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非비

非비 겉보기엔 이란성 쌍둥이 같고 아니, 지네 발가락 같고 아니 아니, 자물쇠 구멍 비비대는 열쇠 같은데 非는 아니다, 아니다 그런다 관상을 보니 올곧은 성품 타고난지라 아닌 것은 아니다, 딱 잘라 말하는 선비 기질이 있고 때로는 말머리 바짝 달라붙어 은근슬쩍 비비 꼬는 노비 기질도 있어 난데없는 시시비비에 곧잘 휘말릴 거 같다 (혹자는 非가 양비론적이라고 비아냥거리겠지만) 천생 非는 非다 주인 앞에서 바른말만 콕콕하는 비비 새의 양 날개가 똑같아 보여도 오른쪽 날개는 왼 날개로 쓰지 못하고 왼 날개는 오른쪽에 달지 못한다 서로 맞지 않아서 아니다, 아니다 서로 아니다, 라고 하지만 새는 왼쪽 오른쪽 날개 둘이 있어야 날 수 있다 너와 나도 그렇다 둘이 아니다 아니다, 우겨대면서도 하나가 아니다 좌우간에..

꿀밤을 맞았다

꿀밤을 맞았다 소슬바람 부는 참나무 아래서 꿀밤을 줍다 꿀밤을 맞았다 우연히 다람쥐와 눈 딱 마주쳤다 놀란 듯 반가운 듯 나는 다람쥐 몰래 꿀밤을 연신 호주머니에 주워 넣었고 다람쥐는 나 몰래 호비작호비작 그걸 땅속에 파묻었다 그 이듬해 봄 무심코 참나무 아래 가봤더니 야린 참나무 새순들이 키 재기 하며 쏙쏙 올라오고 있지 뭔가 다람쥐는, 참 나무 주인 노릇 톡톡 나는, 헐 이순에 꿀밤 맞을 짓만 잘잘

마음 녀석

마음 녀석 늘 분주하다 역마살이 끼었는지 밤낮 어딜 그리 돌아다닌다 이놈아, 밥값 내놔라 빈둥빈둥 놀고먹지만 말고 툭하면, 욱하고 뛰쳐나가는 녀석 버르장머리 뜯어고치겠다고 덩달아 버럭 화를 내다보면 고놈의 성질머리는 오간 데 없고 내 빚만 덩그러니 남는다 다시는 속지 말아야지 어딜 가서 도둑질하든 굶어 죽든 그냥 내버려 둬야지 썩어 문드러질 때까지 하, 고놈의 생각 귀신처럼 딱 달라붙어 날 요리조리 잘도 부려먹는다 나도 아닌 나를 나라고 우겨대는 고 녀석, 빚은 누가 다 갚을꼬

여시아문如是我聞

여시아문如是我聞 옥상 고무 다라이에다 고추 모종을 옮겨 심다, 문득 잡초 같은 생각 한 포기 불쑥 뽑아냈더니 지금, 누가, 여기까지 와서 주인 행세 하냐고 고추가 맵싸하게 호통을 쳤다 봐라, 잡초 없는 세상, 어디 있더냐 나는 너의 잡초 너는 나의 잡초 산전수전 다 겪으며 뿌리내리고 주렁주렁 자식 낳고 잠시 더부살이하다 떠나가는 이 마당 참 주인은 흙 한 무더기요 공기 한 숨이요 햇빛 한 줌이요 물 한 모금이요 저토록 무심히 베풀고 돌아가는 허공 보살님들께 경배하시라 고추는 고사하고 풀 한 포기 없을 터 우주 한 모퉁이 나라고 우겨대는 자 누구인가 초라한, 너무도 초라한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환幻이라는 갑

환幻이라는 갑 어느새 환갑, 저 갑 속에는 무수히 많은 창과 방패가 숨어 있다 가까스로 예까지 와 닿은 모순 같은 것 강산이 여섯 번 바뀌고도 남은 나의 흔적 같은 것 툭, 건드리고 지나간다 허리춤까지 통깁스한 여섯 살배기 외아들 내민 창을 등에 업고 부산 대청동 산꼭대기 달동네 가파른 계단 숨 가쁘게 오르내리며 삼 년을 하루같이 병 수발한 어머니는 방패가 되셨다 아버지 일찍 여읜 열다섯 소년의 복받친 서러움도 병아리 같은 자식 남매 두고 암 선고받은 쉰의 그늘도 더부살이하는 그림자처럼 짙게 드리워진 나의 창과 방패 산 넘고 물 건너 돌고 돌아온 갑의 나를 명줄처럼 붙들고 나는 다시 갑 속으로 들어가 창이 되고 방패가 된다 창이 방패가 되고 방패가 창이 되는 순간 갑도 을도 아닌 나는 병이었다 나의 귓속..

고백

고백 나는 다리가 짝짝이다 한날한시에 태어난 쌍둥이처럼 만나 잉꼬부부처럼 서로 보듬고 감싸며 못내못내 붙어 지내던 두 다리 언제부턴가 왼 무릎에서 삐거덕삐거덕 소리가 났고 그 소릴 들을 때마다 오른 무릎은 속이 새카맣게 타들면서도 괜찮아, 괜찮아 내가 한 걸음 더 힘주어 걸으면 돼지 뭐 너는 그냥 사뿐사뿐 발만 떼, 걸음마 하듯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울퉁불퉁한 세상 절룩거리며 산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주인은 양쪽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음지가 된 왼 무릎은 점점 소심해졌고 양지가 된 오른 무릎은 불끈 튀어나오는 종아리 심줄을 내려다보며 시나브로 짜증을 냈다 60년 남짓 이 땅 위에 발 딛고 함께 울고 웃고 부대꼈던 나의 양다리는 어느덧 짝짝이 되어 있었다 멀쩡해 보이는 눈도 귀도 그랬다

디스크

디스크 판이 다 망가졌다는 소리에, 윽! 얇고 동글납작한 그 판이 망가졌다 말이지 그토록 물러빠진 것이 단단한 척했단 말이지 뼈마디 사이로 새 나간 소문은 카톡을 타고 삽시간에 번져 판은 커질 대로 커졌다 그냥 달래고 어르며 살아야 한다는 보수파와 새 걸로 갈아 끼워야 한다는 진보파 사이 탈출한 추간판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판 중심이 흔들릴 때마다 휘는 허리 꽉 부둥켜안고 몸부림쳤을 거다 판도 아닌 판에 휘둘려 제자리로 돌아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터 살도 뼈도 아닌, 물렁뼈 오도독오도독 씹고 지나간 세월만큼이나 짓물러 이젠 그마저 도려내야 할지 덩달아 짓물러버려야 할지 판가름내야 할 순간 엉거주춤 걸친 양다리 저려온다

암, 글쎄

암, 글쎄 비슬산 오르다 우연히 암을 발견했다 등허리 쿡쿡 쑤신 그날 찍은 스냅사진 꼼꼼히 판독해 보니 곳곳에 화강암이다 암 중에서 제일 흔한 암 치밀어 오른 화를 삭이지 못해 생긴 암덩어리들이 몰래 계곡에 모여앉아 계추를 한다 그래서 암계 아니 암괴라 했던가 아니아니 안개처럼 스멀스멀 기어 내려오다 올망졸망 굳어진 암의 전이를 한눈에 다 보는 듯 불화살을 맞은 듯 온몸에 검은 세포가 점점이 박혀있다 얼굴색이 희읍스름하다 암 진단서처럼 빼곡 적혀있는 팻말엔 분명 비슬산 ‘암괴류-돌 너덜겅’이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돌강과 애추라는 암 투병 중인 내게로 처방전이 전송되었다 화를 내면 낼수록 암 세포는 더 잘 번진다는… 암, 글쎄

적선

적선 내게 허리 디스크가 찾아왔다 반갑잖은 손님이다 주소 이름 생년월일 전화번호 그 무엇도 알려준 적 없는데 용케도 찾아왔다 여섯 달째 비좁은 방에서 같이 먹고 자고 뒹굴며 지내고 있다 저려 오는 다리 끌고 허리 굽혀 가며 여태 누구에게도 베풀지 못한 적선을 나는 지금 한꺼번에 다 하고 있다 이 세상 산전수전 다 겪은 저들이 제자리로 돌아가지 않는 이유를 조용히 물으며 한겨울 밭모퉁이 엉거주춤 서 있는 바람 든 무 물끄러미 바라보는 저녁, 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