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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홍 辭說 -병산서원

안동 봉정사 백일기도 해제 법문 흘려듣고 가는 길에 병산서원 달팽이 뒷간 급히 들러 머슴인 양 꾸부리고 앉아 뒤돌아보며, '설사 이보다 더 큰 볼일이 어디 있겠노' 기막힌 해제 법문 한 자락 설하고 나오던 참 만대루 앞뜰에서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백일홍을 만났다 배롱나무라는 이름표 자그맣게 달고 서 있다 배롱이라, 배롱… 어디선가 들어보긴 했는데 뿌리는 하나요 성과 이름이 둘이라, 양반 가문은 아니겠다 성씨로만 봐서는 배나 백이나 어금버금한 집안인 거 같고 이름 사주로만 봐서는 왠지 배 씨가 종노릇 할 것만 같은데 그렇다고 이걸 백씨한테 에둘러 물어보기도 뭐하고 그냥 속으로 배롱 배롱 불러보니 자꾸 메롱 메롱 놀려대는 기분도 들고 의 이름이라 하지만 우째 주워온 자식 이름 짓듯 했을까 배실배실하다 ..

인공수정 / 유홍준

인공수정 유홍준 겨드랑이까지 오는 긴 일회용 비닐장갑을 끼고 애액 대신 비눗물을 묻히고 수의사가 어딘지 음탕하고 쓸쓸해 보이는 수의사가 꼬리 밑 음부 속으로 긴 팔 하나를 전부 밀어넣는다 나는 본다 멍청하고 슬픈 소의 눈망울을 더러운 똥 무더기와 이글거리는 태양과 꿈쩍도 않고 성기가 된 수의사의 팔 하나를 묵묵히 다 받아내는 소의 눈망울을 넓적다리와 넓적다리 사이에 가랑이 사이에 빵빵하게 공기를 집어넣은 것 같은 소의 유방에 넷, 생긴 게 꼭 무슨 고무장갑 손가락 같은 젖꼭지가 넷 귀때기에 플라스틱 번호표가 꽂혀 있는 소는 이제 소끼리 접 붙이지 않는다 더 굵고 더 기다란 인간의 팔하고만 붙는다

♧...참한詩 2020.11.05

노모 일기․1

노모 일기․1 청춘에 한 남자를 잃고부터 이 세상 더 이상 잃을 게 뭐 있냐며 있는 거 없는 거 다 퍼주고 살아오신 어머니 구순 고개 훌쩍 넘더니만 이승도 저승도 다 내 것으로 보이시는지 담 너머 옆집 애호박도 그저 따오고 간간이 건넛집 밭뙈기 상추며 정구지도 뜯어오고 이 골목 저 골목 떠돌아다니는 욕이라는 욕마저도 버젓이 빈 병이나 비닐봉지에다 다 주워 담아 오고 그렇게 쓸쓸히 주워 모은 하루하루를 금세 잊어버리는 낙으로 살고 계시는데 그 하루 한시가 못 잊어 전화라도 드리면 이젠 그늘도 그립다 젊은 그 영감, 정신 바짝 차리고 살라더니 밤이면 밤마다 날 붙들고 늘어지는 통에 살맛이 난다 그러시네요

노모 일기․2

노모 일기․2 모처럼, 미수米壽를 바라보는 어머니가 손수 장만한 칼국수 온 가족이 두레반에 둘러앉아 후루룩 소리 내어 먹는다 주물럭주물럭 반죽한 밀가루 안반 위에다 올려놓고 풍진 세상 모퉁이 돌고 돌아 홍두깨로 모난 녀석 볼 한 번 더 비벼주며 키 몸무게 자로 재듯 빚은 손칼국수 어머니 손맛이 절로 느껴지는 저녁이다 바른손 새끼손가락이 불쑥 튀어나올 상 싶으면 약지 중지 손구락은 원을 그리며 다독이고 왼손 엄지 중지에 지그시 힘 실어주는 어머니의 손끝은 섬섬옥수다 둥근 세상 일궈가는 어머니 손놀림 어깨 너머로 훔쳐보며 우리 칠 남매는 저마다 한 가락씩 하는 손가락을 내밀고 겻불에 국수 꼬랑지 구워 나눠 먹는 법 익혔다 그러는 사이, 바람에 밀리고 밀린 안반은 헛간으로 밀려나 버렸고 한평생 국수만 밀어댄 ..

노모 일기․3

노모 일기․3 청춘에 혼자되어 딴눈 한번 팔지 않고 평생을 쪼그리고 앉아 밭뙈기만 일구며 살아오신 구순 노모 무릎 관절 닳고 닳아 오금조차 뗄 수 없다는 말씀을 듣고서야 생전 타보지 못한 으라차차 한 대 불쑥 사서 보내드렸더니 이 나에 꼬맹이 타는 유모차를 어떻게 끌고 다니냐며 아랫목에 그냥 고이 모셔두고는 장날마다 가서 사 온 알록달록한 옷가지들만 수북 태워놓으셨다 어여차 어여차 어기여차 꽃상여 밀고 당기듯 두 무릎 버티고 일어서는 모습 안쓰러워 의자 앉아 볼일 보는 실내변기도 하나 장만해드렸더니 아까워서 못쓰겠다며 윗목에 고대로 놔두셨다 그러고 동네 노인정 가서는 이제 내 차도 한 대 생겼고 똥오줌도 방 안에서 다 본다며 여차저차 자랑자랑 늘어놓으셨단다 그 소문 들은 건넛집 꼬부랑 할머니 어렵사리 찾..

노모 일기․4

노모 일기․4 추석이라고 아들 집에 온 구순 노모 모시고 딱히 갈 데는 없고 해서 아파트 내 어린이 놀이터 빈 의자에 좀 멀찍이 떨어져 앉아 미끄럼 타고 노는 꼬마 아이들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때때옷 입은 예닐곱 살배기 여자아이가 머리 희끗희끗해진 내게 다가와 할아버지 여기 왜 왔어요? 하는 통에, 뜨끔 하라…버찌? 어어, 그래… 너희들이랑 놀려고 왔지, 그러자 다짜고짜 사진 찍어준다며 주머니에서 폰을 자랑하듯 불쑥 꺼내더니 할머니랑 가까이 다가앉아 보란다 얼떨결에 나는 어머니 곁에 바짝 다가앉았고 그 아이는 부부인 줄 알고 착각, 찰깍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청춘에 홀로된 어머니, 영감이랑 생전에 찍은 사진 한 장 없는데 잘됐네, 나 혼자 속으로 중얼거리며 착각, 찰깍 찍어준 그 꼬마 아이가 얼마나 ..

노모 일기․5

노모 일기․5 밤마다 손주들 앨범 사진 꺼내놓고 혼자서 주거니 받거니 얘기하다 잘 있어, 하고 스르르 잠드시는 구순 노모 여기서 한 얘기 저기 가서 또 하고 눈만 뜨면 또 만났네, 하며 방긋 웃으시는 지난봄엔 아랍어 배우러 튀니지 간 손자 보고 싶다 했다가 금세 다 잊어버리고 며칠 후엔 서울 가 약국 하는 외손녀 보고 싶다 그랬다가 가까이 사는 딸년조차 발길 뚝 끊었다며 벅벅 우겨대더니 달포 전부터는 갑자기 큼직한 가족사진이나 한 장 벽에 붙여놓고 들면 날면 쳐다보면 배가 절로 부를 것 같다고 하도 조르시길래 별러, 별러 섣달그믐날 여기저기 흩어진 피붙이들 어렵사리 다 모여 고향사진관 찾아갔다 사진사는 설맞이 웃음거리 장만하듯 시시만큼 굳게 숨긴 표정들을 요리조리 달래고 어르고 녹여가며 연신 셔터를 터뜨..

노모 일기․6

노모 일기․6 평생 절간 드나드는 거밖에 모르고 살아온 노보살 한 분 비슬산 수도암 백중 기도 마치고 내려오다 계곡 한 모롱이 담 카페 모시고 갔더니 피서 온 사람들처럼 빨대를 입에 물고 아메리카노에다 빵 조각 적셔 먹으며 모처럼 소풍을 나오니 살 것만 같다 그러신다 청춘과부 멍에 걸머지고 비알-밭 같은 자식 농사 일궈온 노보살 커피 한 잔에 취하셨는지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사랑 얘기 술술 풀어놓는다 얼마 전 건넛마을 혼자 사는 동갑내기 영감 어디서 막걸리 한 사발 걸쭉하게 마시고 불쑥 찾아와 하룻밤 묵어가자 하길래 대뜸 이 나에 쓸 만한 물건이 어디 있냐고 내놓을 거 있거든 다 내놔봐라 그랬더니 그 영감 질겁하고 돌아가 그 담날 현풍 장 난전에서 만나 아무 일도 없는 듯 잔치국수 한 그릇 사주더란다 지..

노모 일기·7

노모 일기·7 김욱진 비슬산 기슭 양동마을 코로나 돈다는 소문에 노인정조차 문 다 걸어 잠그고 골목엔 땟거리 구하러 나온 고양이들만 간간이 돌아다닐 뿐 봄은 와서 개나리 벚꽃 흐드러지게 피었는데 이맘때면 쑥 캐서 장에 갔다 파는 재미가 쏠쏠하셨던 어머니 여차저차 생병이 나셨는지 속앓이를 하신건지 며칠째 먹지도 싸지도 못했다는 전화를 받고 부랴, 응급실로 모시고 가 구순 넘은 노구의 몸속을 면경알처럼 싹 다 훔쳐봤다 밥통 똥통 다 틀어 막혀 온통 의혹 덩어리로 울퉁불퉁 몇 달을 못 넘기실 것 같단다 암울한 그 소식 아랑곳 않고 의사 선생은 곧장 링거 꽂고 한 삼 일 굶으면 다 낫는다는 묘약 처방을 내렸다 암, 그러면 그렇지 구십 평생 병원 밥 먹고 누워 있어 본 적 없는데 내가 무신 코레라 빙이라도 들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