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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는 덫 / 천양희

시라는 덫 천양희 쓸쓸한 영혼이나 편들까 하고 슬슬 쓰기 시작한 그날부터 왜 쓰는지를 안다는 말 생각할 때마다 세상은 아무나 잘 쓸 수 없는 원고지 같아 쓰고 지우고 다시 쓴다 쓴다는 건 사는 것의 지독한 반복학습이지 치열하게 산 자는 잘 쓰인 한 페이지를 갖고 있지 말도 마라 누가 벌 받으러 덫으로 들어갔겠나 그곳에서 나왔겠나 지금 네 가망은 죽었다 깨어나도 넌 시밖에 몰라 그 한마디 듣는 것 이제야 알겠지 나의 고독이 왜 아무 거리낌 없이 너의 고독을 알아보는지 왜 몸이 영혼의 맨 처음 학생인지

♧...참한詩 2021.02.23

삼류 시인 / 조은길

삼류 시인 조은길 남자에게 끌려간 아이가 사타구니가 만신창이로 찢어진 여자아이가 생피를 쏟으며 죽어가고 있는데 운문 형식 산문 형식 따지며 저 여자아이에 관한 시를 써도 괜찮을까 가난한 비정규직 청년이 안전장치도 없는 컨베이어 벨트에 몸이 끼어 몸이 동강 나 죽었는데 원관념 보조관념 따지며 저 청년에 관한 시를 써도 괜찮을까 쇠창살에 갇힌 닭들이 손톱 발톱 부리를 빼앗긴 수많은 닭들이 밤도 낮도 없이 알을 빼다 살처분되었는데 은유법 환유법 따지며 저 닭들에 관한 시를 써도 괜찮을까 늙고 병든 사람이 자식들에게 폐 될까 봐 말없이 앓다 구더기 밥이 되었는데 비장미 숭고미 따지며 저 구더기 밥에 관한 시를 써도 괜찮을까 행 구분 연 구분 운율까지 딱딱 들어맞는 이런 시를 써도 정말 괜찮을까

♧...참한詩 2021.02.22

빈집 / 김욱진 시인-대구일보(2021.2.21)

오피니언일반 빈집/ 김욱진 기사 입력 : 2021-02-21 14:07:53 최종 수정 : 2021-02-21 14:13 문향만리 세상을 보는 따뜻한 창 대구일보 대구의 변화 혁신을 주도하는 신문 www.idaegu.com Share 내게는 집이 여러 채 있다/ 그중에 으뜸은/ 우주 한 모퉁이 분양받은 몸집// 제일 꼭대기 층엔 골방 둘/ 그 아래층은/ 초능력 통신망 닥지닥지 붙은 방 다섯/ 거기서 숨 한번 길게 들이 쉬고 내려서면/ 마주 보고 마음 나누는 방이 둘/ 그 아래 밥집 한 채 또 그 아래 똥집/ 맨 아래층엔 몸종 거처하는 행랑채 둘// 휘, 돌아보니/ 여태 내가 줄곧 거처한 곳은/ 오감 가득 채워진 빈방// 그 사이/ 아랫목 구둘 꽉 막혔다// 설마, 장작불 활활 지펴대면/ 막힌 굴뚝 펑 뚫..

김욱진 시인 작품 깊이 읽기-2020대구문학12월호

작품 깊이 읽기 / 시 김 욱 진 대표작 씨/시, 앗! 非비 여시아문如是我聞 수상한 시국·1-코로나19 노모 일기·7 나의 문학 자전_김욱진 나의 삶 나의 시 해설_김상환 김욱진 시집 『수상한 시국』에 나타난 다섯 개의 모티프 1958년 경북 문경에서 태어났다. 경북대 사회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2003년 월간〈시문학〉12월호에 시 “도성암 가는 길” 외 2편이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했다. 시집 『비슬산 사계』『행복 채널』『참, 조용한 혁명』『수상한 시국』등을 출간했다. 2018년 제 49회 한민족 통일문예제전 우수상을 수상했고, 2020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을 수혜했다. 2020년 일본 쿠온출판사에서 한영일중 4개 언어로 출간한 전 세계 시인들의 코로나19 공동 시집『地球にステイ(지구에 머물다)』..

저수지는 웃는다 / 유홍준

저수지는 웃는다 유홍준 저수지에 간다 밤이 되면 붕어가 주둥이로 보름달을 툭 툭 밀며 노는 저수지에 간다 요즈음의 내 낙은 저수지 둑에 오래 앉아 있는 것 아무 돌멩이나 하나 주워 멀리 던져보는 것 돌을 던져도 그저 빙그레 웃기만 하는 저수지의 웃음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 긴긴 한숨을 내뱉어 보는 것 알겠다 저수지는 돌을 던져 괴롭혀도 웃는다 일평생 물로 웃기만 한다 생전에 후련하게 터지기는 글러먹은 둑, 내 가슴팍도 웃는다

♧...참한詩 2021.02.16

각축 / 문인수

각축 문인수 어미와 새끼 염소 세 마리가 장날 나왔습니다. 따로 따로 팔려 갈지도 모를 일이지요. 젖을 뗀 것 같은 어미는 말뚝에 묶여 있고 새까맣게 어린 자식들은 아직 어미 반경 안에서만 놉니다. 2월, 상사화 잎싹만 한 뿔을 맞대며 톡, 탁, 골 때리며 풀 리그로 끊임없는 티격태격입니다. 저러면 참, 나중 나중에라도 서로 잘 알아볼 수 있겠네요, 지금, 세밀하고도 야무진 각인 중에 있습니다.

♧...참한詩 2021.02.16

고등어구이 / 임경묵

고등어구이 임경묵 반으로 갈라 소금에 절여놓은 고등어를 팬에 굽는다 데칼코마니 같다 고등어 등에서 푸른 바다가 슬그머니 빠져나와 팬에 지글거린다 기름을 두르지 않았는데도 알맞게 소란하다 혼자 먹어도 좋고 함께 먹어도 좋은, 젊은 날의 어머니는 대설주의보가 내린 그해 겨울 아침에 아궁이 앞에 쪼그려 앉아 오늘처럼 고등어를 굽고 있었어요 이건 그냥 물어보는 건데 그때 왜 어머니는 푸른 고등어가 새까맣게 타는 줄도 모르고 얼굴을 파묻고 울기만 했어요 새봄이 오기 전에 우린 또 어딘가로 이사를 해야 했단다 비릿한 탄내가 어머니의 부엌에 가득하다 가족이라는 그물에 걸려 일생을 퍼덕거리다가 비밀스러운 샘물이 다 말라버리고 푸른 등이 새까맣게 타버린 어머니를 젓가락으로 가르고, 뒤집고, 가시를 발라 그중 노릇노릇 구..

♧...참한詩 2021.02.15

물방울 무덤들 / 엄원태

물방울 무덤들 엄원태 아그배나무 잔가지마다 물방울들 별무리처럼 맺혔다 맺혀 반짝이다가 미풍에도 하염없이 글썽인다 누군가 아그배 밑동을 툭, 차면 한꺼번에 쟁강쟁강 소리내며 부스러져내릴 것만 같다 저 글썽거리는 것들에는 여지없는 유리 우주가 들어 있다 나는 저기서 표면 장력처럼 널 만났다 하지만 너는 저 가지 끝끝마다 매달려 하염없이 글썽거리고 있다 언제까지 글썽일 수밖에 없구나, 너는, 하면서 물방울에 가까이 다가가보면 저 안에 이미 알알이 수많은 내가 거꾸로 매달려 있다

♧...참한詩 2021.02.14

모래 속의 얼굴 / 유홍준

모래 속의 얼굴 유홍준 해운대 백사장 여기저기에 얼굴들이 박혀 있다 지뢰처럼 매설되어 있다 머리통만 내놓고 온몸이 모래로 묻힌 사람들…… 두어 삽 모래 끌어다 얼굴만 묻어버리면 주검― 영락없이 주검이겠다 검은 썬글라스를 끼고 모래 속에 누워 고요히 명상에 잠긴― (오, 주검의 저 평온한 얼굴들!) 올 여름에도 해운대 백사장엔 인산인해, 벌거벗은 비키니 상주들과 문상객들이 어울려 웃고 떠들고 마신다 주검 곁에서 무더기 무더기 평토제 지낸 음식과 술을 나누고 수박을 쪼갠다 어이쿠 이놈의 염천지옥― 잘못 걸어가다간 덜커덩, 주검의 얼굴을 밟겠다 땅 밖으로 불거져나온 주검의 얼굴을 밟고 기절초풍하겠다

♧...참한詩 2021.02.14

멀리 가는 물 / 도종환

멀리 가는 물 도종환 어떤 강물이든 처음엔 맑은 마음 가벼운 걸음으로 산골짝을 나선다 사람 사는 세상을 향해 가는 물줄기는 그러나 세상 속을 지나면서 흐린 손으로 옆에 서는 물과도 만나야 한다 이미 더럽혀진 물이나 썩을 대로 썩은 물과도 만나야 한다 이 세상 그런 여러 물과 만나며 그만 거기 멈추어 버리는 물은 얼마나 많은가 제 몸도 버리고 마음도 삭은 채 길을 잃은 물들은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다시 제 모습으로 돌아오는 물을 보라 흐린 것들까지 흐리지 않게 만들어 데리고 가는 물을 보라 결국 다시 맑아지며 먼 길을 가지 않는가 때 묻은 많은 것들과 함께 섞여 흐르지만 본래의 제 심성을 다 이지러뜨리지 않으며 제 얼굴 제 마음을 잃지 않으며 멀리 가는 물이 있지 않는가

♧...참한詩 2021.0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