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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의 노래 /문태준

여행자의 노래 문태준 나에게는 많은 재산이 있다네 하루의 첫 걸음인 아침, 고갯마루인 정오, 저녁의 어둑어둑함, 외로운 조각달 이별한 두 형제, 과일처럼 매달린 절망, 그럼에도 내일이라는 신과 기도 미열과 두통, 접착력이 좋은 생활, 그리고 여무는 해바라기 나는 이 모든 것을 여행 가방에 넣네 나는 드리워진 커튼을 열어젖히고 반대편으로 가네 이 모든 것과 새로운 대화를 위해 이국으로 가네 낯선 시간, 그 속의 갈림길 그리고 넓은 해풍이 서 있는 곳

♧...참한詩 2020.08.07

귀휴 / 문태준

귀휴 문태준 돌아와 나흘을 매어놓고 살다 구불구불한 산길에게 자꾸 빠져들다 초승달과 새와 높게 어울리다 소와 하루 밤새 게으르게 눕다 닭들에게 마당을 꾸어 쓰다 해 질 무렵까지 말뚝에 묶어놓고 나를 풀밭을 염소에게 맡기다 울 아래 분꽃 곁에 벌을 데려오다 엉클어진 수풀에서 나온 뱀을 따르며 길게 슬퍼하다 조용한 때에 샘이 솟는 곳에 앉아 웃다 이들과 주민이 되어 살다

♧...참한詩 2020.08.07

맹산식당 옻순비빔밥 / 박기영

맹산식당 옻순비빔밥 박기영 식당 문 열고 들어가면 서툰 솜씨로 차림표 위에 써놓은 글씨가 무르팍 꼬고 앉아, 들어오는 사람 아니꼬운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옻오르는 놈은 들어오지 마시오.” 그 아래 난닝구 차림의 주인은 연신 줄담배 피우며 억센 이북 사투리로 간나 같은 남쪽 것들 들먹였다. “사내새끼들이 지대로 된 비빔밥을 먹어야지.” 옻순 올라와 봄 들여다 놓는 사월 지대로 된 사내새끼 되기 위해 들기름과 된장으로 버무려놓은 비빔밥을 먹는다. 항문이 근지러워 온밤 뒤척일 대구 맹산식당 옻순비빔밥을 먹는다. 옻오르는 놈은 사람 취급도 않던 노인은 어느새 영정 속에 앉아 뜨거운 옻닭 국물 훌쩍이며, 이마 땀방울 닦아내는 아들 지켜보고 웃고 칠십년대 분단된 한반도 남쪽에서 가장 무서운 욕을 터뜨리던 음..

♧...참한詩 2020.08.02

돌부리 / 최승호

돌부리 최승호 넘어져도 흙 묻은 손을 툭툭 털고 일어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가던 길을 그냥 가는 사람은 너그럽고 슬기로운 인물이다 폐금광 가는 길가에 큰 부채처럼 늘어서 있던 포플러 그 나무 그림자들 틈에 끼여서 내 그림자도 덩달아 길어지던 해 질 녘에 느닷없이 발을 걸어 나를 넘어뜨렸던 돌부리 땅 위로 부리를 뾰족하게 내놓고 시치미를 떼던 돌! 돌인데 어찌하랴 그걸 땅에서 파내 허공으로 던진다 한들 날개 없는 돌을 어찌하랴

♧...참한詩 2020.07.29

밥이나 한번 먹자고 할 때 / 문성해

밥이나 한번 먹자고 할 때 문성해 서너 달이나 되어 전화한 내게 언제 한번 밥이나 먹자고 할 때 나는 밥보다 못한 인간이 된다 밥 앞에서 보란듯 밥에게 밀린 인간이 된다 그래서 정말 밥이나 한번 먹자고 만났을 때 우리는 난생처음 밖에서 밥을 먹는 사람들처럼 무얼 먹을 것인가 숭고하고 진지하게 고민한다 결국에는 보리밥 같은 것이나 앞에 두고 정말 밥 먹으러 나온 사람들처럼 묵묵히 입속으로 밥을 밀어넣을 때 나는 자꾸 밥이 적으로 보인다 그래서 밥을 혀 속에 숨기고 웃어 보이는 것인데 그건 죽어도 밥에게 밀리기 싫어서기 때문 우리 앞에 휴전선처럼 놓인 밥상을 치우면 어떨까 우연히 밥을 먹고 만난 우리는 먼산바라기로 자꾸만 헛기침하고 왜 우리는 밥상이 가로놓여야 비로소 편안해지는가 너와 나 사이 더운 밥 냄새..

♧...참한詩 2020.07.20

빨랫줄 저편 / 장정욱

빨랫줄 저편 장정욱 시인 질긴 죄목이었다 젖은 아이를 안고 무지개가 이어진 계단을 올랐다 아이의 입이 지워졌다 울음을 모르는 입에서 뚝뚝 이승의 끝과 끝이 파르르 떨렸다 환청의 기저귀를 채우고 빈 젖을 물리고 젖지 않는 오줌 아물지 않는 배꼽 무지개가 늘어지지 않도록 바지랑대를 세워 높이 아이를 널었다 -2018 수주문학상

별동별 /문인수

별동별 문인수 얼마 전 TV에서 봤는데요, 평생 불면증을 안고 산 한 사내의 꼬리가 참 길었습니다. 그는 저녁에 가고 싶은 데가 있을 때까지 천천히 차를 몰고요, 이윽고 집에 가고 싶을 때까지 천천히 차를 몹니다. 새벽에 자신의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몰아넣을 때,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경비원을 보며 빙긋이, 막 운동하러 나서는 이웃 노부부와 마주치며 반갑게 웃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그만 교통사고로 죽어요. 와- 보세요, 저 별! 똥 누러 가는 속도로, 아닌 게 아니라 정말 똥끝이 타는 속도로 별 하나가 이제 그리 급하게 자러 간 겁니다. 그러나 곧, 그러니까 수억광년 후쯤엔 또 반드시 제자리, 제정신으로 돌아와 반짝, 반짝이겠지요. 좀 더 행복해질 때까지, 그는 다시 그렇게 자꾸 웃겠지요,

♧...참한詩 2020.07.16

누에씨

누에씨 시를 왜 짓는가, 라는 물음에 씨는 그냥 문득 떠오른 누에처럼 시를 짓는다고 실실 얼버무리자 누에는 금세 전생으로 돌아가 알을 슬었고 뭔가를 짓는다는 좁쌀 만 한 생각으로 알은 꼬물꼬물 거리기 시작했다 까막눈으로 돌가루 종이 위에 뒹굴다가 평수 넓은 신문지로 이사 와서는 뽕잎처럼 잘게 쓴 시를 다문다문 읽는 기분으로 시상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한 줄 두 줄 행간이 생겼고, 거기에 누워 먹고 싸고 잠자면서도 온몸에 뭔가 허전한 구석이 늘 배어있음을 느끼고부터 누에는 자나 깨나 오고 가는 길 묻고 물으며 잠잠히 시를 짓기 시작했다 한 잠을 자고 나서는 허기를 참지 못해 뽕잎에만 눈독을 들였다고 두 잠을 자고 나서는 뽕잎에 딸려온 오디 맛을 난생처음 보았고 어딘가에 뽕나무가 있을 거라는 상상을 하였다고..

♧...발표작 2020.07.11

패 김욱진 편을 갈라 화투를 치다 보면 패가 잘 풀리는 사람과 한 편이 되는 날은 이 눈치 저 눈치 볼 것 없이 그저 푹 무질고 앉아 싸 붙이고는 엉덩이만 들썩여도 돈이 절로 굴러 들어온다 패라는 게 그렇다 꽃놀이패에 걸려 패싸움을 하다가도 팻감이 없으면 한 방에 폐가망신 해버리기도 하고 패거리도 그렇다 얼씬 보기엔 반상 최대의 패처럼 보여서 누구나 한번쯤은 이 패거리 저 패거리 기웃거려 보는 거다 별 밑천 없이 들락날락하기도 편하고 급할 시는 그 패를 마패처럼 내밀어 은근슬쩍 방패막이로 써먹기도 하고 팻감이 궁할 땐 이 패에서 저 패로 저 패에서 이 패로 철새처럼 줄줄이 옮겨 다니면서 늘상 화기애애한 척 돌돌 뭉쳐 돌아다니며 놀고먹기엔 딱 그저 그만이다 패가 폐가 되는 줄도 모르고 패거리가 난무하는 세..

♧...발표작 2020.07.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