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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욱진 시집『수상한 시국』에 나타난 다섯 개의 모티프 /김상환(시인, 문학평론가)

(작품론) 김욱진 시집『수상한 시국』에 나타난 다섯 개의 모티프 김상환 김욱진 시인은 최근 네 번째 시집『수상한 시국』을 세상에 내어 놓았다. 그의 시에는 책의 첫 장을 넘기면 끝까지 읽게 만드는 재미와 힘이 있다. 일상에서 비롯된 그것은 말의 의미와 무의미 사이에 주어지는 알레고리와 이야기의 힘이기도 하다. 자아와 타자에 대한 시편의 구성은 언뜻 보기에 단순하고 평이하지만 곱씹을수록 의미를 더한다. 참나의 문제가 뒷받침된 때문이다. 하여 “여기, 지금, 나는 누구인가”(『거울 보는 새』)라는 질문은 시란,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과도 통한다. 종교적이라 하기엔 현실적이고 현실적이라 하기엔 종교적인 그의 시는 내 안의 나에 대한 목소리이자 그림자 놀이다. 시집의 [표4]에서 필자는 이렇게 썼..

안녕 / 이승희

안녕 이승희 스페인에서 온 엽서에는 흰 벽에 햇살이 가득했고 맨 마지막 안녕이란 말은 등짐을 지고 가파른 골목을 오르는 당나귀처럼 낯설었다. 내 안녕은 지금 어디 있는가 가만히 몸을 만져본다. 두꺼운 책처럼 아무도 오지 않는 저녁 그 어떤 열렬함도 없이 구석에서 조용조용 살았다. 오늘 내게 안녕을 묻는 이의 이름을 떠올린다. 그에게 수몰된 내 마음 보였던가. 구석에서 토마토 잎의 귀가 오래도록 자란다고 말했던가. 내 몸의 그림자는 구석만을 사랑하는지 구석으로만 자란다는 말을 했던가. 내 안녕은 골목 끝에서 맨드라미를 만나 헛꿈들을 귓밥처럼 파내던 날 죽어버렸다고. 물은 결국 말라서 죽는다고 말했던가. 나는 누군가에게 안녕이란 말을 했던가. 더는 물어뜯고 싶지 않다고 조용히 말했던가. 안녕을 묻는 일은 물..

♧...참한詩 2020.10.24

갈현동 470-1 골목 / 이승희

갈현동 470-1 골목 이 승 희 어둠을 이해하는 건 불빛이다. 그래서 밤새 빛으로 남을 수 있는 거다. 저녁 불빛을 보면 안다. 어떤 사랑도 저보다 아름다운 스밈일 수는 없다. 받아들이면서 비로소 밝아지는 이유들. 불빛이 말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걸 굳이 화해라고, 용서라고 표현할 일이 아니다. 빛 속에서 어둠이 만져지거나, 어둠 속에서 빛이 만져지는 건 다 그런 이유이다. 늙은 불빛 한 점 물처럼 오랜 물길을 흘러 집의 지붕을 적시고 사람의 집은 이제 물방울 같은 불빛 하나하나로 도랑을 이루며 흘러간다. 서둘러 불을 켜는 사람을 보면 눈물 나게 고맙다. -시와 사람 2006년 가을호

♧...참한詩 2020.10.24

집은 없다 / 이승희

집은 없다 이승희 길도 집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문득 길 위에 서 있을때 들었습니다. 거울을 닦듯 이 길을 닦으면, 길은 어느새 목판화 속의 작은 집으로 나를 데려갑니다. 공기의 빈곳으로 가득히 연기를 채우며 꽃 피는 집은 또다른 꽃씨를 품고 있을 것입니다. 목판화 속의 집으로 들어갈 수는 없지만 목판화 속의 집을 불러낼 수는 있지요. 싸리나무 대문에 널린 옷을 보아도 알 수 있지요. 거기가 내 옛집이었음을, 그렇게 집은 구름이 뜨거나 지듯 아무데서나 불쑥 생기기도 하고, 다시 맑게 지워지기도 합니다. 집들은 불을 켜고 누군가를 기다립니다. 집은 그렇게 비로소 어둠속에서 제 기다림을 꺼내 보이는 것입니다. 들이 어둠속으로 잠기는 모습을 본 일이 있지요. 잠든 새들과, 잠든 나무와 풀의 씨앗을 품고 아무..

♧...참한詩 2020.10.24

가을 저녁의 시 / 김춘수

가을 저녁의 시 김 춘 수 누가 죽어가나 보다 차마 다 감을 수 없는 눈 반만 뜬 채 이 저녁 누가 죽어 가는가 보다 살을 저미는 이 세상 외롬 속에서 물같이 흘러간 그 나날 속에서 오직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서 애터지게 부르면서 살아온 그 누가 죽어 가는가 보다 풀과 나무 그리고 산과 언덕 온 누리 위에 스며 번진 가을의 저 슬픈 눈을 보아라 정녕코 오늘 저녁을 비길 수 없이 정한 목숨이 하나 어디로 물같이 흘러가 버리는가 보다

♧...참한詩 2020.10.23

연애 외 1편 / 오탁번

연애 오탁번 자가운전하는 예쁜 여자가 내가 달리는 차선으로 얌체같이 끼어들기하고는 차창 밖으로 흔드는 하얀 손을 보면 무 베어먹듯 그냥 한 입 물고 싶다 눈 마주치면 눈흘레나 하고 싶다 뒤에서 들이받을 생각 아예 말고 살가운 접촉사고나 내고 싶다 ㅡ지금쯤 고향의 억새밭 물녘에서는 무지개도 뛰어넘을 만한 힘센 황소가 녈비에 황금빛 털이 간지럽겠디 밤길에 잽싸게 끼어들기하고는 점멸등 깜박이며 달아나는 차를 보면 반딧불이가 반딧반딧 짝을 찾는 것 같다 나도 한 마리 반딧불이가 되어 하늬바람에 공중제비하고 싶다 홰친홰친하는 낚싯대 펴고 동동거리는 형광찌 불빛따라 얄미운 붕어 한 마리 잡고 싶다 ㅡ지금쯤 고향 집 지붕에는 하양 박꽃이 환하게 피어 은하수까지 다 물들이겠다 토요일 오후 토요일 오후 학교에서 돌아온 ..

♧...참한詩 2020.10.20

설날 아침 외 2편 /오탁번

설날 아침 오탁번 마흔아홉 살에 꼭 죽을 줄만 알았다 내가 스무 살이었을 때도 서른 살까지 못살 줄 알았다 아들 낳고 딸 낳고 집장만하고 아내 모르게 슬금슬금 딴 여자도 보며 살던 서른 살의 꼭두새벽에 잠이 깨면 마흔 살까지는 정말 못 넘긴다는 조바심 때문에 목이 말랐다 마흔 살이 되어 한 예닐곱 해쯤 저승길 익히며 덤으로 사는 줄 알았다 흐흐흐 그런데 마흔아홉도 넘기고 오늘이 쉰 살 되는 설날 아침이다 나보다 키가 큰 아들 딸한테 세배받고 떡국 한 그릇 가볍게 비웠다 이 무수한 나날 앞에 놓고 보니 세뱃돈 많이 받은 아린아이처럼 까불고 싶다 고드름 하나 따서 창처럼 들고 골목골목 내달리면서 우리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노래하고 싶다 쉰 살이 된 설날 아침 나는 정말 두렵다 솔잎 추석 송편 솥에 넣을 솔잎..

♧...참한詩 2020.10.20

어머니 독에 갇혀 우시네 / 유홍준

어머니 독에 갇혀 우시네 유홍준 어머니 커다란 독에 갇혀 우시네 엉덩이가 펑퍼짐한 어머니 텅 빈 독 속에 갇혀 우시네 또아리 틀고 들어앉아 우시네 자식을 일곱이나 낳은 어머니 아랫배가 훌쭉한 어머니 배암으로 우시네 두꺼비로 우시네 마른 바람의 혓바닥으로 우시네 텅 텅 독을 빠져나갈 수가 없어서 텅 텅 텅 텅 빈 독 두드리며 우시네 속절없이 먼 하늘 바라보며 우시네 일흔 살 어머니 두드리면 댕그랑 댕그랑 맑은 울음 울리는 빈 독 나, 손마디로 두드리며 묻네 간장 같은 된장 같은 어머니, 거기 계셔요?

♧...참한詩 2020.10.19

법주사 / 안상학

법주사 안상학 구월이던가요 푸른 길을 걸어서 들어갔지요 어디 주막에 들러 막걸리 한 잔 할 만한 얼굴 익은 주모 하나 없는 법주사 푸른 그늘을 걸어 들어갔지요 앞서가는 누군가 팔상전 그 많은 기와 중에는 유독 푸른빛을 띠는 기와가 있다는데 그 기와를 찾으면 극락을 간다고 하는데 혼잣말처럼 그 말을 흘리고 가는 사람은 정작 딴전이고요 뒤에 가던 우매한 중생 하나 그 말을 날름 주워들고서는 극락에 미련이 있는지 어쩌는지 팔상전 기와를 샅샅이 둘러보는데요 헛, 그, 참, 어디에도 푸른 기와는 없고 해서 맥없이 하늘만 멀뚱거리며 쳐다보다가 문득 팔상전 꼭대기 위로 펼쳐진 궁륭의 하늘 그 푸른 하늘 한 장 걸려 있는 것을 보고 아, 글쎄, 무릎을 치며 환호작약하더라니까요 허긴, 극락이 거기 있다는 소문은 벌써부터..

♧...참한詩 2020.10.19

지평선 외 2편 / 유홍준

지평선 유홍준 지평선 위에 비가 내린다 문자로 새기지 못하는 시절의 눈물을 대신 울며 첨벙첨벙 젖은 알몸을 드러낸 채 간다 나는 지평선에 잡아먹히는 한 마리 짐승…… 어디까지 갈래 어디까지 가서 죽을래? 강물을 삼킨 지평선이 양미간을 조이며 묻는다 낡아빠진 충고와 똑같은 질문은 싫어! 있는 힘을 다해 나는 지평선을 밀어버린다 ​ 천령 개오동나무 꽃이 피어 있었다 죽기 살기로 꽃을 피워도 아무도 봐주지 않는 꽃이 피어 있었다 천령 고개 아래 노인은 그 나무 아래 누런 소를 매어놓고 있었다 일평생 매여 있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안 태어나도 될 걸 태어난 사람이 살고 있었다 육손이가 살고 있었다 언청이가 살고 있었다 그 고개 밑에 불구를 자식으로 둔 애비 에미가 살고 있었다 그 자식한테 두들겨 맞으며 사는 사..

♧...참한詩 2020.1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