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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외 2편 / 유홍준

지평선 유홍준 지평선 위에 비가 내린다 문자로 새기지 못하는 시절의 눈물을 대신 울며 첨벙첨벙 젖은 알몸을 드러낸 채 간다 나는 지평선에 잡아먹히는 한 마리 짐승…… 어디까지 갈래 어디까지 가서 죽을래? 강물을 삼킨 지평선이 양미간을 조이며 묻는다 낡아빠진 충고와 똑같은 질문은 싫어! 있는 힘을 다해 나는 지평선을 밀어버린다 ​ 천령 개오동나무 꽃이 피어 있었다 죽기 살기로 꽃을 피워도 아무도 봐주지 않는 꽃이 피어 있었다 천령 고개 아래 노인은 그 나무 아래 누런 소를 매어놓고 있 었다 일평생 매여 있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안 태어나도 될 걸 태어난 사람이 살고 있었다 육손이가 살고 있었다 언청이가 살고 있었다 그 고개 밑에 불구를 자식으로 둔 애비 에미가 살고 있었다 그 자식한테 두들겨 맞으며 사는 ..

♧...참한詩 2020.10.17

김욱진 네 번째 시집, '수상한 시국' 출간-매일신문(2020.10.5)

김욱진 네 번째 시집, '수상한 시국' 출간 매일신문 배포 2020-10-05 17:08:00 | 수정 2020-10-06 16:01:45 | "33년 교직생활 마무리…이제 문학활동 전념" 네 번째 시집 '수상한 시국'을 출간한 김욱진 시인 김욱진 시인이 정년퇴임을 앞두고 네 번째 시집 '수상한 시국'을 출간했다. 대구 협성고, 경일여고, 대구제일고, 경북여상 등에서 33년 간 교직생활을 한 김욱진 시인은 지난 2003년 월간 '시문학' 12월호에 '도성암 가는 길'을 포함한 3편의 시가 당선되면서 문단에 등단했다. 김 시인의 그동안 시작업은 불교 윤회사상을 바탕으로 '나는 누구인가'를 찾는 작업이었다. 시집 '비슬산 사계' '행복채널' '참, 조용한 혁명' 모두 일상 생활 속에서 부딪치는 삶의 모습과 ..

간절 / 이재무

간절 이재무 ​ 삶에서 '간절'이 빠져나간 뒤 사내는 갑자기 늙기 시작하였다 활어가 품은 알같이 우글거리던 그 많던 '간절'을 누가 다 먹어치웠나 '간절'이 빠져나간 뒤 몸 쉬 달아오르지 않는다 달아오르지 않으므로 절실하지 않고 절실하지 않으므로 지성을 다할 수 없다 여생을 나무토막처럼 살 수는 없는 일 사내는 '간절'을 찾아 나선다 공같이 튀는 탄력을 다시 살아야 한다

♧...참한詩 2020.10.03

길 위의 식사 / 이재무

길 위의 식사 이재무 사발에 담긴 둥글고 따뜻한 밥 아니라 비닐 속에 든 각진 찬밥이다 둘러앉아 도란도란 함께 먹는 밥 아니라 가축이 사료를 삼키듯 선 채로 혼자서 허겁지겁 먹는 밥이다 고수레도 아닌데 길 위에 밥알 흘리기도 하며 먹는 밥이다 반찬 없이 국물 없이 목메게 먹는 밥이다 울컥, 몸 안쪽에서 비릿한 설움 치밀어 올라오는 밥이다 피가 도는 밥이 아니라 으스스, 몸에 한기가 드는 밥이다

♧...참한詩 2020.10.03

위대한 식사 / 이재무

위대한 식사 이재무 산그늘 두꺼워지고 흙 묻은 연장들 허청에 함부로 널브러지고 마당가 매캐한 모깃불 피어오르는 다 늦은 저녁 멍석 위 밥상 식구들 말 없는, 분주한 수저질 뜨거운 우렁 된장 속으로 겁 없이 뛰어드는 밤새 울음, 물김치 속으로 비계처럼 둥둥 별 몇 점 떠 있고 냉수 사발 속으로 아, 새까맣게 몰려오는 풀벌레 울음 베어 문 풋고추의 독한, 까닭 모를 설움으로 능선처럼 불룩해진 배 트림 몇 번으로 꺼트리며 사립 나서면 태기봉 옆구리를 헉헉, 숨이 가쁜 듯 비틀대는 농주에 취한 달의 거친 숨소리 아, 그날의 위대했던 반찬들이여

♧...참한詩 2020.10.03

좋겠다, 마량에 가면 / 이재무

좋겠다, 마량에 가면 이재무 몰래 숨겨놓은 여인 데불고 소문조차 아득한 먼 포구에 가서 한 석 달 소꿉장난 같은 살림이나 살다 왔으면, 한나절만 돌아도 동네 안팎 구구절절 훤한, 누이의 손거울 같은 마을 마량에 와서 빈둥빈둥 세월의 봉놋방에나 누워 발가락장단에 철 지난 유행가나 부르며 사투리가 구수한, 갯벌 같은 여자와 옆구리에 간지럼이나 실컷 태우다 왔으면, 사람들의 눈총이야 내 알 바 아니고 조석으로 부두에 나가 낚싯대는 시늉으로나 던져두고 옥빛 바닷물에 텃밭 떠난 배추 같은 생 절이고 절이다가 그것도 그만 신물이 나면 통통배얻어 타고 먼 바다 휭, 하니 돌다 왔으면, 그렇게 감쪽같이 비밀 주머니 하나를 꿰차고 와서 시치미 뚝 떼고 앉아 남은 뜻도 모르는 웃음 실실 흘리며 알량한 여생 거덜냈으면,

♧...참한詩 2020.10.03

속상한 일 / 박지웅

속상한 일 박지웅 나무에 소금 먹인다는 말을 들었다 뿌리둘레에 소금자루를 묻어 놓으면 천천히 독이 퍼지면서 비실비실 말라버린다니 참 못할 짓이지 싶은데 마음 구석에 슬쩍 생겨난 소금 한 자루 자루 입을 몇 번 풀었다 묶었다 맹지에 길 내자고 소금자루 메고 가 산어귀 나무에 흰 고깃덩어리를 먹였는데 기다리는 비 한방울 없더란다 걸핏하면 빌고 야심차게 기도하는 것도 참 몹쓸 짓 물을 켜도 혓바닥이 비실비실 마르더란다 가슴 한쪽이 쓰라리더란다 치워도 꼭 그 자리에 소금 한 자루가 터져 악독하게 소금을 치더란다

♧...참한詩 2020.09.29

불탄 집 / 함민복

불탄 집 함민복 불탄 집에 어둠이 산다 불탄 집엔 더이상 불이 살지 않는다 불탄 집엔 소리가 살지 않는다 불탄 집에 고요가 산다 어둠이 불을 태워버린 것인가 고요가 소리를 태워버린 것인가 어둠이 탄 집에 불이 살지 않는다 고요가 탄 집에 소리가 살지 않는다 불은 어둠을 태워 어둠을 만든 것인가 소리는 고요를 태워 고요를 만든 것인가 불타기 전 어둠과 불은 동거자였다 불타기 전 고요와 소리는 서로 존재했다 불탄 집엔 불탄 냄새가 산다 불탄 집이 불탄 냄새로 운다 불은 타올라 어둠이 되는가 소리는 타올라 고요가 되는가 불탄 집엔 그림자가 없다 불탄 집엔 그림자만 있다

♧...참한詩 2020.0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