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한 시국

노모 일기․5

김욱진 2020. 10. 27. 13:16

노모 일기․5

 

 

밤마다 손주들 앨범 사진 꺼내놓고

혼자서 주거니 받거니 얘기하다

잘 있어, 하고 스르르 잠드시는 구순 노모

여기서 한 얘기 저기 가서 또 하고

눈만 뜨면 또 만났네, 하며 방긋 웃으시는

지난봄엔 아랍어 배우러 튀니지 간 손자 보고 싶다 했다가

금세 다 잊어버리고

며칠 후엔 서울 가 약국 하는 외손녀 보고 싶다 그랬다가

가까이 사는 딸년조차 발길 뚝 끊었다며 벅벅 우겨대더니

달포 전부터는 갑자기 큼직한 가족사진이나 한 장 벽에 붙여놓고

들면 날면 쳐다보면 배가 절로 부를 것 같다고 하도 조르시길래

별러, 별러 섣달그믐날

여기저기 흩어진 피붙이들 어렵사리 다 모여 고향사진관 찾아갔다

 

사진사는 설맞이 웃음거리 장만하듯

시시만큼 굳게 숨긴 표정들을 요리조리 달래고 어르고 녹여가며

연신 셔터를 터뜨렸다

줌을 밀고 잡아당길 때마다

싱거웠던 웃음이 한결 짭조름하게 요리되었고

실없는 웃음은 소리 없이 싹둑싹둑 잘려 나갔다
몇 년째 공무원 시험 준비하다 온 외손자 입꼬리는 오르락내리락

배시시 웃다가 들켜버린 손녀 볼우물엔 수줍음 가득

억지로 웃음 짓다 일그러진 나의 입술은 바르르 떨렸고
폈다 오그렸다 할 것도 없는 노모 주름살만

저절로 합죽한 미소를 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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