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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한 시국3

수상한 시국‧3 김욱진 동계 방학 자가 연수 중 코로난가 뭔가 불쑥 찾아와 현관 문고리 잡고 가는 바람에 우리 부부 자가 격리 중 이제 드디어 올 것이 왔구먼 그러잖아도 각방거처 선언할까 봐 조마조마했는데 눈칫밥 한 그릇 얻어먹고 살기도 쉽잖은 팔자인지 눈만 뜨면 손 씻고 입마개하고 한 끼 먹은 밥그릇 숟가락 젓가락 각자 설거지하고 소독하고 화장실 드나들 땐 변기 거울 빚 갚듯 반질반질 다 닦아 줘야 하고 온종일 건네는 말이라고는 밥 먹자, 라는 한 마디 그마저도 눈치 보며 주고받는 일상 지금, 여기, 나는 자가 수양 중이다 자가, 누구인지 자가, 왜 여기 머물고 있는지 자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나 혼자 조용히 묻고 있는 중 (2020 시산맥 가을호)

♧...발표작 2020.12.12

노모 일기·7

노모 일기·7 김욱진 비슬산 기슭 양동마을 코로나 돈다는 소문에 노인정조차 문 다 걸어 잠그고 골목엔 땟거리 구하러 나온 고양이들만 간간이 돌아다닐 뿐 봄은 와서 개나리 벚꽃 흐드러지게 피었는데 이맘때면 쑥 캐서 장에 갔다 파는 재미가 쏠쏠하셨던 어머니 여차저차 생병이 나셨는지 속앓이를 하신건지 며칠째 먹지도 싸지도 못했다는 전화를 받고 부랴, 응급실로 모시고 가 구순 넘은 노구의 몸속을 면경알처럼 싹 다 훔쳐봤다 밥통 똥통 다 틀어 막혀 온통 의혹 덩어리로 울퉁불퉁 몇 달을 못 넘기실 것 같단다 암울한 그 소식 아랑곳 않고 의사 선생은 곧장 링거 꽂고 한 삼 일 굶으면 다 낫는다는 묘약 처방을 내렸다 암, 그러면 그렇지 구십 평생 병원 밥 먹고 누워 있어 본 적 없는데 내가 무신 코레라 빙이라도 들었나..

♧...발표작 2020.12.05

나가 뭐길래

나가 뭐길래 기사를 봤다 이산가족 상봉 신청했다 탈락한 구순 할아버지 요번엔 내 차롄 줄 알았는데 나보다 더 오래된 나가 더 있었나 보네 나가 뭐길래 별거 아닌 줄 알고 숨겨뒀던 나 어느새 녹이 다 슬어버렸다 나와 나 사이 장벽을 허무는 것도 나였단 말이지 나도 몰래 나를 탓하며 이젠 다시는 속지 말아야지 38선쯤이야 나만 먹으면 언제든 넘어갈 수 있어 이렇게 나를 달래며 살살 나 먹어 왔는데 아직도 나가 모자라 떨어졌다 하니 나를 떨어뜨린 그놈의 나는 먹어도 먹어도 배부른 줄 모르고 나만 맨날 손꼽아 세며 어리광부리는 나가 되고 말았네 저승 가기보다 더 힘들어진 저 북녘 고향 나 하나 더 먹은 형 살아 있다는 소식에 나를 먹고 날을 먹고 꾸역꾸역 살아 있었는데 이제, 나만 같고 떼쓰는 날 몇 날이나 남..

♧...발표작 2020.12.05

거울 보는 새

거울 보는 새 김욱진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는 경구 한 줄 적힌 수돗가 거울 앞 참새 한 마리 날아와 앉아 두리번두리번 살피다 거울 뚫어지라 유심히 들여다본다 여기, 지금, 나는 누구인가 묻고 있는, 참 새는 나를 보더니 놀란 듯 민망한 듯 발가락 오므리고 쫑쫑 수돗가로 걸어가 똑똑 떨어지는 물 한 방울 콕콕 쪼아 먹고 거울 밖으로 훨훨 날아오른다 나는 새다 나는 새다 그러는 새, 나는 새는 수도꼭지만 멍하니 쳐다보다 거울 속으로 돌아갔다 안팎 없는 저, 허공 한 무더기 새는 또 어디로 돌아갔는가 (2022 김명배문학상 작품상, 2023 도동문학 작품상 선정작)

♧...발표작 2020.12.05

非비

非비 김욱진 겉보기엔 이란성 쌍둥이 같고 아니, 지네 발가락 같고 아니 아니, 자물쇠 구멍 비비대는 열쇠 같은데 非는 아니다, 아니다 그런다 관상을 보니 올곧은 성품 타고난지라 아닌 것은 아니다, 딱 잘라 말하는 선비 기질이 있고 때로는 말머리 바짝 달라붙어 은근슬쩍 비비 꼬는 노비 기질도 있어 난데없는 시시비비에 곧잘 휘말릴 거 같다 (혹자는 非가 양비론적이라고 비아냥거리겠지만) 천생 非는 非다 주인 앞에서 바른말만 콕콕하는 비비 새의 양 날개가 똑같아 보여도 오른쪽 날개는 왼 날개로 쓰지 못하고 왼 날개는 오른쪽에 달지 못한다 서로 맞지 않아서 아니다, 아니다 서로 아니다, 라고 하지만 새는 왼쪽 오른쪽 날개 둘이 있어야 날 수 있다 너와 나도 그렇다 둘이 아니다 아니다, 우겨대면서도 하나가 아니다 ..

♧...발표작 2020.12.05

이별하는 새 / 마종기

이별하는 새 마종기 그럼 잘 가요. 가다가 길 잃지 말고 여린 영혼은 조심히 안고 가야 할 곳 잊지 말고 조심해 가요. 길을 잃고 회오리 속을 헤매며 어디로 가야 할지 당황하다가 나는 눈물까지 흘린 적이 있었다. 먼지만 차 있던 도심의 하늘에서는 눈을 떠도 앞날이 보이지 않았다. 어깨를 누르던 창백한 날갯짓도 아무도 비상의 낭만이라 부르지 않았다. 통증을 참던 사이에 길들은 떠나고 가고 싶은 마을은 이미 문을 닫았다. 죽었다 살았다 하는 미망 때문인지 변화무쌍한 한밤의 별에 취해서인지 앞뒤로 찾으며 날아다닌 방탕한 날들이 바로 살아 있는 생의 흔적이란 것을 나는 오래 모르고 비웃기만 했었다. 어느 인연 아래서건 다시 만난다면 그때는 우선 영혼끼리 인사를 나누고 내 숨소리가 편하게 당신께 가는지, 당신의 ..

♧...참한詩 2020.11.30

아버지의 마음 / 김현승

아버지의 마음 김현승 바쁜 사람들도 굳센 사람들도 바람과 같던 사람들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어린것들을 위하여 난로에 불을 피우고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 저녁 바람에 문을 닫고 낙엽을 줍는 아버지가 된다. 세상이 시끄러우면 줄에 앉은 참새의 마음으로 아버지는 어린것들의 앞날을 생각한다. 어린것들은 아버지의 나라다 아버지의 동포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 아버지는 비록 영웅이 될 수도 있지만…… 폭탄을 만드는 사람도 감옥을 지키던 사람도 술가게의 문을 닫는 사람도 집에 오면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의 때는 항상 씻김을 받는다. 어린것들이 간직한 그 깨끗한 피로…… ‘가을’ 하면 ..

♧...참한詩 2020.11.30

거짓말처럼 / 김소연

거짓말처럼 김소연 약국에 갔다 신분증을 내밀고 신원을 입력한 후에 약사는 내게 공적 마스크 3장을 건넸다 손세정제는 없나요 내가 묻자 약사는 대답했다 우리도 구하고 싶습니다 제주도에서 교사가 사망했다고 빌딩 위 전광판에서 뉴스 앵커는 전하고 있었다 마스크를 하고 수업을 하던 초등학교 교사였다 나는 산책이 늘었다 나는 요리가 늘었다 나에게 시간이 너무나도 늘었다 축제가 사라졌다 장례식이 사라졌다 재난영화의 예감은 빗나갔다 잿빛 잔해만 남은 도시가 아니라 거짓말처럼 푸른 창공과 새하얀 구름이 날마다 아침을 연다 나는 창문을 열었다 테라스에서 나팔꽃이 손이 뻗어 코스모스를 감고 있었다 황조롱이가 나타나 앞집 지붕 위에 앉아있었다 뭄바이에 나타난 홍학과 함께 레인섬에 나타난 바다거북이와 함께 산타아고에 나타난 ..

♧...참한詩 2020.11.26

김욱진 4시집 수상한 시국

김욱진 시집 수상한 시국 1958년 경북 문경에서 태어났다. 경북대 사회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2003년 월간〈시문학〉12월호에 시 “도성암 가는 길” 외 2편이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했다. 시집『비슬산 사계』『행복 채널』『참, 조용한 혁명』등을 출간했다. 2018년 제 49회 한민족 통일문예제전 우수상을 수상했고, 2020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을 수혜했다. 2020년 일본에서 한국어 영어 일어 중국어로 번역 출판된 전 세계 시인들의 코로나19 공동 시집『地球にステイ(지구에 머물다)』에 “노모 일기·7”이 선정 수록되었다. 한국문인협회 달성지부 회장을 역임했고, 현재 경북여상 교사로 재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