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다
김분홍
다락방에는 불빛이 없고, 책가방이 없네 다락방에는 종소리 반복이 없고 실내화 발목이 없고 성적표가 없고 청진기 후렴이 없고 교복이 없고 아령이 없네 다락방에는 바구니가 있고 바구니에는 곶감이 있고 곶감에는 감씨가 있고 감씨에는 숟가락이 있고 숟가락에는 감나무가 자라고 감나무에는 감꽃이 피고 감꽃을 줄에 꿰면 목걸이가 되고 목걸이는 개줄, 개줄에 묶인 귀뚜라미가 짖네
아버지를 회상하는 사물들을 열거하면 채워지는 그 무엇, 열거하지 않으면 채워지지 않는 그 무엇이 다락방에는 있지만 없네 있지만 없는 것, 칼날 자국 선명한 책상, 책상에 음각된 어둠이 어둠을 파내며 새겨진 이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이름을 복원했던 목도장 테두리처럼 둥근 주발에는 제삿밥이 없고 그 테두리는 다락방에 있지만 없네 아버지를 현재에 고정시키지 못한 그 무엇, 있지만 없네 아버지를 다른 시간으로 이동시킨 그 무엇이 없지만 있네
다락방에는 북극성이 없고 지킬과 하이드가 없네 다락방에는 술병의 솟구침이 없고 낮달의 환멸이 없고 성경책의 논리가 없고 엄마의 잔소리가 없고, 담배의 조언이 없고, 무지개의 오독이 없고 아홉시의 환청이 없고 약봉지의 눈물이 없고 나도 없고 아버지도 없는데 실제로 있어야 할 나도 없고 실제로 있었던 어제의 아버지가 없네 다락방은 있지만 없네 있지만 없는 것처럼, 없지만 있는 것처럼, 다락방은 있지만 없네 모두 떠나고, 없네
계간『포지션』2016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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