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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모 일기․8

노모 일기․8 2020년 4월 13일 온 가족 함께 고향 다녀온 그담 날 대구의료원 호스피스 병동 구천302호로 이사를 했다, 어머니랑 손 한번이라도 더 잡아보려고 눈빛 한번이라도 더 마주치려고 말 한마디라도 더 들어보려고 젖 한번이라도 더 만져보려고 서걱거리는 등 한번이라도 더 긁어주려고 무뎌진 손톱발톱 한번이라도 더 깎아주려고 바람 숭숭 드나드는 무릎 한번이라도 더 주물러주려고 쩍쩍 갈라진 발바닥 한번이라도 더 간질여보려고 바짝바짝 말라드는 입술 한번이라도 더 축여주려고 하얀 머리칼 한번이라도 더 빗어주려고 이 다 빠져 합죽해진 미소 한번이라도 더 담아두려고 엄마 냄새 한번이라도 더 맡아보려고 이승에서 한 순간순간이 마지막이라는 생각 문득 스쳐 가는 밤 물 한 모금이라도 더 마시는 거 보려고 염소 똥..

노모 일기․9

노모 일기․9 치매 혈압 당뇨랑 소꿉친구처럼 잘도 지내시던 어머니 이젠 겁도 없이 암까지 데리고 노니신다 호스피스 병동 일주일째 구순 노모는 아기가 되어 기저귀를 차고 시도 때도 없이 오줌을 싸고 온종일 침대에 누워 옹알이를 하신다 간간이 손녀가 와서 까꿍까꿍, 하면 눈 버쩍 뜨고 도리도리, 하면 고개 좌우로 돌리신다 백약이 무효인 노모 손녀 재롱으로 명줄 잇고 계신다

노모 일기․10

노모 일기․10 구순 한 돌을 맞은 삼월 열사흗날, 다 어스러져가는 노구를 끌고 고향집 다녀오셨다 쓸쓸하고도 설레는 마지막 여행이셨다 각처 인연 닿은 절집 둘러보며 시방삼세 제불보살님들께도 두루 인사 고하고 대구의료원 호스피스병동으로 홀가분히 이사 오신 어머니 눈만 뜨면 바라보던 비슬산 문필봉이며 수십 년 정든 이웃 사람들 얼굴이며 택호며 달포 전만 해도 봄나물 캐러 다니던 밭둑길이며 마을회관 앞 느티나무 아래 둘러앉아 쑥떡 해 먹고 쑥덕쑥덕 이바구하던 생각 자꾸만 아른거려 양동 흙집에 데려다 달라고 조르시더니만, 이젠 링거 줄이 명줄인 줄 어렴풋 알아차리셨는지 자나 깨나 나무아미타불만 부르고 계시는데 급기야, 사월 초하룻날 새벽녘 콧속까지 고무호스가 꽂혔다 머리맡에 매달린 산소호흡기에서 쫄쫄쫄 계곡물 ..

노모 일기․11

노모 일기․11 망백의 나를 잡수신 노모 여태 밥심 하나로 무병하셨는데 달포 전 밥줄이 뚝, 끊겼다 십이지장 위장 소장 대장까지 암암리에 줄줄이 사표를 던졌다는 긴급 전언이다 양팔엔 링거 줄 주렁주렁 매달렸고 코에는 산소호흡기 줄 꽂혔다 똥줄 타는 어머니 오직 남은 줄은 핏물 줄줄 새 나오는 오줌 줄 하나뿐 아야, 아야! 나, 이를 줄 알았으면 진작에 덜 먹고 덜 싸고 너그들 애 덜 먹일낀데…… 급기야, 어머니는 얽히고설킨 줄 하나둘 끊기로 마음을 잡수셨는지 인연 닿은 사람들 일일이 전화해서 미안하다, 고맙다는 말만 연거푸 하시고 아야, 아야…… 이게 다 빚이야, 빚 몸뚱어리 꽂힌 줄마저 다 빼야겠다는 무언의 눈빛 말씀은 그래도, 정신 줄 하나만은 놓지 않고 계신 어머니 이보다 더 질긴 명줄이 또 어디 ..

노모 일기·12

노모 일기·12 대구의료원 호스피스 병동 입원한 지 보름째 몸은 야윌 대로 야위어도 정신은 아직 초롱같이 맑아 기저귀에 오줌을 싼다는 거 남 보는 앞에서 소변을 본다는 거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하시는 구순 노모 자신의 치부 다 드러내고 싶잖은 마지막 몸부림일 게다 반은 눕고 반은 앉아서 두 손으로 밀고 두 발로 당기고 온몸을 뒤틀며 어기적어기적 흡사 게 한 마리 언덕배기서 굴러 내려오는 거 같다 열 걸음도 채 안 되는 화장실을 향해 수백 걸음도 더 되는 게걸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떼는 게 저승 가는 길보다 더 멀고 힘겹게 느껴졌으리 천근만근도 더 되는 노구를 끌고 화장실 문턱 넘어설 무렵 게는 휘청 허리를 굽혀 두 손으로 변기통 덥석 잡고 두 다리 부르르 떨며 좌변기 위에다 엉덩이 불쑥 앉혔다 눈 한번 ..

노모 일기․13

노모 일기․13 구천 떠돌다 간간이 돌아와 아야, 아야! 소리만 가느다랗게 들리는 대구의료원 호스피스 병동 구천302호 부처님 오신 날 죽이라도 한 그릇 나눠 먹었으면 참 좋을 법한 오늘 엄마 옆에 누워 있던 할매는 어디로 가셨네 저, 저 갔어…… 어젯밤 평온실로 거는 독방이란다 여보다 방값이 및 배 비쌀 낀데 간다는 얘기도 없이 가뿓다 그 할마씨, 노잣돈 자랑하더니만 거는 깔딱 고개 넘어갈 때 가는 곳이라던데 그나저나 나도 이젠 물 한 모금만 마셔도 다 토하고 배가 아파 똥 눈 지는 달포가 넘었고 그래도 할머니는 아직 말할 힘이라도 좀 있으니 괜찮으신 편입니다 저희 엄마는 말문을 닫은 지 보름이 지났고 항문을 닫은 지는 두어 달이 다 돼가네요 얘깃거리라고는 죽거리밖에 없는 밤 죽이라도 한 숟갈 간신히 ..

노모 일기․14

노모 일기․14 김욱진 내 걱정 하지 마라 너그 잘 지내면 나도 잘 있다 밤낮 내 걱정 마라, 는 말만 입에 달고 계시던 어머니 말문을 닫고도 내 걱정 마라, 는 눈길 틔워두시더니 화장장 도착해서도 내 걱정 마라, 는 말씀만 들렸습니다 화장장 불 지폈다는 빨간불 신호가 들어오는 순간까지 어머니는 오매불망 내 걱정 하지 마라 너그 잘 지내면 나도 잘 있다 고 말씀, 고대로 타들었습니다 내 걱정 하지 마라 지수화풍으로 돌아갔습니다 너그 잘 지내면 나도 잘 있다 한 줌 재로 돌아왔습니다 코로나로 어수선한 세상 불살개가 되신 어머니 갑작스레 군불 지펴 죄스러웠습니다

노모 일기․15

노모 일기․15 엄니, 여기는 아직 코로나로 입마개를 하고 살아요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사회적 거리두기란 말까지 생겨나면서 이승저승간 거리는 눈 깜빡할 만큼 가까워졌어요 엄니, 대구의료원 호스피스 병동 입원하기 전 현풍 백년 도깨비시장 안에 있는 달성군보건소 가서 콧구녕에 갸름한 면봉 줄줄 밀어 넣고 코로난가 뭔가 하는 검사 받으셨잖아요 엄니, 저승 문 들어설 때 거기서는 코로나 검사하지 않던가요 코로나 퍼뜨린 대구 신천지 근처서 이사 왔다고 다시 대한민국 땅으로 돌아가라, 그러지 않던가요 엄니, 백일상 차렸어요 또 어디선가 옹알이하고 있을 젖먹이 젖 한 통 물려줄 요량으로 살아생전 즐겨 드시던 두유 빨대 꽂아 손주들 백날 사진 곁에 놔두고 문득, 나는 코로나가 뭔 줄도 모르고 지난 봄 온 들판 돌아다니..

해설-생활 속에 뿌리내린 언어의 힘 / 황정산(시인, 문학평론가)

생활 속에 뿌리내린 언어의 힘 황정산(시인, 문학평론가) 들어가며 그간 우리 시단은 첨단의 언어를 쫓기에만 열심이었다. 최근의 많은 시들은 세련된 언어와 새로운 표현을 추구하다가 정작 중요한 우리의 삶을 돌아보지 못하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면서 삶이나 생활 등의 용어는 서툰 자기고백의 시에서나 등장하는 한물 간 것이거나 아니면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추상적 주의주장을 하는 생경한 시들의 징표로서 취급되어 왔다. 하지만 삶에서 유리된 시, 생활에 기반하지 않는 예술이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생활에서 유리된 예술이 자신의 역할을 값싼 대중문화에 넘겨주고 있다. 어디서나 들리는 트로트 음악이 우리의 귀를 지배하고 있고, 시라고 하면 지하철 시가 대표시가 되고 있는 것이 지금의..

표4

표4 김욱진의 시는 시의 아름다움이 삶에 든든히 기반을 둔 자기 성찰에서 오는 것임을 얘기해 주고 있다. 누에씨에서 보여주는 시상 전개는 실로 놀랍다. [알→누에→번데기→나방]에서 다시 알로 거듭나는 일련의 윤회 과정을 통해 여기, 지금, 나는 누구인가를 부단히 묻고 있다. “나/방이었다”고 했지만, 그 방 안에는 실상 나도 없고 나방도 없다. 이처럼 김욱진의 시는 깊은 불교적 사유에 연유한 ‘생활 세계의 시학’이라고 일컬을 수 있다. 그의 시들은 시적 언어의 소박하고 진솔한 표현을 보여준다. 이 소박함이 김욱진 시인의 시들의 힘이고 시인의 시적 역량의 요체이다. 그것은 생활 속에 뿌리를 둔 삶의 진정성이 느껴지는 그런 힘이다. 시작과 끝이 하나로 닿아 있는 불교적 ‘생활 속에 뿌리내린 언어의 힘’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