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봉정사 백일기도 해제 법문 흘려듣고 가는 길에
병산서원 달팽이 뒷간 급히 들러 머슴인 양 꾸부리고 앉아
뒤돌아보며, '설사 이보다 더 큰 볼일이 어디 있겠노'
기막힌 해제 법문 한 자락 설하고 나오던 참 만대루 앞뜰에서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백일홍을 만났다
배롱나무라는 이름표 자그맣게 달고 서 있다
배롱이라, 배롱… 어디선가 들어보긴 했는데
뿌리는 하나요 성과 이름이 둘이라, 양반 가문은 아니겠다
성씨로만 봐서는 배나 백이나 어금버금한 집안인 거 같고
이름 사주로만 봐서는 왠지 배 씨가 종노릇 할 것만 같은데
그렇다고 이걸 백씨한테 에둘러 물어보기도 뭐하고
그냥 속으로 배롱 배롱 불러보니 자꾸 메롱 메롱 놀려대는 기분도 들고
의 이름이라 하지만 우째 주워온 자식 이름 짓듯 했을까
배실배실하다 갈 것처럼
행여, 귀한 자식 명줄 잇는다고 집안에서는 백일홍
밖에서는 일부러 천한 이름 부른 걸까
거기다 한술 더 떠 간지럼나무라고도 불렀다니
아, 내 머리가 뒤숭숭하다
백일홍이면 그냥 백일홍나무지, 간지럼나무는 또 뭐야
등 살살 긁어주면 이파리들이 깔깔대고 웃는다꼬
그 얘기사 그저 웃어넘길 일이지만
성과 이름은 하도 수상쩍어, 인터넷에 백일을 탁 치니
백일상차림부터 백일기도 백일홍 백일홍꽃말 백일몽에다
백일섭 졸혼까지 주르륵 뜬다
백일홍은 백일 간 피었다 지는 꽃
실오라기 같은 인연도 소중히 여긴다는 꽃말
그게 또 궁거워, 꽃집이라는 꽃집 다 비집고 돌아다녀 보니
명 짧은 꽃들로 북적인다
벚꽃 배꽃 복사꽃은 봄볕에 한 대엿새
베로니카 달리아는 보름 남짓
백합이고 장미고 이름 값하는 꽃들도
하물며 불로초마저 스무날을 채 못 견디고 다 저버렸다
그러는 사이, 백로 한 마리
배롱나무 간지럼 태우고 날아간다
꽃으로 왔다 나-무南無로 돌아가는 백일
옹, 웃음꽃 한 무더기 내 머리 위로 내려앉는다
누가 저 배롱나무를 간지럼나무라 불렀는지
백일홍과 배롱나무가 둘이 아닌 하나인 걸
백일홍 법문 듣고서야 이제 알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