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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시창작론 / 오탁번

우리 시대의 시창작론 오탁번 시를 시답게 쓸 것 없다 시는 시답잖게 써야 한다 껄껄껄 웃으면서 악수하고 이데올로기다 모더니즘이다 하며 적당히 분바르고 개칠도 하고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똥끝타게 쏘다니면 된다 똥냄새도 안 나는 걸레냄새 나는 방귀나 뀌면서 그냥저냥 살아가면 된다 된장에 풋고추 찍어 보리밥 먹고 뻥뻥 뀌어대는 우리네 방귀야말로 얼마나 똥냄새가 기분 좋게 났던가 이 따위 처억에 젖어서도 안 된다 저녁연기 피어오르는 옛마을이나 개불알꽃에 대한 명상도 아예 엄두 내지 말아야 한다 시를 시답게 쓸 것 없다 시는 시답잖게 써야 한다 걸레처럼 살면서 깃발 같은 시를 쓰는 척하면 된다 걸레도 양잿물에 된통 빨아서 풀먹여 다림질하면 깃발이 된다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이 된다 -벙그는 난초꽃의 고요 앞에서 『우리..

♧...참한詩 2020.09.25

강인한 시 모음

불은 내게 묻는다/강인한 문밖에 바람이 불고 부드러운 어둠이 이방의 도시를 지나온다. 어디선가 진정한 기도소리가 들린다. 순금의 회상이 시작된다. 소리 없는 폭우 속으로 들이 달리고 촛불 속에 깜박이는 동양의 산문, 내가 읽다 만 문장이 문득 장미의 불에 날개를 적신다. 마음속에 잠들지 못하는 그대 자정의 뒤척임도 사라져 갔다. 내 마음속에서는 이제 아무것도 울지 못한다, 내 마음속에서는. 풀밭에 떨어지는 희미한 별빛 벌레 울음소리마저 깊숙이 파묻히고 한 마디 대지의 흐름을 빌어 불은 내게 묻는다. 안에서 내다보는 캄캄한 혼란과 밖에서 들여다보는 눈부신 질서를. 마음과 마음 사이에 서성거리는 시간의 어두운 그림자, 내 몸 안에 전 생애의 그늘을 던지는 목소리가 들린다. 그림자가 흔들린다. 물속에서 눈 뜨..

♧...참한詩 2020.09.25

시인 지렁이 씨 / 김소연

시인 지렁이 씨 김소연 가늘고 게으른 비가 오래도록 온다 숨어 있던 지렁이 씨 몇몇이 기어나왔다 꿈틀꿈틀 상처를 진흙탕에 부벼댄다 파문이 인다 시커멓고 넓적한 우주에서 이 지구는 수박씨보다 작고, 지구상에서 가장 작은 지렁이 씨의 꿈틀거림도 파문을 만든다 광활한 우주를 지름길로 떠돌다 돌아온 빗방울에는 한세상 무지렁이처럼 살다 간 자들의 눈물이 포함되어 있다 그 눈물이 파문을 만든다 빗방울도 파문을 만든다 이토록 오랜 비도 언젠가는 그치리라 …그러면? 그러면 지렁이 씨들의 꿈틀꿈틀, 생애 전체가 환부인 꿈틀꿈틀 그들의 필적을 바라보겠고, 시 쓸 일이 없겠다

♧...참한詩 2020.09.23

생각의자 / 유계영

생각의자 ​유계영 ​ 불가능해요 그건 안돼요 간밤에 얼굴이 더 심심해졌어요 너를 나라고 생각한 기간이 있었다 몸은 도무지 아름다운 구석이라곤 없는데도 나는 내 몸을 생각할 때마다 아름다움에 놀랐다 나는 고작 허리부터 발끝까지의 나무를 생각할 수 있다 냉동육처럼 활달한 비밀을 간직한 나무의 하반신을 생각할 수 있다 나무의 상반신은 구름이 되고 없다 어떤 나무의 꽃말은 까다로움이다 사람들은 하루를 스물네 마디로 잘라 둔 뒤부터 공평하게 우울을 나눠가졌다 나는 나도 아닌데 왜 너라고 생각했을까 의자를 열고 들어가 앉자 늙은 여자가 날 떠났다 나는 더 오래 늙기 위한 새 의자를 고른다 나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정의를 내리려고

♧...참한詩 2020.09.23

꽃자리 / 고형렬

꽃자리 고형렬 사과를 손에 들고 꽃이 있던 자리, 향을 맡는다 꽃이 피던 자리에는 벌이 와서 울던 소리가 남아 있다 아내에게 미안한 일이다 꽃이 얼마간 피어있던 꽃받침을 아내는 기억 못 한 것 같다 벼껍질로 남은 몇 개 꽃받침은 사과의 배꼽, 오목한 상흔, 낙화보다 슬픈 시간이 갔다 꽃은 자신을 얼마나 애지중지했는가 한 입에 쪽이 지는 홍옥 소년의 향긋함, 해숙씨 사과엄마는 그 연분홍 어린 꽃이 아니었겠니 그리고 어린 그 꽃은 과수의 아이가 아니었겠니

♧...참한詩 2020.09.23

무늬들은 빈집에서 / 이진명

무늬들은 빈 집에서 이진명 언덕에서 한 빈집을 내려다보았다 빈집에는 무언가 엷디엷은 것이 사는 듯했다 무늬들이다 사람들이 제 것인 줄 모르고 버리고 간 심심한 날들의 벗은 마음 아무 쓸모없는 줄 알고 떼어놓고 간 심심한 날들의 수없이 그린 생각 무늬들은 제 스스로 엷디엷은 몸뚱이를 얻어 빈집의 문을 열고 닫는다 너무 엷디엷은 제 몸뚱이를 겹쳐 빈집을 꾸민다 때로 서로 부딪치며 빈집을 이겨 낸다 언덕 아래 빈집 늦은 햇살이 단정히 모여든 그 집에는 무늬들이 매만지는 세상 이미 오랬다

♧...참한詩 2020.09.23

진달래 / 강윤후

진달래 강윤후 진달래는 고혈압이다. 굶주림에 눈멀어 우굴우굴 쏟아져 나온 빨치산처럼 산기슭 여기저기서 정맥 터질 듯 총질하는 꽃 진달래는 난장질에 온 산은 주리가 틀려 서둘러 푸르러지고 겨우내 식은 세상의 이마가 불쑥 뜨거워진다. 도화선 같은 물줄기 따라 마구 터지는 폭약, 진달래 진달래가 다 지고 말면 풍병(風病)든 봄은 비틀비틀 여름으로 가리라.

♧...참한詩 2020.09.23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함 / 김기택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함 김기택 텔레비전을 끄자 풀벌레 소리 어둠과 함께 방 안 가득 들어온다 어둠 속에서 들으니 벌레 소리들 환하다 별빛이 묻어 더 낭랑하다 귀뚜라미나 여치 같은 큰 울음 사이에는 너무 작아 들리지 않는 소리도 있다 그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한다 내 귀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들이 드나드는 까맣고 좁은 통로들을 생각한다 그 통로의 끝에 두근거리며 매달린 여린 마음들을 생각한다 브라운관이 뿜어낸 현란한 피아노 빛 내 눈과 귀를 두껍게 채우는 동야 그 울음소리들은 수없이 나에게 왔다가 너무 단단한 벽에 놀라 되돌아갔을 것이다 하루살이들처럼 전등에 부딪쳤다가 바닥에 새카맣게 떨어졌을 것이다 크게 밤공기 들이쉬니 허파 속으로 그 소리들이 들어온다 허파도 별빛이 묻어 조금은 환해진다

♧...참한詩 2020.09.23

풍장1 / 황동규

풍장1 황동규 내 세상 뜨면 풍장(風葬)시켜 다오 섭섭하지 않게 옷은 입은 채로 전자 시계는 가는 채로 손목에 달아 놓고 아주 춥지는 않게 가죽 가방에 넣어 전세 택시에 싣고 군산(群山)에 가서 검색이 심하면 곰소쯤에 가서 통통배에 옮겨 실어 다오 가방 속에서 다리 오그리고 그러나 편안히 누워 있다가 선유도 지나 무인도 지나 통통 소리 지나 배가 육지에 허리 대는 기척에 잠시 정신을 잃고 가방 벗기우고 옷 벗기우고 무인도의 늦가을 차가운 햇빛 속에 구두와 양말도 벗기우고 손목시계 부서질 때 남몰래 시간을 떨어뜨리고 바람 속에 익은 붉은 열매에서 툭툭 튕기는 씨들을 무연히 안 보이듯 바라보며 살을 말리게 해 다오 어금니에 박혀 녹스는 백금(白金) 조각도, 바람 속에 빛나게 해 다오 바람 이불처럼 덮고 화장..

♧...참한詩 2020.09.23

풍장58 /황동규

풍장58 황동규 달개비떼 앞에서 쭈그리고 앉아 꽃 하나하들 들여다본다 이 세상 어느 코끼리 이보다도 하얗고 이쁘게 끝이 살짝 말린 수술 둘이 상아처럼 뻗쳐 있다 흔들리면 나비의 턱 더듬이 같은 수술! 그 하나에는 작디작은 이슬 방울이 달려 있다 그 뒤로 세상 어느 나비보다도 파란 나비 꽃잎 금방 손끝에서 날 것 같다 그래, 그 흔한 달개비꽃 하나가 이 세상 모든 꽃들의 감촉을...... 상아 끝에서 물방울이 떨어져 풀잎 끝에서 꼭 한바퀴 구르고 사라진다.

♧...참한詩 2020.0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