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한담】고산스님<쌍계사 조실>
【수행한담】고산스님<쌍계사 조실> - “사리사욕 버리는 공부 참으로 잘사는 인생이죠”- - ‘반드시 이루겠다’마음자세로 한 우물만 파세요 - <약력> ·34년 경남 울산 生 ·48년 범어사에서 동산스님을 은사로 득도 ·61년 고봉스님으로부터 전법게 받음 ·61~69년 청암사·범어사 강사 ·69~75년 법륜사 조계사 은해사 쌍계사 주지 ·75년 조계종 총무원 총무부장 ·78년 제5대 중앙종회의원 ·79년 경남도정 자문위원(現) ·84년 조계종 제13교구 본사 쌍계사 주지 경남 울주군 상북면 천전리 428번지에서 자란 나는 13살때 부친의 손을 잡고 양산 통도사의 구하(九河:1872∼1965)스님을 친견하러 갔어요. 출가할 뜻을 말했으나 구하스님은 ‘좀더 크거든 오너라’ 하셨어요. 1개월후 이번에는 범어사로 출가하고자 동산(東山:1890∼1965)스님을 친견했어요. 그때 동산스님은 ‘진작 오지 왜 인제 왔냐’ 하셨지요. 당시에는 입산하면 돌아가신 어머님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범어사에서 약 6개월간 행자생활을 했어요. 이듬해 해방되던 해 고향친구들을 만나 ‘세속 공부를 더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에 넘어가 3·4개월 정도 부산에서 기술을 배우기위해 시계방 양복점 책방 조선소 등지에서 안해본 일이 없었어요. 물론 적성이 맞지 않았던지 다시 절로 되돌아왔지요. 은사이신 동산스님은 조석예불에 빠지는 일이 절대 없었어요. 몸이 불편하여 머리를 싸매고서라도 예불에 참석하는 정성을 보이셨어요. 또 대중공양과 마당 청소도 거르지 않고 대중과 함께 하셨지요. 특히 예불 때는 팔상전 나한전 산신각, 심지어는 조왕단에까지 일일이 참배하셨습니다. 동산스님은 백장청규의 ‘일일부작(一日不作)이면 일일불식(一日不食)’이라는 말을 몸소 보여주셨어요. 놀고 먹는 것은 대중은 물론 자신도 좋지 않다는 것을 일깨우셨습니다. 당시 3년간의 행자교육은 엄청나게 혹독한 수행과정이었어요. 처음에는 출가를 잘 허락하지도 않아요. 마치 개를 집에 안 들이려 하는 것처럼 무지막지하게 대하죠. 그래도 발심자가 그 수모를 참고 입산을 하게 되면 감내하기 힘든 시험과정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공양주에서부터 채공(菜供), 나무하기, 밭갈기 등 모든 울력을 하면서 기본교리를 익혀야 해요. 상좌들은 혓바닥 보다 날래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니까 요. 그야말로 할 줄 모르는 것이 없는 만능인이 되어야 사미계를 득(得)할 수 있었으니까요. 밥 짓고 반찬 만들고 장담그기, 예불·염불하고 불공시식, 윗사람 섬기고 아 랫사람 다스리기, 농사짓기, 땔감하기, 예의도덕 익히기 등에 모두 능통해 대 중의 사표가 될 수 있도록 엄격한 수련과정이 있었습니다. 공양간에서는 일류 요리사, 논·밭에서는 신농씨(神農氏; 농업의 시조), 나무 질 할 때는 일류 목수와 나뭇꾼, 염불할때는 예식종장(禮式宗長)이 되어야 했 어요. 이렇게 단련이 될 때 최고의 선사·법사·율사가 될 수 있는 자질이 갖춰진다는 생각에서죠. 당시에는 스님들이 정말 치열하게 정진했지만 요즘엔 사정이 달라요. 내게도 70여명의 상좌가 있었지만 절반이 중도에서 포기했어요. 일도 안하고 배우려 고도 안한다는 거지요. 빨래, 바느질, 청소 등 기본적인 일은 귀찮아하고 어 려운 일은 하지 않으려 해요. 사회가 어지러우니 수행자들도 물이 든 거예요. 세간에 큰 도둑놈, 작은 도둑 놈이 우글 거리듯 절간에도 놀고 먹으려는 사람들이 생긴 겁니다. 정치인 공 무원 서민에 이르기까지 타이틀만 세우려하는 ‘빛 좋은 개살구’식의 풍조 가 생긴겁니다. 아무튼 나는 20세부터 4·5년간 걸망을 짊어지고 전국을 떠돌며 참선만 했어 요. 그때 화두는 ‘이뭣꼬(是甚마)’였어요. ‘나에게 한 물건이 있는데, 머리 도 없고, 꼬리도 없고, 이름도 없고, 문자도 없으며, 앞도 뒤도 없다. 몸뚱아 리를 끌고 다니는 이것은 무엇인가?’ 하는 거였죠. 한번은 통도사와 범어사가 합동방생법회를 할 때였습니다. 법회를 마치고 온 천장 입구에 집합해서 헤어질 때가 되었어요. 그때 택시 잡기가 어려웠는데 경봉(鏡峰:1892∼1982)스님이 먼저 택시를 잡았어요. 그러자 동산스님이 ‘내 가 더 바쁜데!’하시니 경봉스님께서 ‘그러면 먼저 타고 가라’고 양보하셨 어요. 동산스님께서 먼저 택시에 타고 막 출발하려는데, 경봉스님께서 오른 손을 활짝 펴면서 ‘도인의 작별은 이것이야!’하니 동산스님은 주먹을 쥐고 들어 보이며, ‘이거 아느냐?’하셨어요. 그러자 경봉스님은 입을 다물고 묵묵히 딴 곳으로 지나갔습니다. 도인들의 작별인사가 이러했지요. 나중에 생각하니 그 작별인사에는 깊은 뜻이 있었습니다. 경봉스님의 다섯 손가락(五指)은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각자 저 갈대로 간다’는 차별법 문이었고, 동산스님의 주먹은 ‘너와 나의 마음은 하나로서 항상 같이 있 다’는 무차별 법문이었던거지요. 또한 경봉스님이 얼굴을 돌린 것도 여기에 서는 입을 벌리면 벌써 그르치기 때문에 불야타조야타(佛也打祖也打)인 일착 자(一着子)도리인 것입니다. ‘도인(道人)이라야 능지도인(能知道人)이요, 성인(聖人)이라야 능지성인(能知 聖人)’이란 말이 실감났지요. 이 일이 훗날 화두 정진에 큰 전환점이 된 듯 합니다. 그러나 화두 참구를 하면서도 뚜렷한 증험이 없자, 우리나라의 제1대 강백이 셨던 고봉(高峰:1901∼1969)스님을 뵙게 되었어요. 고봉스님께서는 선교양종 을 터득하신 큰 스님이셨죠. 언제나 새벽 3시에 일어나 경을 연구하고 선정 에 들었으며, 학인들을 가르칠 때에는 그 엄격함이 대단하셨지요. 그때 선방 수좌들은 경 공부를 하려는 나를 보고 타락했다고 말했어요. 하지 만 나는 10여년을 스님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공부했어요. 두문불출 하루 3시간씩 잠을 자며 경을 공부했지요. 이런 노력덕택에 나중에는 내게 손가락 질하던 도반들이 예의를 갖추고 경을 물으러 오곤 했습니다. 더구나 나의 화 두 참구도 경학(經學)의 힘을 얻어 새로운 차원으로 접어들었어요. 당시 <화 엄경>을 볼 때는 사·나흘씩 침식(寢食)을 잊고 법열에 빠진 적도 많았어요. 결국 禪과 敎가 둘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지요. 이렇게 경을 공부하다가 우룡스님(학성선원 조실)과 함께 고봉스님으로부터 전강(傳講)을 받고 61년부터 69년까지 청암사·범어사에서 강사를 맡게 되었 어요. 하지만 고봉스님께 전강을 받았지만 참선을 중도에 그만둔 것은 아니었어요. 오히려 화두참구에 큰 도움이 되었어요. 고봉스님 밑에서 경을 배울 때 하루 는 정(定)에 든 상태에서 깨친 바가 있어 무릎을 탁 치고 게송을 읊었지요. 견문여허공(見聞如虛空) 각지담여수(覺知湛如水) 담연허공중(湛然虛空中) 즉견본래인(卽見本來人) 보고 들음이 허공과 같고 깨달아 앎이 담담하기 물과 같다 담담하고 텅빈 가운데에 본래인을 보았도다 이 경지에서는 눈을 감고 있어도 삼천대천세계가 다 보였어요. 그러니 외국 이든 우리나라든, 화주보살의 부엌이든 마음만 먹으면 훤희 보였죠. 고봉스님 께 이 말씀을 드렸더니 ‘공부 더 해라’ 하시더군요. 다시 극락선원의 경봉 스님께 달려갔더니 역시 ‘공부 더 해라’ 하셔요. 경봉스님 말씀이 ‘제8 아뢰야식이 맑아지면 온 세상이 훤히 들여다 보인다’ 하더군요. 이른바 식 광(識光)의 경계였던 겁니다. 그후 다시 두·세 차례의 경계가 더 다가왔어요. 75년 쌍계사 주지 소임을 맡은지 3년째 되던 해 육조금당에서 한번은 정진을 했는데 문득 한 경계가 다가 왔습니다. 그때의 게송은 이러했습니다. 산하대지비로체(山河大地毘盧體) 초목함령석가행(草木含靈釋迦行) 일월성숙제불안(日月星宿諸佛眼) 쌍계유수고산심(雙磎流水고山心) 산하대지는 비로자나불의 법신이며 초목과 함령은 석가모니불의 교화작용이요 일월성숙은 모든 부처님의 눈이며 쌍계의 흐르는 물은 나의 마음일세 다시 10년이 흘러 쌍계사의 서방장을 재건하고 좌선에 들어있는데 또 무릎을 칠 일이 생겼지요. 심행일장몽(心行一場夢) 식심즉시교(息心卽是覺) 몽교일여중(夢覺一如中) 심광조대천(心光照大千) 마음이 행하는 것은 한바탕 꿈이요 마음을 쉰 것이 곧 잠깬 것이로다 꿈과 생시가 한결같은 가운데 마음광명이 대천세계를 비추도다 이 게송을 읊고는 춤을 추며 기뻐했지요. 내 경험으로 볼 때 사미계를 받자마자 선방에 들어가는 풍조는 분명 문제가 있어요. 알아야 면장을 하지요. 교학이 어느정도 기본이 되지 않고는 헛고생 만 하는 수가 많다는 걸 모르는 겁니다. 사교입선(捨敎入禪)이라는 것도 선교 쌍수(禪敎雙修)를 전제로 한 말임을 잘 몰라요. 교학을 제대로만 익히면 참선 수행의 지름길이 되는 겁니다. 8만4천법문이 바로사는 길로 안내하는 뗏목이 되고 가장 빠른 지름길 노릇을 하고 있음을 알아야지요. 선과 교를 분리하는 건 옳지 않습니다. ‘선시불심(禪是佛心)이요 교시불어 (敎是佛語)요 율시불행(律是佛行)이라.’즉 禪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敎는 부 처님의 말씀이요, 律은 부처님의 행이라는 경귀가 있지 않습니까. 마음과 말 과 행동이 따로 논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모름지기 수행자는 마음 씀씀이, 말 한마디, 계행 하나하나가 중생의 사표가 돼야 한다는 뜻입니다. 1976년에는 부천시 원미동에 천막법당을 세웠습니다. 당시 인구수에 비해 교 회가 가장 많던 부천시에, 더구나 유명한 신앙촌이 있던 바로 옆에 법당을 마련한 거예요.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한다고 나름대로 노력을 기울였어요. 당시 30명이던 신도가 3만명으로 늘어나는등 오늘날의 석왕사가 터전을 잡는 밑거름이 되기도 했지요. 그후 중앙포교사가 되면서 부터는 유교 도교 예수교 등을 공부했습니다. 타 종교인과 비교토론도 할 수 있고 일반인들에게 설득력 있는 포교에도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한 거예요. 지금도 신부님과 목사님들과는 자주 토론을 하고 있습니다. 한사람 한사람 희생이 모이면 사회가 절로 건강해지는데 현재 우리나라에는 자기 욕심만 챙기는 풍조가 만연해 있어요. 대통령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요. 집은 없어도 외제차 타고 으시대면 대접받는 허위 의식이 청산돼야 해요. 국민정신부터 달라져야 하는 거예요. 어리석은 마음과 사리사욕을 내던질 때 수행자든 중생이든 모두 이롭게 돼요. 사리사욕 먼저 버리는 사람이 진정으로 잘사는 참인생입니다. 온고지신(溫古知新)의 정신문화를 개발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선진국 대열에 들 수 없어요. 박정희대통령이 새마을운동을 통해 국민정신을 개혁해서 나라 발전이 어느정도 가능했던 예가 있습니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종교가 앞장서야 해요. 모든 종교가 자비와 사랑을 실천 하고 실현한다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없어요. 유교의 윤리도덕과 예수교의 구생천국(救生天國), 도교의 연심정기(練心精氣), 불교의 명심견성(明心見性) 이 다른 것이 아니예요. 자기 자신을 먼저 다스린 후 이웃과 인류를 위해 봉 사한다는 점에서 다를 바가 없어요. 먼저 우리 불제자들이 모범이 돼야 해요. 수행자들은 자신의 생각과 아만을 남김없이 비운 후 불법을 받아들여야 해요. 신도들은 우선 신심을 가져야 합 니다. 믿음이 없다면 염불이든 참선이든, 8만4천 법문과 1만가지 방편, 그리 고 기도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반드시 이루겠다’는 마음으로 한 우물을 파기 바랍니다. 어떤 직업을 가진 사람이던지 한가지 기술을 끝까지 밀고 나간다면 반드시 성공하듯 불법도 이와 같습니다. 한 스승 밑에서 우직하게 배워야 뭐라도 됩 니다. 하나를 선택했다면 꾸준히 끝간데에 도달할 때까지 자신을 채찍질하며 정진하기 바랍니다. 그것이 종교인의 자세인 동시에 생활인의 자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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