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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 가야산.. 넘어가는 해를 잡아 둘 길 없어.. 가야산을 깎아 내고 싶어라

김욱진 2020. 12. 21. 11:18

[12월 마운스토리] 서산 가야산.. 넘어가는 해를 잡아 둘 길 없어.. 가야산을 깎아 내고 싶어라

글·사진 박정원 선임기자 입력 2020.12.21. 09:43 수정 2020.12.21. 

 

백제 때부터 불교 번성한 산인 듯.. 동남쪽은 토산, 서북쪽은 돌산

가야산 정상에서 맑은 날이면 서해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연기 모래 구름 나무 사이로 조그만 점 하나 指點烟沙霧樹間

조각배가 가로질러 만조에 돌아오네 小舟橫折晩潮還

서산에 급히 넘어가는 해를 잡아둘 길 없어 無緣得駐西飛日

만 겹 가야산을 깎아내고 싶어라 欲剗伽倻萬疊山

조선 말기 성리학자 조긍섭이 쓴 칠언율시다. 가야산을 깎아내서라도 넘어가는 해를 잡고 싶은 작가의 심정은 어떠할까. 한 해를 정리할 시점이 되면 누구나 가는 세월을 붙잡고 마무리 하지 못했던 일을 끝내고 싶지 않을까. 동해의 산들이 일출을 보는 산이라면 서해의 산들은 노을에 비친 일몰을 보는 산이라 할 수 있다. 서해의 일몰을 보는 산 중에 대표적인 명산이 바로 서산 가야산伽倻山(677.6m)이다.

서산 가야산은 합천 가야산과 한자도 같다. 두 산을 서로 비교할 만한 내용이 이중환의 <택리지> 복거론에 나온다. 복거론은 점을 쳐서 살 만한 장소를 고르는 것을 말한다.

‘해미의 가야산은 동남쪽이 토산이고, 서북쪽은 돌산이다. 동쪽에 있는 가야사伽倻寺 골짜기는 아주 먼 옛날 상황象王의 궁궐 터이다. 서쪽에 있는 수렴동은 바위와 폭포가 빼어나고 아름답다. 북쪽에 있는 강당동과 무릉동도 수석이 아름다우며, 아울러 마을과 아주 가까워서 머물러 살 만하다. 합천 가야산보다는 못하나 바닷가의 빼어난 경치를 독차지하기에는 충분하다.’

‘해미의 무릉동에 대대로 터 잡고 사는 부자들이 많다. 또한 이웃한 여러 고을도 뱃길이 편리해 경성의 사대부들이 모두 여기에서 수송해 가는 물산을 바라보고 살고 있다. 깊은 산이나 골짜기가 없기는 하나 바다 모퉁이의 궁벽한 지역이기 때문에 병란이 애초에 들어오지 않으므로 가장 좋은 복지로 일컬어진다.’

원효봉 정상에서 동쪽으로 가야산 정상이 길게 뻗어 있다.

서산 가야산이 합천 가야산보다 풍광으로는 조금 못할 수 있지만 바닷가를 끼고 있는 것을 장점으로 치면 교통과 풍부한 물산면에서 오히려 완전 내륙인 합천 가야산보다 더 나을 수 있다. 사찰 창건연대도 서산 가야산 주변에 있는 수덕사(6세기 후반 추정)나 개심사(651년 추정)가 합천 해인사(802년)보다 200여 년이나 빠르다. 신라보다 먼저 불교를 받아들인 백제가 가야산과 상왕산을 중심으로 번창시켰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가야산이란 지명도 불교에서 유래했다고 전한다. 불교의 4대 성지 중 한 곳이자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장소인 인도 부다가야 근방에 위치한 석가모니의 주요 설법처 중의 한 장소로 신성시 되는 가야산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세계 어느 곳이든 가야산이란 지명은 십중팔구 불교와 관련 있다.

원효봉 8부 능선 동굴 안에 있는 금술샘.

서해 일몰 빼어난 경관 독차지

가야산 정상에 올라서면 서해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가는 해를 산을 깎아서라도 붙잡아 두고 싶지만 오늘이 가야 내일이 있듯 못내 아쉬운 심정으로 가야산 정상에서 지는 해를 바라보며 2020년 경자년 한 해를 보내는 것도 좋을 성싶다.

예로부터 충청도는 내포內浦가 가장 좋다고 알려져 있다. 내포에 바로 가야산이 있다. 가야산 서쪽은 서해 바다이고, 북쪽은 대진大津(지금 아산만)을 사이에 두고 경기도 바닷가 고을과 인접해 있다. 여기는 서해가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온다. 가야산 동쪽은 큰 들이 펼쳐져 곡창지대를 이룬다. 들판 가운데 큰 포구가 있어 유궁진由宮津이라 한다. 유궁진은 밀물이 가득 차올라야만 배를 운항할 수 있다.

가야산 앞뒤로 열 개의 고을이 있어 다 함께 내포라 한다. 가야산이 중심이다. 10개의 마을은 해미, 안면도, 태안과 서산, 당진, 아산, 홍주와 덕산, 예산, 신창이다. 토지는 비옥하고 물가나 평지는 평탄하고 드넓다. 물고기와 소금이 흔해 부자와 사대부도 많았다. 산천은 평탄해 좋고, 드넓어 활짝 트였으나 멋지고 빼어난 느낌이다. 이와 같이 가야산과 그 주변은 풍광이 좋고 물산이 매우 풍부해 예로부터 많은 사람이 살았고 부유했다.

그 풍부한 물산의 중심에 있는 가야산은 일찌감치 고려시대부터 기록에 나타난다. <고려사지리지>에 ‘이산현은 본래 백제의 마시산군으로, 신라 경덕왕 때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군이 되었다. 현종 9년(1018)에 홍주에 내속했다. 뒤에 감무를 두었다. 가야산이 있다’고 나온다.

서산 가야산은 서쪽은 서해, 동쪽은 평야로 물산이 풍부해 예로부터 부자가 많았다.

백제의 미소 마애삼존불이 바로 위에 있어

이 지역이 불교가 번창한 지역이라는 사실은 주변 산들의 명칭에서도 잘 드러난다. 가야산 윗자락 능선이 상왕산이다. 일부 문헌에서는 가야산의 옛 지명이 상왕산이라고 하지만 그건 아니고 가야산보다 조금 위에 있다. 상왕은 불교 <열반경>에 따르면 부처를 의미한다. 따라서 자연히 부처가 설법한 장소의 이름을 따와 가야산이라 칭했고, 부처를 의미하는 상왕을 따와 바로 위의 산을 상왕산이라 했을 가능성이 높다. 상두산이나 상왕산도 마찬가지로 십중팔구 불교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보면 틀림없다. 지금 개심사나 서산 마애삼존불이 상왕산 언저리에 있다.

불교의 번창은 곳곳에 제작된 마애불과 불상의 유적으로 알 수 있다. 백제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는 ‘백제의 미소’로 불리는 국보 제84호 서산 마애불삼존불상은 백제 마애불상의 백미이자 현존하는 최고의 마애불로 평가받는다. 또한 원효가 중국 가는 길에 들렀다는 원효굴과 원효암·의상암 터, 원효봉도 지금까지 남아 있어 가야산의 주요 볼거리다. 옛날에는 대진을 통해 중국으로 가는 길이 가장 일반적이었고, 최단거리로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 들어서 가야산은 명확히 명산으로 나타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충청도 해미현에 ‘상왕산은 여미현 동쪽 4리에 있고, 가야산은 현 동쪽 11리에 있는데, 상왕산과 서로 연해 있다’고 설명한다. <세종지리지>에도 ‘가야산은 덕산에 있고, 상왕산이 진산이고, 모두 사전祀典에 올라 있다’고 나온다. 국가 주도적으로 산신제나 기우제를 지내던 산이라는 의미다.

실학자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지리전고 산천의 형승에도 ‘해미의 가야산은 상왕산과 서로 연해 있고, 동쪽 가야사가 있는 동학洞壑(동굴과 계곡)은 곧 옛날 상왕의 궁궐이 있던 곳이다. 서쪽에 수렴동이 있는데 산악과 폭포가 매우 기묘하다. 북쪽에 강당동·무당동이 있는데 수석이 또한 아름답다’고 <택리지>와 비슷한 설명을 하고 있다.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은 가야산 자락에 상왕의 궁궐이 있었다는 것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상왕은 백제의 후예이고, 가야산이 상왕국의 옛 도읍이라고 한다. 전설의 진위여부를 차치하고서라도 무너진 보루와 망가진 성채는 산마루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현장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상왕의 전설은 후대의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고, 사실은 부처를 상징하는 의미로 명명됐을 수 있다.

서산 가야산과 관련한 가장 명망 있는 인물로는 신라 말기 최고의 천재라고 불리는 고운 최치원이다.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관리를 하다 귀국한 뒤 무너져가는 신라를 개혁하기 위한 노력이 실패하자 중앙에서 물러나 서산 태수로 발령받아 낙향한다. 최치원은 서산 태수로 2년여 간 지내며 흔적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16세기 후반에 제작된 <동람도>에도 가야산이 명확히 표시돼 있다. / <산경표> 금북정맥에 가야산에 포함돼 있다.

조선 중기 백담 구봉령도 서산 가야산을 빛낸 인물 중의 한 명이다. 백담은 이황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했으며, 기대승에 비견될 정도로 시문에 뛰어난 인물이다. 그가 쓴 <백담집>에 가야산 관련 칠언절구와 칠언율시를 남겼다. 칠언율시로는 ‘次洪州軒韻送州牧崔復初別차홍주헌운송주목최복초별’이란 제목이 있다.

‘가야산 푸른 빛 기둥 밖에 가득하고 倻山翠拂軒楹外

불어난 바다 물빛 책상 앞에 어른거리네 漲海光吹几案前

공사 적어 송사하는 뜰에 풀 우거지니 草滿訟庭公事少

술 가운데 즐거움은 청주와 탁주라네 酒中歡趣聖和賢’

나중에 영의정을 지낸 목사 최복초를 전별하는 아쉬움을 달래며 지은 시인데, 탁주와 청주를 예찬한 구절이 재미있다. 하긴 당시엔 청주와 탁주뿐이었겠지만 비교한 내용은 지금도 읊을 만하다.

가야산 정상에 흉물처럼 우뚝 솟은 송신탑이 있다. 가야산의 서북쪽은 돌산이지만 동남쪽은 토산인데 북쪽 능선에서 내려가고 있다.

원래 당나라 이백이 달 아래에서 혼자 술 마시면서 읊은 감흥을 노래한 ‘월하독작月下獨酌’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 ‘이문청비성已聞淸比聖 복도독여현復道獨如賢’이란 구절이 나온다. ‘청주는 성인과 같다는 말을 들었고, 탁주는 현인과 같다고 말하네’이다. 성인과 현인이 되려면 어느 정도 청주와 탁주를 마셔야 할까.

이와 함께 ‘서산 가는 중에 가야산을 바라보며瑞山道中東望伽倻山’라는 제목의 칠언절구도 남겼다.

‘가야산 푸른 숲이 허공에 떠있고 伽倻積翠浮層空

겹겹 흰 구름이 골짝에 자욱하네 萬疊白雲迷洞壑

신선 길 찾으려 해도 아득히 자취 없으니 欲尋仙路杳無蹤

어떻게 바람에 생학을 타고 오르겠는가 那得天風駕笙鶴’

가야산을 생소를 불다가 학을 타고 승천했다는 전설에 빗대어 노래하고 있다. 그 정도 명산인지는 알 수 없지만 최고의 극찬이다.

 

서산 가야산이 고대문헌뿐만 아니라 16세기부터 발행된 옛 지도에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그 정도면 고대부터 널리 알려진 명산이라는 사실엔 틀림없다.

서산 가야산은 16세기부터 제작된 지도에는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명산이다.

정상 데크 건립 후 금북정맥 등산로 희미해져

지금은 덕숭산과 가야산 일대를 합쳐 지난 1973년 일찌감치 덕산도립공원으로 지정됐다.

덕산은 산 이름이 아니고 덕숭산과 가야산 일대에 있는 덕산의 행정지명을 따서 명명됐다. 등산로는 ▲북쪽 상왕산 자락 개심사나 보원사지 등을 들머리 삼아 능선종주로 길게 가야산을 지나 한치고개를 거쳐 덕숭산 수덕사로 하산하는 방법이 있고 ▲동쪽 덕산면 상가저수지를 기점으로 원효봉~가야산~석문봉~옥양봉을 거치거나 그 역방향으로 원점회귀하는 방법 ▲ 옥계저수지를 기점으로 원효봉 가야산을 거쳐 상가리로 하산하는 방법 등이 있다.

가장 일반적인 등산로는 상가리에서 옥양봉~석문봉~가야산~원효봉을 거쳐 원점회귀로 하산하는 방법이다. 몇 년 전 예산군에서 가야산 정상 데크를 만들면서 금북정맥 능선종주하는 등산로가 데크에 묻혀 버렸다. 그래도 가끔 종주하는 사람이 있긴 하지만 다소 위험하다. 정상에 서면 사방이 확 트여 서해의 노을빛 석양을 만끽할 수 있다. 서산 가야산이 한 해를 보내는 12월의 산인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