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한 시국

해설-생활 속에 뿌리내린 언어의 힘 / 황정산(시인, 문학평론가)

김욱진 2020. 10. 27. 13:03

생활 속에 뿌리내린 언어의 힘

황정산(시인, 문학평론가)

 

 

들어가며

 

그간 우리 시단은 첨단의 언어를 쫓기에만 열심이었다. 최근의 많은 시들은 세련된 언어와 새로운 표현을 추구하다가 정작 중요한 우리의 삶을 돌아보지 못하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면서 삶이나 생활 등의 용어는 서툰 자기고백의 시에서나 등장하는 한물 간 것이거나 아니면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추상적 주의주장을 하는 생경한 시들의 징표로서 취급되어 왔다.

하지만 삶에서 유리된 시, 생활에 기반하지 않는 예술이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생활에서 유리된 예술이 자신의 역할을 값싼 대중문화에 넘겨주고 있다. 어디서나 들리는 트로트 음악이 우리의 귀를 지배하고 있고, 시라고 하면 지하철 시가 대표시가 되고 있는 것이 지금의 문화적 현실이다. 이렇게 고급문화가 생활에서 유리될수록 우리 문화의 질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김욱진 시인의 작품은 아주 반갑게 다가온다. 그의 시에는 기벽의 언어나 난해한 표현기교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일상에서 마주치는 모든 사물들이 시적 언어로 재탄생되어 나온다. 그러면서도 읽는 사람에게 많은 깨달음과 감동을 준다. 그것은 그의 시가 특별해서가 아니라 사실은 삶속에 깊이 뿌리를 둔 언어들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다.

 

2. 생활의 시학

 

흔히 시인들이 스스로 자신의 시를 시시한 시라는 농담을 자주한다. 시가 세상을 바꾸지도 돈이 되지도 그렇다고 다른 사람을 감동시키지도 못하다는 그런 자조가 이 농담에 들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는 많은 시인들이 오늘도 시를 쓰고 있다. 김욱진 시인의 시를 읽으면 왜 시인들이 시를 써야만 하는지 시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시집 한 권 냈다고

팔십 평생 땅뙈기 일구고 산 오촌 당숙께 보내드렸더니

달포 만에 답이 왔다

까막눈한테 뭘 이래 마이 지어 보냈노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시를, 우린

시래기 국만 끓여 먹고 살아도 배부른데

허기야, 물 주고 거름 주고 애써 지은 거

아무 맛도 모르고 질겅질겅 씹어 봐도 그렇고

입맛 없을 때 한 이파리씩 넣고 푹 삶아 먹으면 좋것다

요즘은 시 나부랭이 같은 시래기가 금값 아이가

이전에 장날마다 약장수 영감 따라 와서

한 많은 대동강 한 가락 불러 넘기고

한바탕 이바구하던 그 여자

시방도 어데서 옷고름 풀듯 말듯 애간장 태우며

산삼뿌리 쏙 빼닮은 만병통치약 팔고 있나 모르것다

그나저나 니 지어 논 시

닭 모이 주듯 시답잖게 술술 읽어보이

청춘에 과부 되어 시집 안 가고 산 아지매

고운 치매 들었다하이

내 맴이 요로코롬 시리고 아프노

시도 때도 없이 자식 농사가 질이라고 했는데

풍년 드는 해 보자고 그랬는데

 

- 『시,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전문

 

시인은 시라고는 생전 접해보지 못한 자신의 친척에게 자신의 시집을 선사한다. 시래기보다 시답지 않은 시 나부랭이가 무슨 소용이냐고 생각을 하지만 그 친척으로부터, 막상 읽어보니 “시리고 아프”게 하는 어떤 힘이 있다는 고백을 듣게 된다. 어쩌면 시가 가진 이런 힘이 시인으로 하여금 시를 포기하지 않게 만들고 있는지 모른다. 사실 김욱진 시인의 시는 바로 여기에 그 시적 성과가 놓여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의 시는 우리의 삶의 현장에 맞닿아 있다. 그래서 논에서 농사를 짓다, 산에 가서 산삼을 캐다, 닭 모이를 주다가 읽어도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시 그리고 그러기 위해 그런 노동과 생활의 현장에서 느끼는 사유와 정서를 진솔하게 표현하는 시가 김욱진 시인에게는 가장 바람직한 시일 것이다.

다음 시에서는 바로 이 점을 재미있으면서도 진지하게 얘기하고 있다.

 

시를 왜 짓는가, 라는 물음에 씨는 그냥

문득 떠오른 누에처럼 시를 짓는다고 실실 얼버무리자

누에는 금세 전생으로 돌아가 알을 슬었고

뭔가를 짓는다는 좁쌀만 한 생각으로

알은 꼬물꼬물 거리기 시작했다

까막눈으로 돌가루 종이 위에 뒹굴다가

평수 넓은 신문지로 이사 와서는

뽕잎처럼 잘게 쓴 시를 다문다문 읽는 기분으로

시상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한 줄 두 줄

행간이 생겼고, 거기에 누워 먹고 싸고 잠자면서도

온몸에 뭔가 허전한 구석이 늘 배어 있음을 절감하고부터

누에는 자나 깨나 오고 가는 길 묻고 물으며

잠잠히 시를 짓기 시작했다

한 잠을 자고 나서는

허기를 참지 못해 뽕잎에만 눈독을 들였다고

두 잠을 자고 나서는

뽕잎에 딸려온 오디 맛을 난생 처음 보았고

어딘가에 뽕나무가 있을 거라는 상상을 하였다고

석 잠을 자고 일어나서는

허구 많은 시상이 눈앞에 아른거려 헷갈리기 시작했다고

넉 잠을 자고 깨어나서는

섶처럼 얼기설기 얽힌 이 세상

나 아닌 나가 없더라고 한 줄 딱 적었다

그 순간, 누에는 오간데 없고

나는 한 마리 번데기 되어

누에가 지어놓은 집 단박에 다 부숴버리고

시 한 수 읊고 돌아가는 나

방이었다

 

- 『누에씨』 전문

 

시인은 자신이 시를 쓰는 태도를 누에가 뽕잎을 먹고 네 번의 잠을 자고 번데기가 되는 과정에 빗대어 쓰고 있다. 시인은 처음에 “신문지”라는 비유에서 알 수 있듯이 세상에 대한 관심과 지식을 향한 목마름 때문에 시 공부를 시작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허기를 채울 수 없어 시인은 누에가 한 잠 두 잠을 자고 나서 뽕잎에 탐닉하듯 시의 언어에 맛을 들인다. 그러면서 “오디 맛을 난생 처음 보”듯 시어의 향기와 맛에 취해보기도 한다. 하지만 누에가 네 잠을 잔 후 비로소 번데기를 거쳐 나방으로 변태하듯 “얼기설기 얽힌 이 세상”을 다시 보고 이제야 제대로 된 시를 쓰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도달한 시인의 모습이 참 재미있다. 시인은 그것을 “돌아가는 나/방이었다”라고 행갈이해서 표현하고 있다. 누에가 “나방”이 되었는데 시인은 “나/방”이 된 것이다. 이것을 통해 시인은 시를 써봐야 결국 “나”라는 자폐적 공간에 다시 돌아온 것뿐이라는 자조와 “방”이라는 삶의 공간에 다시 돌아온 것이 진정한 문학의 자세라는 이중의 의미를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그 방으로 한 걸음만 더 들어가 보면, 시인은 [알→누에→번데기→나방]에서 다시 알로 거듭나는 일련의 윤회 과정을 통해 여기, 지금, 나는 누구인가를 부단히 묻고 있다. “나/방이었다”고 했지만, 그 방 안에는 실상 나도 없고 나방도 없다. 그저 “나” 또는 “나방”이라는 이름만 있을 뿐이다. 쉬운 듯하면서도 결코 가볍지 않은 작품이다.

이렇듯 시인은 시가 어떻게 잉태되는지를 상관적 사유를 통해 조용히 되짚고 있다. 시는 독서량과 문학에 대한 지식과 언어 조탁의 달콤한 아름다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삶에 든든한 기반을 둔 자기 성찰에서 오는 것임을 얘기해 주고 있다. 다시 말해, 김욱진의 시는 깊은 불교적 사유에 연유한 ‘생활 세계의 시학’이라고 일컬을 수 있다. 이러한 미학이 바로 김욱진 시인의 시 특히 이 시집의 실린 시들의 가장 큰 미덕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씨를 통해 잉태한 재미있는 시 한 편을 더 보기로 하자.

 

섣달 그믐밤 연탄 한 장 피워놓고

골방에 누워 감 홍시 하나 물컹 삼켰더니

고놈의 씨가 목구멍에 걸려

넘기지도 토하지도 못하고

밤새 끙끙거리다 시가 되어버렸다

것도 모르고 날로 꼴깍 삼킨 시

명치에 딱 걸려 오도 가도 못하고

고놈의 시를 살려봐야겠다고

용을 쓰고 있는데

새벽녘 안도현 씨가 씨익 웃으며 찾아와

감이 익으면

삼킬 것도 토할 것도 없이

다 시가 된다고 그러지 뭔가

씨가 시가 되는 건 감이라고

죽은 시를 살리는 것도 감

날로 삼킨 시를 푹 삭히는 것도 감

뭣이 죽은 듯 살아 있는 감이라고

설날 아침

제상 맨 앞줄 터줏대감처럼 앉아 절 받는 감

씨가 그랬다

너의 고조모는 성주 이씨, 증조모는 장수 황씨, 조모는 인천 채씨

씨가 뭔 줄도 모르고 시집와서 그냥 씨 뿌리고 산 것도 감이라고

지방문에 걸렸다, 그게 다 시가 되어

불씨처럼 화끈 달아오르면

감은 요리조리 데치고 볶고 삶고

그걸, 다 우려낸 게 시 아니 씨라고 그러지 뭔가

앗!

 

- 『씨/시, 앗!』 전문

 

고통과 성姓의 씨가 시의 기원임을 적시한 시인의 기지機智가 놀랍다. 일상 속에서 먹는 감 홍시의 ‘씨’를 통해 ‘시’를 빚는 힘은 씨/시, 라는 발음의 유사성 내지 언의의 중의적 묘미를 살렸다고 볼 수 있겠지만, 그 ‘감’은 필시 불교적 사유에 기인하고 있다. 목구멍에 걸린 씨가 “밤새 끙끙거리다 시가 되어버”린 순간, 시인은 씨가 곧 시라는 영감을 받는다. 오랜 고뇌와 통찰로 빚어진 물아일체의 순간이다. “씨/시가 무엇인가, 앗!”, 하고 주장자 내리치는 큰스님의 화두처럼 와 닿는다. 시인의 이런 생활의 미학은 현실 세태에 대한 비판과 안목에서 더 큰 설득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편을 갈라 화투를 치다 보면

패가 잘 풀리는 사람과 한 편이 되는 날은

이 눈치 저 눈치 볼 것 없이

그저 푹 무질고 앉아 싸붙이고는 엉덩이만 들썩여도

돈이 절로 굴러들어온다

 

패라는 게 그렇다

꽃놀이패에 걸려

패싸움하다가도

팻감이 없으면

한 방에 패가망신하기도 하고

 

패거리도 그렇다

얼씬 보기엔 반상 최대의 패처럼 보여서

누구나 한 번쯤은

이 패거리 저 패거리 기웃거려 보는 거다

별 밑천 없이 들락날락하기도 편하고

급할 시는 그 패를 마패처럼 내밀어

은근슬쩍 방패막이로 써먹기도 하고

 

팻감이 궁할 땐

이 패에서 저 패로

저 패에서 이 패로

철새처럼 줄줄이 옮겨 다니면서

늘상 화기애애한 척

돌돌 뭉쳐 돌아다니며 놀고먹기엔 딱 그저 그만이다

패가 폐가 되는 줄도 모르고

패거리가 난무하는 세상

 

한구석엔

패도 패거리도 아닌 부패가 암암리 도사리고 있어

나는 일찌감치 문패조차 내걸지 않았다

 

- 『패』 전문

 

시인은 “패”를 다양한 의미로 절묘하게 우려먹고 있다. 화투판에서 부려먹던 ‘패’를 바둑판으로 끌고 와 ‘꽃놀이패’ ‘패싸움’ ‘팻감’ ‘패가망신’이라는 말놀음으로 신나게 즐기는가 싶더니 어느새 그 ‘패’를 마패처럼 내밀어 방패막이로 써먹고 돌아다니는 ‘패거리’ 문화를 통렬히 비판하고 있다. 그 ‘패’가 ‘폐’로 돌변했다. 정신이 번쩍 든다. 시인의 언어 변용 기술은 단순한 말치장이 아니다. 나-사회-종교를 넘나드는 깊은 통찰력과 사회학적 상상력을 기반으로 능란한 언어연금술의 기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그는 동음이의어에 의한 언어의 낯설게 하기를 그의 시에서 자주 활용하고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아래 장에서 좀 더 자세히 얘기하도록 하겠다. 아무튼 시인은 이 ‘패’라는 말을 통해 우리 사회를 어지럽히고 있는 패거리 문화와 문패나 명패로 자신을 치장하는 간판 문화를 비판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비판이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것은 어떤 사회학적 분석이나 문화이론에 기대서가 아니라 화투판이나 바둑판 또는 문패 같은 삶의 현장의 생생한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의 시의 힘은 이렇게 생생한 삶의 현장성에서 기인한다.

다음 시는 바로 그런 현장성의 힘의 정체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옥상 고무 다라이에다

고추 모종을 옮겨 심다, 문득

잡초 같은 생각 한 포기 불쑥 뽑아냈더니

지금, 누가, 여기까지 와서

주인 행세 하냐고

고추가 맵싸하게 호통을 쳤다

 

봐라, 잡초 없는 세상, 어디 있더냐

나는 너의 잡초

너는 나의 잡초

산전수전 다 겪으며 뿌리내리고

주렁주렁 자식 낳고

잠시 더부살이하다 떠나가는 이 마당

참 주인은

 

흙 한 무더기요

공기 한 숨이요

햇빛 한 줌이요

물 한 모금이요

 

저토록 무심히 베풀고 돌아가는

허공 보살님들께 경배하시라

고추는 고사하고 풀 한 포기 없을 터

 

우주 한 모퉁이

나라고 우겨대는 자 누구인가

초라한, 너무도 초라한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 『여시아문如是我聞』 전문

 

‘여시아문’은 나는 이렇게 들었다는 뜻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전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불교 용어이다. 그런데 이 시 안에서 시인이 들은 바는 삶의 현장에서 자신의 손길에 와 닿은 고추와 잡초와 흙과 공기와 햇빛의 가르침이다. 그것들은 자신이 이 세상에 “잠시 더부살이” 하는 “초라한” 존재라는 것을 가르친다. 물론 이런 깨우침은 문명 비판의 시나 목가적인 시들에서는 흔한 시상이긴 하다. 하지만 어쩌면 상투적이기까지 한 이런 시상이 이 시에서는 큰 설득력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바로 그것을 표현하는 시적 언어의 소박하고 진솔한 표현의 힘에서 온다. 그것은 생활 속에 뿌리를 둔 삶의 진정성이 느껴지는 그런 힘이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3. 비틀기의 미학

 

김욱진 시인의 시들에는 현란한 표현이나 난해한 비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의 시들이 단순하고 직설적인 표현으로 이루어진 생경한 작품인 것은 아니다. 그의 시들은 읽는 재미와 말의 묘미를 잘 살리고 있다. 그것은 주로 동음이의어를 통해 말을 살짝 비트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러한 비틀기가 단순한 언어유희에만 그치지 않고 미묘한 의미의 변화를 일으켜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을 떠올리는 인식의 새로운 경지를 열어주곤 한다. 가령 다음 시 같은 경우를 보자.

 

겉보기엔 이란성 쌍둥이 같고

아니, 지네 발가락 같고

아니 아니, 자물쇠 구멍 비비대는 열쇠 같은데

非는 아니다, 아니다 그런다

관상을 보니 올곧은 성품 타고난지라

아닌 것은 아니다, 딱 잘라 말하는 선비 기질이 있고

때로는 말머리 바짝 달라붙어

은근슬쩍 비비 꼬는 노비 기질도 있어

난데없는 시시비비에 곧잘 휘말릴 거 같다

(혹자는 非가 양비론적이라고 비아냥거리겠지만)

천생 非는 非다

주인 앞에서 바른말만 콕콕하는 비비

 

새의 양 날개가 똑같아 보여도

오른쪽 날개는 왼 날개로 쓰지 못하고

왼 날개는 오른쪽에 달지 못한다

서로 맞지 않아서

아니다, 아니다

서로 아니다, 라고 하지만

새는 왼쪽 오른쪽 날개 둘이 있어야 날 수 있다

 

너와 나도 그렇다

둘이 아니다 아니다, 우겨대면서도

하나가 아니다

좌우간에 非는

똑바로 놓고 봐도 非

거꾸로 뒤집어 놓고 봐도 非

둘이 하나다

 

- 『非비』 전문

 

이 시는 한자 “非” 가지고 재미있게 말장난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非” 는 ‘아니다’라는 본래의 의미 말고도 생김새로 봐 지네가 되기도 하고 새의 날개가 되기도 하며 발음을 통해 선비나 또는 전혀 반대편의 노비를 연상하게도 한다. 아무튼 시인은 이 다양한 의미의 언어들을 떠올리게 하여 편을 갈라 시시비비를 우겨대는 이분법적 시각을 비판하면서 이 “非”자가 가지고 있는 균형의 미학을 보여주고 있다. 서로 대립되는 것이 결코 서로 다른 것이 아니고 두 날개로 날아가는 새처럼 균형을 잡는 것이고 앞과 뒤가 그리고 좌와 우가 같듯이 우리는 서로 하나일 뿐이라는 점을 생각하게 해 준다. 언어의 유희가 성찰로 이어지는 멋진 사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다음 시도 역시 이런 말 비틀기를 잘 보여주고 있다.

 

동계 방학 자가 연수 중

코로난가 뭔가 불쑥 찾아와

현관 문고리 잡고 가는 바람에

우리 부부 자가 격리 중

이제 드디어 올 것이 왔구먼

그러잖아도 각방거처 선언할까 봐

조마조마했는데

눈칫밥 한 그릇 얻어먹고 살기도

쉽잖은 팔자인지, 눈만 뜨면

손 씻고 마스크 끼고

한 끼 먹은 밥그릇 숟가락 젓가락

각자 설거지하고 소독하고

화장실 드나들 땐

변기 거울 빚 갚듯

반질반질 다 닦아 줘야 하고

온종일 건네는 말이라고는

밥 먹자, 라는 한 마디

그마저도 눈치 보며 주고받는 일상

지금, 여기, 나는

자가 수양 중이다

자가, 누구인지

자가, 왜 여기 머물고 있는지

자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나 혼자 조용히 묻고 있는 중

 

- 『수상한 시국‧3』 전문

 

이 시는 최근 우리 사회를 크게 뒤흔들고 있는 코로나19에 의한 자가 격리라는 말을 비틀고 있다. 자가 격리를 자가 수양으로 그리고 그것을 다시 “자가”라는 ‘그 사람’을 의미하는 사투리로 표현하여 이 사태가 몰고 온 불행이 결국 나를 돌아보는 계기로 작용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시인은 지금, 여기, 나는 누구인가를 다시 묻고 있다. 사소한 일상이 결코 사소하지 않은 순간이다. 인간 심리와 사회의 관계는 결코 어느 하나로 말할 수 없으며, 자문自問에 자문을 거듭할 따름이다. 이러한 인과 관계를 다음 시에서도 조용히 음미해보자.

 

새는 나를 보더니

놀란 듯 민망한 듯

발가락 오므리고 쫑쫑 수돗가로 걸어가

똑똑 떨어지는 물 한 방울

콕콕 쪼아 먹고

거울 밖으로 훨훨 날아오른다

나는 새다

나는 새다

그러는 새, 나는

새는 수도꼭지만 멍하니 쳐다보다

거울 속으로 돌아갔다

안팎 없는 저, 허공

한 무더기 새는 또 어디로 돌아갔는가

 

- 『거울 보는 새』 부분

 

이 시는 새라는 말을 여러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날아가는 새를 의미하기도 하고 물이 새다, 라는 의미이기도 하고 —하는 사이, 라는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 그러면서 “나는 새다”라는 말 자체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여지를 가지게 된다. 자신이 새처럼 어딘가로 날고 싶은 자유를 꿈꾼다는 말이 되기도 하지만 반대로 새는 수도꼭지처럼 시간만 낭비하며 살았다는 자조의 한탄이 되기도 한다. 이런 다중의 의미 중첩을 통해 시인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인생의 의미를 성찰한다.

 

4. 맺으며

 

김욱진 시인의 시들은 소박하다. 그런데 여기에서 소박하다는 말은 시의 미학적 가공이 덜 되어 있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어쩌면 그 반대로 미학적 가공의 여러 단계를 거쳐 이룩한 표현의 단순성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리고 이 소박함은 삶의 현장과의 생생한 마주침에서 온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것을 이 시집의 4부에 실려 있는 노모일기 연작에서 좀 더 확연히 확인할 수 있다.

 

이승도 저승도 다 내 것으로 보이시는지

담 너머 옆집 애호박도 그저 따오고

간간이 건넛집 밭뙈기 상추며 정구지도 뜯어오고

이 골목 저 골목 떠돌아다니는 욕이라는 욕마저도

버젓이 빈 병이나 비닐봉지에다 다 주워 담아 오고

그렇게 쓸쓸히 주워 모은 하루하루를

금세 잊어버리는 낙으로 살고 계시는데

 

- 『노모 일기·1』 부문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사회적 거리두기란 말까지 생겨나면서

이승저승간 거리는 눈 깜빡할 만큼 가까워졌어요

엄니, 대구의료원 호스피스 병동 입원하기 전

현풍 백년 도깨비시장 안에 있는 달성군보건소 가서

콧구녕에 갸름한 면봉 줄줄 밀어 넣고

 

- 『노모 일기·15』 부분

 

위의 인용한 구절에서는 다소 거칠게 삶의 모습이 그대로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이런 꾸밈없음을 통해 노모의 소박한 삶의 진정성과 그에 대한 시인의 절절한 사랑이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바로 이 소박함이 김욱진 시인의 시들의 힘이고 시인의 시적 역량의 요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시작과 끝이 하나로 닿아 있는 불교적 ‘생활 속에 뿌리내린 언어의 힘’에서 나오는 김욱진의 시 세계는 넓고도 웅숭깊다. 이것이 이 시집의 시작이고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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