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1731

울부짖는 서정 / 송찬호

울부짖는 서정 송찬호 한밤중 그들이 들이닥쳐 울부짖는 서정을 끌고 밤안개 술렁이는 벌판으로 갔다 그들은 다짜고짜 그에게 시의 구덩이를 파라고 했다 멀리서 사나운 개들이 퉁구스어로 짖어대는 국경의 밤이었다 전에도 그는 국경을 넘다 밀입국자로 잡힌 적 있었다 처형을 기다리며 흰 바람벽에 세워져 있는 걸 보고 이게 서정의 끝이라 생각했는데 용케도 그는 아직 살아 있었다 이번에는 아예 파묻어버리려는 것 같았다 나무 속에서도 벽 너머에서도 감자자루 속에서도 죽지 않고 이곳으로 넘어와 끊임없이 초록으로 중얼거리니까 시집『분홍 나막신』,문학과지성사,2016.

♧...참한詩 2021.03.18

한 그루와 자전거 / 허수경

한 그루와 자전거 허수경 저 나무는 한번도 멈추지 않았네 저 자전거도 멈추지 않았네 사람들의 마을은 멈춰진 나무로 집을 짓고 집 속에서 잎새와 같은 식구들이 걸어나오네 멈추지 않는 자전거들의 동심원들은 자주 일그러지며 땅위에 쌓여갔네 나무의 거름 같은 동심원들 안에서 사람의 마을은 천천히 돌아가네 차륜의 부챗살에 한 그루의 그림자를 끼워 넣으며 자전거는 중얼거리네 멈춘 나무 사이에서 멈추지 않는 자전거가 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한 그루와 자전거가 똑같이 멈추는 건 얼마나 어려운가 천천히 멈추면서 한 그루가 되는 것은 얼마나 아려운가 시집 『혼자 가는 먼 집』,문학과지성사, 1992.

♧...참한詩 2021.03.18

우리 / 오은

우리 오 은 괄호를 열고 비밀을 적고 괄호를 닫고 비밀은 잠재적으로 봉인되었다 정작 우리는 괄호 밖에 서 있었다 비밀스럽지만 비밀하지는 않은 들키기는 싫지만 인정은 받고 싶은 괄호는 안을 껴안고 괄호는 바깥에 등을 돌리고 어떻게든 맞붙어 원이 되려고 하고 괄호 안에 있는 것들은 숨이 턱턱 막히고 괄호 밖 그림자는 서성이다가 꿈틀대다가 출렁대다가 꾸역꾸역 괄호 안으로 스며들고 우리는 스스로 비밀이 되었지만 서로를 숨겨 주기에는 너무 가까이 있었다 계간《시인수첩》 2018년 가을호

♧...참한詩 2021.03.18

봄밤 / 김사인

봄밤 김사인 나 죽으면 부조돈 오마넌은 내야 도ㅑ 형, 요새 삼마넌짜리도 많던데 그래두 나한테는 형은 오마넌은 내야 도ㅑ알았지 하고 노가다 이아무개(47세)가 수화기 너머에서 홍시냄새로 출렁거리는 봄밤이다 어이, 이거 풀빵이여 풀빵 따끈할 때 먹어야 되는디,시인 박아무개(47세)가 화통 삶는 소리를 지르며 점잖은 식장 복판까지 쳐들어와 비닐봉다리를 쥐어주고는 우리 뽀뽀나 하자고, 뽀뽀를 한 번 하자고 꺼멓게 술에 탄 얼굴을 들이대는 봄밤이다 좌간 우리는 시작과 끝을 분명히 해야 혀 자슥들아 하며 용봉탕집 장사장(51세)이 일단 애국가를 불러제끼자,하이고 우리집서 이렇게 훌륭한 노래 들어보기는 츰이네유 해쌓며 푼수 주모(50세)가 빈 자리 남은 술까지 들고 와 연신 부어대는 봄밤이다. 십이마넌인데 십마넌만..

♧...참한詩 2021.03.17

죽도록 / 이영광

죽도록 이영광 죽도록 공부해도 죽지 않는다, 라는 학원 광고를 붙이고 달려가는 시내버스 죽도록 굶으면 죽고 죽도록 사랑해도 죽는데, 죽도록 공부하면 정말 죽지 않을까 죽도록 공부해본 인간이나 죽도록 해야 할 공부 같은 건 세상에 없다 저 광고는 결국, 죽음만을 광고하고 있는 거다 죽도록 공부하라는 건 죽으라는 뜻이다 죽도록 공부하는 아이들을 위해 옥상과 욕조와 지하철이 큰 입을 벌리고 있질 않나 공부란 활활 살기 위해 하는 것인데도 자정이 훨씬 넘도록 죽어가는 아이들을 실은 캄캄한 학원버스들이 어둠 속을 질주한다, 죽기 살기로

♧...참한詩 2021.03.10

금호강변

금호강변 바람이 분다 강 한복판 일렬로 죽 늘어선 물결 뒤뚱뒤뚱 몸부림친다 청둥오리 수 천 마리 한꺼번에 물 위로 둥둥 떠올랐다 사라지고 물수제비 떠가듯 연이어 뒤따라오는 저 행렬 좀 봐라 물빛 사이로 담방담방 떠올랐다 사라지는 해질녘 금호강변 둘레길 걷다 텅 빈 나뭇가지 와 앉은 이름 모를 새 한 마리와 무심결에 바라보았다 거꾸로 거슬러 올라오는 마파람에 강물은 그냥 오리발 내밀며 물오리가 되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오가는 사람들은 강물에 물오리 한 마리 없다고 투덜거리며 지나갔다 -2021 시인부락 봄호

♧...발표작 2021.03.10

나무의자

나무의자 물속에 가라앉은 나무의자 하나 미라처럼 등을 바닥에 대고 못 한 모퉁이 조용히 누워있다 지나가다 언뜻 보면 평생 누군가의 엉덩이 치받들고 꼿꼿이 앉아 등받이 노릇만 하고 살다 이제 두 다리 쭉 뻗고 누워 노후를 편히 쉬는 듯한 모양새다 그 자세가 부러웠던지 물오리 떼 간간이 찾아와 근심 풀듯 물갈퀴 풀어놓고 앉아 쉬, 하다 가고 그 소문 들은 물고기들도 어항 드나들듯 시시때때로 와서 쉬었다 가는데, 저 나 무의 자는 더 이상 나무도 아니고, 의자도 아니다 앉으나 누워나, 성당 못 오가는 사람들 쉼터 되어주다 못 속으로 돌아가 못 다 둘러빠지는 그 순간까지 십자가 걸머지고 가는 나 무의 자는 나무로 왔다 의자로 살다 못으로 돌아간 성자 -2021 대구문학 3월호

♧...발표작 2021.03.10

빈집

빈집 내게는 집이 여러 채 있다 그중에 으뜸은 우주宇宙 한 모퉁이 분양받은 몸집 제일 꼭대기 층엔 골방 둘 그 아래층은 초능력 통신망 닥지닥지 붙은 방 다섯 거기서 숨 한번 길게 들이쉬고 내려서면 마주 보고 마음 나누는 방이 둘 그 아래 밥집 한 채 또 그 아랜 똥집 맨 아래층엔 몸종 거처하는 행랑채 둘 휘, 돌아보니 여태 내가 줄곧 거처한 곳은 오감五感 가득 채워진 빈 방 그 사이 아랫목 구둘 꽉 막혔다 설마, 장작불 활활 지펴대면 막힌 구둘 펑 뚫리겠지, 싶어 행랑채 뒤로 돌아들어가 굴뚝 쿡쿡 들쑤시며 간신히 고개 밀어 넣고 슥, 올려다보니 방마다 주인 노릇하던 놈들 뿔뿔이 다 도망치고, 없다 -대구일보2021.2.21

♧...발표작 2021.0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