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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꽃에 대하여 /안도현

제비꽃에 대하여 안도현 제비꽃을 알아도 봄은 오고 제비꽃을 몰라도 봄은 간다 제비꽃에 대해 알기 위해서 따로 책을 뒤적여 공부할 필요는 없지 연인과 들길을 걸을 때 잊지 않는다면 발견할 수 있을 거야 그래, 허리를 낮출 줄 아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거야 자줏빛이지 자줏빛을 톡 한번 건드려봐 흔들리지? 그건 관심이 있다는 뜻이야 사랑이란 그런 거야 사랑이란 그런 거야 봄은, 제비꽃을 모르는 사람을 기억하지 않지만 제비꽃을 아는 사람 앞으로는 그냥 가는 법이 없단다 그 사람 앞에는 제비꽃 한 포기를 피워두고 가거든 참 이상하지? 해마다 잊지 않고 피워두고 가거든

♧...참한詩 2020.08.19

나목 / 신경림

나목 신경림 나무들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서서 하늘을 향해 길게 팔을 내뻗고 있다. 밤이면 메마른 손끝에 아름다운 별빛을 받아 드러낸 몸통에서 흙 속에 박은 뿌리까지 그것으로 말끔히 씻어 내려는 것이겠지. 터진 살갗에 새겨진 고달픈 삶이나 뒤틀린 허리에 밴 구질구질한 나날이야 부끄러울 것도 숨길 것도 없이 한밤에 내려 몸을 덮는 눈 따위 흔들어 시원스레 털어 다시 알몸이 되겠지만 알고 있을까 그들 때로 서로 부둥켜안고 온몸을 떨며 깊은 울음을 터뜨릴 때 멀리서 같이 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참한詩 2020.08.19

소반다듬이 / 송수권

소반다듬이 송수권 왜 이리 좋으냐 소반다듬이, 우리 탯말 개다리 모자를 하나 덧씌우니 개다리소반상이라는 눈물나는 말 쥐눈콩을 널어놓고 썩은 콩 무른 콩을 골라내던 어머니 손 그 쥐눈콩 콩나물국이 되면 술이 깬 아침은 어, 참 시원타는 말 아리고 쓰린 가슴 속창까지 뒤집어 흔드는 말 시인이 된 지금도 쥐눈콩처럼 쥐눈을 뜨고 소반상 위에서 밤새워 쓴 시를 다듬이질하면 참새처럼 짹짹거리는 우리말 오리, 망아지, 토끼 하니까 되똥거리고 깡총거리며 잘도 뛰는 우리말 강아지 하고 부르니까 목에 방울을 차고 달랑거리는 우리말 잠, 잠, 잠, 하고 부르니까 정말 잠이 오는군요, 우리말 밤새도록 소반상에 흩어진 쥐눈콩을 세며 가갸거겨 뒷다리와 하니 두니 서니 숫자를 익혔던 어린 시절 가나다라 강낭콩 손님 온다 강낭콩 하..

♧...참한詩 2020.08.19

이 집 여자 : 저 집 여자 / 정이랑

이 집 여자 : 저 집 여자 정이랑 시장 한복판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이 집 여자는 대졸출신 저 집 여자는 상고출신 이 집 여자는 60평의 아파트가 있고 저 집 여자는 연립주택 월세가 밀려 있고 이 집 여자는 딸이 셋 저 집 여자는 아들만 셋 이 집 여자는 골프를 치러가고 저 집 여자는 복지회관으로 노래강습을 간다 이 집 여자는, 시장에서 가장 넓은 인삼가게의 주인이고 저 집 여자는, 한 그릇 국수를 팔면 3,000원 받는 국수집의 아줌마다 다들 이 집 여자의 편을 든다 자신이 저 집 여자인 것도 모르고

♧...참한詩 2020.08.11

진료소 풍경 / 문태준

진료소 풍경 문태준 움푹 꺼진 눈(眼) 길게 늘어서 있다 아랫도리는 목발 신세를 지고 있다 납작하게 누워도 있다 들것이 들어오고 있다 병이 몰아쳐 가쁘게 더욱 가쁘게 그대를 부를 때까지 앙상한 나목(裸木)이 될 때까지 맥이 다 빠져 청진할 수 없을 때까지 그대의 영혼이 움직이지 않을 때까지 수의(壽衣)가 얇디얇은 그대를 말없이 껴입을 때까지

♧...참한詩 2020.08.07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 문태준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문태준 당신은 나조차 알아보지 못하네 요를 깔고 아주 가벼운 이불을 덮고 있네 한층의 재가 당신의 몸을 덮은 듯하네 눈도 입도 코도 가늘어지고 작아지고 낮아졌네 당신은 아무런 표정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네 서리가 빛에 차차 마르듯이 숨결이 마르고 있네 당신은 평범해지고 희미해지네 나는 이 세상에서 혼자의 몸이 된 당신을 보네 오래 잊지 말자는 말은 못하겠네 당신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네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을 보네

♧...참한詩 2020.08.07

여행자의 노래 /문태준

여행자의 노래 문태준 나에게는 많은 재산이 있다네 하루의 첫 걸음인 아침, 고갯마루인 정오, 저녁의 어둑어둑함, 외로운 조각달 이별한 두 형제, 과일처럼 매달린 절망, 그럼에도 내일이라는 신과 기도 미열과 두통, 접착력이 좋은 생활, 그리고 여무는 해바라기 나는 이 모든 것을 여행 가방에 넣네 나는 드리워진 커튼을 열어젖히고 반대편으로 가네 이 모든 것과 새로운 대화를 위해 이국으로 가네 낯선 시간, 그 속의 갈림길 그리고 넓은 해풍이 서 있는 곳

♧...참한詩 2020.08.07

귀휴 / 문태준

귀휴 문태준 돌아와 나흘을 매어놓고 살다 구불구불한 산길에게 자꾸 빠져들다 초승달과 새와 높게 어울리다 소와 하루 밤새 게으르게 눕다 닭들에게 마당을 꾸어 쓰다 해 질 무렵까지 말뚝에 묶어놓고 나를 풀밭을 염소에게 맡기다 울 아래 분꽃 곁에 벌을 데려오다 엉클어진 수풀에서 나온 뱀을 따르며 길게 슬퍼하다 조용한 때에 샘이 솟는 곳에 앉아 웃다 이들과 주민이 되어 살다

♧...참한詩 2020.08.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