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한詩

지평선 외 2편 / 유홍준

김욱진 2020. 10. 17. 18:54

지평선

유홍준

 

 

지평선 위에 비가 내린다

문자로 새기지 못하는 시절의 눈물을 대신 울며

첨벙첨벙 젖은 알몸을 드러낸 채 간다

나는 지평선에 잡아먹히는 한 마리

짐승…… 어디까지 갈래

어디까지 가서 죽을래?

강물을 삼킨 지평선이 양미간을 조이며 묻는다

낡아빠진 충고와 똑같은 질문은 싫어!

있는 힘을 다해 나는 지평선을 밀어버린다

  

    천령

개오동나무 꽃이 피어 있었다
죽기 살기로 꽃을 피워도 아무도 봐주지 않는 꽃이 피어 있었다
천령 고개 아래 노인은 그 나무 아래 누런 소를 매어놓고 있 었다
일평생 매여 있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안 태어나도 될 걸 태어난 사람이 살고 있었다
육손이가 살고 있었다
언청이가 살고 있었다
그 고개 밑에 불구를 자식으로 둔 애비 에미가 살고 있었다
그 자식한테 두들겨 맞으며 사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아무도 봐주지 않는 개오동나무 꽃이
그 고개 아래
안 피어도 될 걸 피어 있었다

    유골

당신의 집은
무덤과 가깝습니까
요즘은 무슨 약을 먹고 계십니까
무덤에서 무덤으로
산책을 하고 있습니까
저도 웅크리면 무덤, 무덤이 됩니까
무덤 위에 올라가 망(望)을 보았습니까
제상(祭床) 위에 밥을 차려놓고
먹습니까
저는 글을 쓰면 비문(碑文)만 씁니다
저는 글을 읽으면 축문(祝文)만 읽습니다
짐승을 수도 없이 죽인 사람의 눈빛, 그 눈빛으로 읽습니다
무덤 파헤치고
유골 수습하는 사람의 손길은 조심스럽습니다
그는 잘 꿰맞추는 사람이지요
그는 살 없이,
내장 없이, 눈 없이
사람을 완성하는 사람이지요
그는 무덤 속 유골을 끄집어내어 맞추는 사람입니다
저는 그 사람이 맞추어놓은 유골
유골입니다

 

유홍준 시집 『너의 이름을 모른다는 건 축복』 (시인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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