로 들어가

숯검댕이 하늘나라 투명인간 되어버린 형, 만나러 갔다

늦가을 해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

갑반 일을 마치고 걸어 나오는 검댕이들은 다

나의 형 같아 보였다, 보릿고개 시절

온몸에 깜부기 칠하고 나를 폭삭 속여먹었던 형

엄마한테 검정 고무신 사달라고 떼쓰던 그 형아

오늘은 아무런 말이 없다

동생 공부시키겠다고 처자식 먹여 살리겠다고

막장까지 떠밀려온 형들의 눈빛이 모도

지금, 여기, 나는 없었다

막장 한 모퉁이 꼬부리고 앉아

시시만큼 싸 온 점심 도시락을 까먹으면서도

은성 주포집 빈대떡 두루치기 한 접시 시켜놓고

술잔을 부딪치며 먼저 떠난 이의 이름 되뇌면서도

갱 입구 쓸쓸히 서 있는 동상을 바라보면서도

시커먼 석탄 가루 뒤집어쓴 형의 마음은 늘 새카맣게 타들었을 터

어렵사리 대학 간 동생 고시 패스만 하면

팔자가 늘어질 끼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형

석 달에 한 번쯤 광산 이발관 들러 밑도리도 하고

사택 공동 목욕탕에서만 항상 목간하던 형

간주 받는 날이면 어김없이 은성 식육점 돼지고기 두어 근

새마을 구판장 소고기라면 대여섯 봉다리 사 들고 집으로 돌아왔던 형

목소리가 고대로 살아남아 있는 문경 석탄박물관

단칸방 사택에는 아직도 라면땅 사 오는 형을 기다리며

나의 조카 질녀들은 딱지치기하고 있다

연탄불 피워놓은 따듯한 방에서 내가 편히 잠들었던 그 시간

형은 월남막장에서 석탄을 캐고 있었다

 

삼강주막

 

바짓가랑이 쩍 벌리고 문지방 걸터앉아

담뱃재 떨어지는 줄도 모른 채

옹벽에 나붙은 메뉴판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살아생전, 외상값은

그을음 꽉 낀 부엌 벽에다 그저

막걸리 한 사발은 짧은 세로 금

한 됫박은 긴 세로 금

외상을 갚으면 가로로 죽 그어버렸다는

사진 속 주모 할머니

 

막걸리 한 됫박 다섯 냥

메밀묵 한 대접 넉 냥

지짐이 한 두레 석 냥

두부 한 모 두 냥

이럭저럭 해서

한 상에 열두어 냥은 받았을 법한 그 시절

 

나룻배 타고 분주히 드나든 보부상들

외상값만 제대로 받아 가셨더라도

노잣돈쯤이야 두둑하셨을 터인데

 

할머니 산소에서

 

할머니 산소에 벌초하러 갔더니

봉분 언저리 보초 서있는

땅벌 몇 마리 날아와 불심검문을 했습니다

차마 손자라는 말 하지 못한 채

가자미처럼 엎드려

벌들에게 먼저 술 한 잔 부어줬습니다

억새풀이 허기진 듯 덥석 받아마셨습니다

또 한 잔 부어 할머니 머리맡에 받혀놓았더니

술은 바람이 와서 마시고

안주는 개미가 먹었습니다

살아생전, 제사상에 올렸다 숨겨둔 오징어 구워

몸통은 날 주고 뒷다리만 우물우물하시던 할머니

저 개미들조차 손자처럼 보이시나 봅니다

취기 오른 벌들도 할머니 등에 업혀 춤을 춰댑니다

나도 덩달아 어깨춤 덩실덩실 추었습니다

 

접붙이다

 

좌익우익이 뭔지도 모르는 어린 시절

할아버지는 고욤나무에다 감나무 접붙였다

감나무 눈을 떼다

억지로 고욤나무 눈에다 흙을 바르고 붙였으니

둘 다 눈앞이 캄캄하고 어리둥절했겠다

눈과 눈 경계 허물어진 봄이 되자

고욤나무에서 감나무 이파리 돋았다는

소문이 온 동네 파릇파릇 퍼졌다

눈 떼 붙이고 재미를 본 할아버지

비알 밭에다 면소 다니는 아버지 눈마저 접붙였다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좌익으로 몰려

하루가 멀다 않고 감시의 눈초리 피해 다녀야만 했던 아버지

부득이 왼 눈을 떼다 오른 눈에 다급히 접붙였다

서로 다른 두 눈 만나 한 뿌리 내리고 사는 길 틔우며

밭떼기 머슴 노릇하던 아버지

그 이듬해 된서리 맞고 말문 닫더니 눈 감으셨다

고욤나무에 아버지 주먹 같은 먹감 주렁주렁 달렸다

일찌감치 좌우익 바람 스쳐지나간 고향 마을

환갑을 눈앞에 둔 나의 기억 속에는

아직도 마흔일곱 먹은 아버지 먹감나무 앞에서

어린 고욤나무 눈물 닦아주고 서계신 아버지, 먹먹하다

 

사소한, 사소하지 않은

 

어릴 때 꼬드밥 우물우물 씹어

내 입에 넣어주신 할머니 이가 다 빠졌다

거짓말 많이 해서 그렇다고 하셨다

네 살 아래 여동생 감쪽같이 속여

요리조리 부려먹고 우려먹은 게 수도 없이 많았는데

덜컥 겁이 났다

그 후로 나는 여동생과 얘기할 땐

'참말로' 라는 말을 거짓말처럼 써먹었고

그러면 여동생은 철석같이 믿었다

열 살 되던 해, 어금니가 흔들거렸다

엄마한테 들키면 혼날 것 같아

몇 날 며칠 숨기다

할머니 앞에 무릎 꿇고 앉아 빌었다

할머니 합죽이 웃으며

거짓말처럼 옭아맨 내 어금니

콱 잡아당기며 정수리 팍 내리쳤다

쑥 둘러빠진 이빨

아궁이 속으로 집어던지며

나 보고 '헌 이 줄게 새 이 다오' 그러란다

이 다 빠진 할머니 거짓말

참말로 믿을 수밖에 없었다

 

나를 도둑맞다

 

나는 어릴 적 나를 도둑맞았다

섣달에 태어난 것만도 서러운데, 일곱 살배기 꼬마가

외갓집 2층 다락방 곶감 훔쳐 먹고 내려오다 계단 굴러떨어져

하반신 깁스하고 근 2년 방구들 신세 지는 바람에

나도 아닌 나를 둘이나 더 먹고

아홉에야 겨우 학교 문 들어섰으니 말이다

 

그러고 반평생 훌쩍 지나

'58년 개띠'라는 시 한 편을 어느 지역 문학지에다 실었더니

생전 연락 한번 없던 고향 친구 녀석이 단톡에다

ㅎㅎ김 시인, 갑이네… 이제 갑질할 나도 됐지

그러면서 시비를 걸어오지 뭔가

나보다 두 살이나 어렸던 그 친구

난데없이 일가 항렬 따지더니 지가 할배뻘이라며

요것조것 잔심부름 다 시키고

나를 개 부려먹듯 끌고 다니던 그 친구

이름자만 떠올려도 나는 금세 을이 되어버린다

 

그래서일까, 나는

갑이 되도록

나라는 나를 열쇠로 꼭꼭 잠그기만 했지

나와 나 사이 벌어지는 틈새로

나의 비밀번호가 술술 새나간다는 걸

미처 눈치채지 못하고 산 을, 얼간이었다

 

나를 열 수 있는 열쇠는 나밖에 없다고

나 뒤에 숨어 여태껏 나라고 우겨댔었는데

며칠 전 지하철 화장실 거울 앞에서

아랫도리 지퍼가 다 열려 있는 나를 훔쳐본 순간

나는 또 나에게 나를 도둑맞았다

 

박달나무 눈 참, 밝다

 

문경새재 박달나무 한 그루

내 방 귀퉁이 옷걸이로 거듭났다

바람소리 물소리 새소리만 듣고 살다

이젠 내 잔소리까지 듣고 산다

나무가 옷 갈아입었다

옷이 나와 옷걸이 번갈아 입었다

낮에는 나를 입고

밤에는 옷걸이를 입었다

내가 옷걸이 옷을 입고

옷걸이가 내 옷을 입어도

옷은 걸림이 없다

팔다리 잘린 옷걸이

옷 걸쳐 입을 때마다

나의 팔다리는 떨어져 나갔고

해지고 터진 바짓가랑이 사이로

바람소리 물소리 새소리 들렸다

나무가 옷을 입었다

옷이 나를 걸쳐 입었다

나는 옷걸이에 걸렸다

품도 소매도 없는 옷걸이에

어깨만 걸친 옷 한 벌 걸렸다

눈 밝은 *달달박박 옷 갈아입은 듯

박달이 입은 옷, 걸림이 없다

바람소리 물소리 새소리,

경을 듣는(聞經) 새재의, 이 아침

 

*달달박박 : 통일신라시대 노힐부덕과 쌍벽을 이룬 고승

 

용궁역

 

용궁에도 기찻길이 있다는 사실

거북이 꾐에 속아 넘어간 토끼가 알면

기절초풍할 일이다

 

토끼 간 대신 토끼 간 빵을 파는 용궁역*

 

중앙선 완행열차를 타고

잡순대 사 먹으러 가는 척하며

용궁역 잠시 내려 보라

간담이 서늘해진다

 

토끼 간 빼물고

용궁으로 돌아온 간 큰 거북이

이젠 버젓이 용궁역 안에서

토끼 간 빵을 구워 팔고 있다

 

간도 쓸개도 다 빼먹는 세상

어디 용궁뿐이랴

 

* 용궁역 : 경북 점촌과 개포 사이에 있는 간이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