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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장58 /황동규

풍장58 황동규 달개비떼 앞에서 쭈그리고 앉아 꽃 하나하들 들여다본다 이 세상 어느 코끼리 이보다도 하얗고 이쁘게 끝이 살짝 말린 수술 둘이 상아처럼 뻗쳐 있다 흔들리면 나비의 턱 더듬이 같은 수술! 그 하나에는 작디작은 이슬 방울이 달려 있다 그 뒤로 세상 어느 나비보다도 파란 나비 꽃잎 금방 손끝에서 날 것 같다 그래, 그 흔한 달개비꽃 하나가 이 세상 모든 꽃들의 감촉을...... 상아 끝에서 물방울이 떨어져 풀잎 끝에서 꼭 한바퀴 구르고 사라진다.

♧...참한詩 2020.09.23

자벌레의 귀 / 조창환

자벌레의 귀 조창환 제 깜냥껏 허리를 힘껏 구부렸다 편 자벌레가 나뭇가지 속에서 두런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나뭇가지 속으로 물 흐르는 소리 들리고 찍찍거리는 시계 소리 들린다 마른 풀 향기들이 깃털처럼 가볍게 떠오르는 소리도 들리고 흐른 그늘 밑에 가부좌 틀고 앉아 단전 호흡하는 양철 물고기 숨소리도 들린다 귓바퀴도 없고 귓구멍도 없는 자벌레 귀가 안 들리는 소리를 듣게 된 것은 평생을 오체투지하며 꿇어 엎드려 무릎이 다 닳아 뱃가죽으로 기어가기 때문이다

♧...참한詩 2020.09.19

가을과 슬픔과 새 /신용목

가을과 슬픔과 새 All the faint signs 신용목 슬픔이 새였다는 사실을 바람이 알려주고 가면, 가을 새들은 모두 죽었다, 사실은 흙 속을 날아가는 것 태양이라는 페인트공은 손을 놓았네 그 환한 붓을 눕혀 빈 나뭇가지나 건드리는데, 그때에는 마냥 가을이라는 말과 슬픔이라는 말이 꼭 같은 말처럼 들려서 새들이 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지네 사실은…… 이라고 다른 이유를 대고 싶지만, 낙엽이 새였다는 사실을 바람이 알려주고 가는 가을이라서 날아오르는 것과 떨어져 내리는 것이 꼭 같은 모습으로 보여서, 슬픔에도 빨간 페인트가 튀는데 나뭇가지라는, 생각에 붓을 기대놓고 페인트공은 잠시 바라보네 그러고도 한참을 나는 다리 위에 앉아 있다 이 무렵, 다리를 건너는 것은 박쥐들뿐…… 단풍의 잎들은 어둠 속으로 ..

♧...참한詩 2020.09.19

없다 / 김분홍

없다 ​김분홍​ ​​ ​ 다락방에는 불빛이 없고, 책가방이 없네 다락방에는 종소리 반복이 없고 실내화 발목이 없고 성적표가 없고 청진기 후렴이 없고 교복이 없고 아령이 없네 다락방에는 바구니가 있고 바구니에는 곶감이 있고 곶감에는 감씨가 있고 감씨에는 숟가락이 있고 숟가락에는 감나무가 자라고 감나무에는 감꽃이 피고 감꽃을 줄에 꿰면 목걸이가 되고 목걸이는 개줄, 개줄에 묶인 귀뚜라미가 짖네 아버지를 회상하는 사물들을 열거하면 채워지는 그 무엇, 열거하지 않으면 채워지지 않는 그 무엇이 다락방에는 있지만 없네 있지만 없는 것, 칼날 자국 선명한 책상, 책상에 음각된 어둠이 어둠을 파내며 새겨진 이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이름을 복원했던 목도장 테두리처럼 둥근 주발에는 제삿밥이 없고 그 테두리는 다락방..

♧...참한詩 2020.09.19

수상한 시국 - 김욱진 ■,웹진 시인광장 2020년 9월호 신작시 l 2020, Septemberㅡ통호 제137호 l Vol 137[출처] 수상한 시국 - 김욱진 ■,웹진 시인광장 2020년 9월호 신작시 l 2020, Septemberㅡ통호 제137호 l V..

https://blog.naver.com/w_wonho/222078017516 수상한 시국 - 김욱진 ■,웹진 시인광장 2020년 9월호 신작시 l 2020, Septemberㅡ통호 제137호 l Vol 137 ■ 웹진 시인광장 2020년 9월호 신작시(통호 제137호) 수상한 시국​-코로나19​​​ 김욱진 ​​ 정체... blog.naver.com

32회 정지용 문학상-목도장 / 장석남

목도장 장석남 서랍의 거미줄 아래 아버지의 목도장 이름 세 글자 인주를 찾아서 한번 종이에 찍어보니 문턱처럼 닳아진 성과 이름 이 도장으로 무엇을 하셨나 눈앞으로 뜨거운 것이 지나간다 이 흐린 나라를 하나 물려주는 일에 이름이 다 닳았으니 국경이 헐거워 자꾸만 넓어지는 이 나라를 나는 저녁 어스름이라고나 불러야 할까보다 어스름 귀퉁이에 아버지 흐린 이름을 붉게 찍어놓으니 제법 그럴싸한 표구가 되었으나 그림은 비어있네

흔들리는 것들 / 나희덕

흔들리는 것들 나희덕 저 가볍게 나는 하루살이에게도 삶의 무게는 있어 마른 쑥풀 향기 속으로 툭 튀어오르는 메뚜기에게도 삶의 속도는 있어 코스모스 한 송이가 허리를 휘이청 하며 온몸으로 그 무게와 속도를 받아낸다 어느 해 가을인들 온통 들리는 것 천지 아니었으랴 바람에 불려가는 저 잎새 끝에도 온기는 남아 있어 생명의 물기 한점 흐르고 있어 나는 낡은 담벼락이 되어 그 눈물을 받아내고 있다

♧...참한詩 2020.08.19

그런 저녁이 있다 / 나희덕

그런 저녁이 있다 나희덕 저물 무렵 무심히 어른거리는 개천의 물무늬에 하늘 한구석 뒤엉킨 하루살이떼의 마지막 혼돈이며 어떤 날은 감히 그런 걸 바라보려 한다 뜨거웠던 대지가 몸을 식히는 소리며 바람이 푸른 빛으로 지나가는 소리며 둑방의 꽃들이 차마 입을 다무는 소리며 어떤 날은 감히 그런 걸 들으려 한다 어둠이 빛을 지우며 내게로 오는 동안 나무의 나이테를 내 속에도 둥글게 새겨넣으며 가만 가만히 거기 서 있으려 한다 내 몸을 빠져나가지 못한 어둠 하나 옹이로 박힐 때까지 예전의 그 길, 이제는 끊어져 무성해진 수풀더미 앞에 하냥 서 있고 싶은 그런 저녁이 있다

♧...참한詩 2020.0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