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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 일기․2

교단 일기․2 숙직하는 어느 여름밤 벽시계는 초저녁부터 똑딱똑딱 코 고는 소리가 왜 그리도 얄밉게 들리는지 한잠 든 벽시계 고대로 움켜쥐고 밖에다 몰래 내놓고는 잠을 다시 청하는데 난데없이 모기 한 마리 왱왱 숙직은 제대로 안 하고 잠만 잘 궁리하느냐며 빈정거린다 그 소리가 또 귀에 거슬려 불 환히 켜두고 자정이 넘도록 엎치락뒤치락 불침번 서고 있는데 모처럼 숙직 같이하는 선배 선생님 오늘 밤 숙직은 저 녀석들이 안팎으로 다 해주니 우린 마음 놓고 잠이나 푹 자자며 전깃불 좀 꺼 달라 그러시지 뭔가

교단 일기․3

교단 일기․3 습은 참 무서운 거다 교단생활 33년을 하고 나온 지 어언 3년째 집에서 뾰족이 할 일은 없고 익힌 거라곤 접장 노릇 한 일밖에 없으니 그것도 큰 보람이라고 습관적으로 옷 단정히 차려입고 구두끈 매고 현관문 CCTV에 출근 눈도장 찍고 아파트 화단 앞 꼿꼿이 지키고 서서 등교한 아이들 출석 체크하듯 나무 이름 꽃 이름 일일이 다 불러보는 거다 성도 이름도 모르고 지나쳤던 꽃과 나무들 물 주고 거름 주고 벌 나비 날아들 땐 사진도 찍어주고 눈 마주칠 적마다 이름 한 번 더 불러주고 어깨도 톡톡 두들겨주고 진작 이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수업 시간 조는 아이도 없고 인기도 쑥쑥 올라갔을 텐데

나가 뭐길래

나가 뭐길래 기사를 봤다 이산가족 상봉 신청했다 탈락한 구순 할아버지 요번엔 내 차롄 줄 알았는데 나보다 더 오래된 나가 더 있었나 보네 나가 뭐길래 별거 아닌 줄 알고 숨겨뒀던 나 어느새 녹이 다 슬어버렸다 나와 나 사이 장벽을 허무는 것도 나였단 말이지 나도 몰래 나를 탓하며 이젠 다시는 속지 말아야지 38선쯤이야 나만 먹으면 언제든 넘어갈 수 있어 이렇게 나를 달래며 살살 나 먹어 왔는데 아직도 나가 모자라 떨어졌다 하니 나를 떨어뜨린 그놈의 나는 먹어도 먹어도 배부른 줄 모르고 나만 맨날 손꼽아 세며 어리광부리는 나가 되고 말았네 저승 가기보다 더 힘들어진 저 북녘 고향 나 하나 더 먹은 형 살아 있다는 소식에 나를 먹고 날을 먹고 꾸역꾸역 살아 있었는데 이제, 나만 같고 떼쓰는 날 몇 날이나 남..

도동서원 은행나무님의 말씀-속미인곡 풍으로

도동서원 은행나무님의 말씀 -속미인곡 풍으로 삼 년 만에 그분 만나 뵈러 갔더니 수상한 이 시국에 어인 일로 예까지 발길이 닿았는고 죽지 않고 살아 있으니 또 보는구먼 몇 해 전 시화전 한다며 와서 내게 꾸벅 절하고 막걸리 한 사발 부어주길래 자네 얼굴 유심히 봐 두었네그려 낙동 칠백 리 강줄기 따라 사백 성상 한 곳에 뿌리내리고 살다 보니 정신줄만은 놓지 않고 올곧게 살아 있다네 그날, 내 말과 내 생각 고대로 받아 적은 자네 시를 골똘히 읽은 기억 아직도 생생하네 이곳 들르는 이들은 하나같이 뭔가 있는가 싶어 찾아와 뱀 허물 같은 내 껍데기만 실컷 쳐다보고 간다네 여기, 지금, 누가 서 있는가 어릴 적 나는 소학 책만 읽고 다녀 소학동자라 불렸다네 그 소학이 무럭무럭 자라 한훤당이 되고 주렁주렁 매달..

풍문으로 들었소

풍문으로 들었소 비슬산 참꽃 시화전 참꽃을 따 먹어 본 사람들은 다 왔더라 시는 뒷전이고 행간으로 막 터져 오르는 꽃숭어리 눈요기하듯 그림만 힐끗 참, 참꽃 그림 기막히게 잘 그렸더라 풍문으로 들었소 참꽃은 오가는 길을 막고, 기를 막고 그림처럼 기막히게 피려고 몸부림치더라 몸부림치더라, 는 소문마저 소쩍이는 소쩍소쩍 울음으로 전하더라 그 울음, 고불고불 고개 넘을 적마다 하늘다람쥐는 땅 짚고 오도카니 서서 입맛만 쪽쪽 다시더라 그게 다 시더라, 그림이더라 평생 방아 찧고 살아온 방아깨비도 고개를 끄덕끄덕 허기진 벌 나비는 참꽃 술에 목축이더라 참꽃 전 부치는 포차 한 모퉁이서 딸꾹질하는 시인들 술잔에 푹 빠져 시는 그림의 떡이라고, 앵앵거리더라 봄바람 살몃 시 한 구절 애절히 읊고 가는 사이 기막힌 시..

감천 벽화마을

감천 벽화마을김욱진 산만데이 그림 한 폭 걸렸습니다아직도 피난민들로 북적였습니다 마을 입구 작은 박물관 들어서니 닥지닥지 붙은 판자촌 앞에서이산가족 찾는 눈빛들로 뒤엉켰습니다밀물에 밀려와 그냥 무질고 살다물때 놓쳐버린 달동네 오롯 걸렸습니다 빛과 어둠 어우러져 빚은 달그림자도 오붓이 걸렸습니다그때 그 시절 고대로 붓질했습니다벽이란 벽은 온통 그림으로 허물었습니다 지붕은 알록달록 화장을 했습니다 천지개벽입니다눈 깜빡할 사이 미로 속으로 빠져들어 길 잃었습니다 앞집은 뒷집에 햇빛을 가리지 않았습니다지붕 나직이 이고 선 집들 올망졸망 걸어가는 골목담벼락 타고 거슬러 오르는 어린 물고기들은어미 되어 바다로 헤엄쳐 갔습니다 으슥한 대중목욕탕에 들앉아 묵은 때를 벗기며 얼룩진 나를 디자인했습니다안팎이 간만에 개운했..

무섬마을 가는 길

무섬마을 가는 길 김욱진 시인도 거절도 못 할 21세기 문학 강연 초청을 받고 도리 없이 수도리 무섬마을 가는 길 소낙비 쏟아지는 차창을 내다보며 무섬에 대한 숨은 뜻 골똘히 상상해본다 산골짝에 무슨 섬마을이 있을 리 만무하고 없는 듯 있는 섬 같은 마을이라서 붙여진 이름일까 강물 뺑 둘러싼 마을이라고 뭍섬이라 그러다 혹처럼 딸린 ‘ㅌ’ 거센 댐 물살에 떠밀려가고 무섬이 된 걸까 섬 아닌 뭍을 보고 무섬이라 불러 물이 저절로 돌아나간 걸까 아니면, 그냥 뭍에 폭 가린 섬 같잖은 마을일까 무섬이라 무섬…, 무섬만 자꾸 되뇌다 보니 흥겹게 들썩이는 노랫가락마저 나를 휘돌아 나가고 있었다, 어느새 물 도리도리 돌아나가는 수도리 외나무다리가 굽이굽이 휘어진 내성천 가로질러 건너고 담 너머로 어슴푸레 새어 나오는..

글 도둑

글 도둑 김욱진 올 정초 인터넷 사이트 떠돌다 우연히 오탁번 시인의 '잠지'에 눈이 꽂혀 해탈한 동승처럼 깔깔대고 웃다가 짜릿한 기분 만끽하다가… 정겹기도 하다가 시원하다가 육십 평생 쉬~한 거 요로코롬 짤막하게 내뱉은 말 한꺼번에 다 주워 담다가 따끈따끈 느껴져 오는 오줌발 아, 나도 이런 쉬 한 편 남겨야겠다고 주문을 외듯 '잠지'라는 시를 연신 중얼거렸다 그러고 한 달포쯤 지날 무렵, 까맣게 잊은 오 시인의 '呪文'이라는 시를 용케도 맞닥뜨렸다 내 주문은 무심결에 呪文으로 다시 불붙었다 오만 신 다 불러 술술 풀어놓은 呪文이 어찌도 그리 내 주문과 딱 맞아떨어지던지 주인 몰래 퍼다 내 블로그 참한시 방에 경처럼 걸어놓고 시도 때도 없이 읽었다 글 도둑맞은 오 시인, 그날 밤 내 블로그 감쪽같이 다녀..

거울 보는 새

거울 보는 새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는 경구 한 줄 적힌 수돗가 거울 앞 참새 한 마리 날아와 앉아 두리번두리번 살피다 거울 뚫어지라 유심히 들여다본다 여기, 지금, 나는 누구인가 묻고 있는, 참 새는 나를 보더니 놀란 듯 민망한 듯 발가락 오므리고 쫑쫑 수돗가로 걸어가 똑똑 떨어지는 물 한 방울 콕콕 쪼아 먹고 거울 밖으로 훨훨 날아오른다 나는 새다 나는 새다 그러는 새, 나는 새는 수도꼭지만 멍하니 쳐다보다 거울 속으로 돌아갔다 안팎 없는 저, 허공 한 무더기 새는 또 어디로 돌아갔는가

맨발로

맨발로 초등학교 운동장 가에서 두 꼬마 아이가 미끄럼틀 타고 논다 두 발 벗은 신발도 미끄럼 타고 논다 미끄럼 타고 내려온 여자아이 신발 두 짝 남자아이가 미끄럼틀 위로 힘껏 밀어 올린다 엉덩이 살랑살랑 흔들어대며 미끄럼틀 타고 올라가는 신발 여자아이 손닿을 듯 말 듯하다 다시 미끄러져 내려온다 미끄럼틀 아래서 여자아이 애간장마저 태워 보낸 남자아이 모래 속에다 신발 네 짝 묻어두고 미끄럼틀 타고 올라간다 미끄럼에 푹 빠진 여자아이 남자아이 애간장 태우며 미끄러져 내려온다 미끄럼틀 한가운데서 엉겨 붙은 애간장 네발이 신발처럼 미끄러져 내려온다 미끄러운 줄 모르는 미끄럼틀도, 맨발로 미끄러지는 두 꼬마 아이 애간장 태우며 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