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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장에서 만난 형

막장에서 만난 형 두 하늘을 모시고 사는 형이 있었다 파란 새벽하늘 쳐다보고 갱 속으로 들어가 숯검댕이 하늘나라 투명인간 되어버린 형, 만나러 갔다 늦가을 해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 갑반 일을 마치고 걸어 나오는 검댕이들은 다 나의 형 같아 보였다, 보릿고개 시절 온몸에 깜부기 칠하고 나를 폭삭 속여먹었던 형 엄마한테 검정 고무신 사달라고 떼쓰던 그 형아 오늘은 아무런 말이 없다 동생 공부시키겠다고 처자식 먹여 살리겠다고 막장까지 떠밀려온 형들의 눈빛이 모도 지금, 여기, 나는 없었다 막장 한 모퉁이 꼬부리고 앉아 시시만큼 싸 온 점심 도시락을 까먹으면서도 은성 주포집 빈대떡 두루치기 한 접시 시켜놓고 술잔을 부딪치며 먼저 떠난 이의 이름 되뇌면서도 갱 입구 쓸쓸히 서 있는 동상을 바라보면서도 시커먼 석탄..

나는 찍혔다, 고로 존재한다

나는 찍혔다, 고로 존재한다 그는 갑이고 나는 늘 을이다, 라는 생각 문득 아침밥 먹고 나서는 현관 지문인식기에 찍혔다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지하주차장에서도 심지어 집 앞 골목을 지날 때도 나는 찍혔다 차 안에서는 아예 동영상으로, 그것도 풀로 찍혔다 을인 척하며 졸졸 따라다니는 갑 이보다 더 얄미운 갑질 또 어디 있을까 싶다가도 나는 그를 상전처럼 모시고 다닌다 그는 항상 높은 곳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가는 곳마다 그의 눈도장을 찍고 눈치 봐야만 했다 나도 모르게 그래졌다, 마저 찍혔다 그는 본 대로 들은 대로 어딘가에 쏙쏙 다 일러바치는 전문 스파이 같다 땟거리 구하러 나온 고양이처럼 눈알 뱅글뱅글 돌리며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찍어댄다 출근 시간 쫓기다 찍히고 차 끼어들다 찍히고 나는 눈엣가시처럼..

패 편을 갈라 화투를 치다 보면 패가 잘 풀리는 사람과 한 편이 되는 날은 이 눈치 저 눈치 볼 것 없이 그저 푹 무질고 앉아 싸붙이고는 엉덩이만 들썩여도 돈이 절로 굴러들어온다 패라는 게 그렇다 꽃놀이패에 걸려 패싸움하다가도 팻감이 없으면 한 방에 패가망신하기도 하고 패거리도 그렇다 얼씬 보기엔 반상 최대의 패처럼 보여서 누구나 한 번쯤은 이 패거리 저 패거리 기웃거려 보는 거다 별 밑천 없이 들락날락하기도 편하고 급할 시는 그 패를 마패처럼 내밀어 은근슬쩍 방패막이로 써먹기도 하고 팻감이 궁할 땐 이 패에서 저 패로 저 패에서 이 패로 철새처럼 줄줄이 옮겨 다니면서 늘상 화기애애한 척 돌돌 뭉쳐 돌아다니며 놀고먹기엔 딱 그저 그만이다 패가 폐가 되는 줄도 모르고 패거리가 난무하는 세상 한구석엔 패도 ..

파 해 저물녘 칠성시장 한 모퉁이 노점에서 한평생 파만 몇 줄 놓고 파는 노파 한 뿌리 대여섯 닢 나와 두 줄로 자란 파 땅심으로 겨우 보았다 무슨 파냐고 묻기도 난감하고 거기, 오갈 데 없는 노파심 불러 파절이할 파나 한 단 사자고 그럴까 금세 갈래갈래 쪼개지는 파 긴 원기둥 모양의 관처럼 속이 텅 빈, 평활한 잎이다 끄트머리는 뾰족하게 닫혀 있고 아랫도리는 돌레돌레 감싼 잎집이다 녹색 바탕에 흰빛이 돌고 끈적끈적한 점성이 한파 속 쩍쩍 갈라진 틈새를 보듬어주고 있다 좌파도 우파도 아닌 그저, 올곧게 제자리 지키며 늘 푸른 세상 꿈꾸는 노파 어디, 저런 대쪽 같은 파 한 뿌리 없을까

수상한 시국·1-코로나19

수상한 시국·1 -코로나19 정체불명의 능력자다 그는 사교적이고 때로는 치밀하고 대범하다 흡사 신종 다단계 회사를 차린 유령 같다 치고 빠지는 수법이 신출귀몰하다 눈 깜짝할 사이 훔치고 이간질하고 아무 데나 달라붙어 떼쓰고 시비 걸다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사기꾼 같다 어눌한 척하면서 할 말은 다 하고 수줍은 척하면서 할 짓은 다 하는 반갑잖은 손님이다 말이란 말에는 다 끼어들고 소문이란 소문은 다 퍼뜨리는 슈퍼 바이러스 전파자다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 객기를 부리나 싶다가도 밥 먹을 때나 차를 타고 달릴 때나 혼자 있을 때나 여럿 있을 때나 심지어 정신병동까지 스며드는 걸 보면 인간시장 간 보러 온 염탐꾼 같다 출퇴근길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나는 그와 인사를 나누고 마스크 사러 약국 앞 줄 서 있다가도 ..

수상한 시국·2

수상한 시국·2 거시기 말대로 나는 거시적으로 받아 적었다 마누라는 그 시를 미시적으로 읽었다 애면글면 쌀뜨물로 끓인 된장찌개 속에서 좁쌀만 한 바구미 한 마리 동동 뜨는 걸 보고 나는 미시적으로 밥맛이 뚝 떨어졌다 눈치 가로챈 마누라는 시치미 뚝 떼고 애먼 쌀눈 기죽이지 말라며 거시적으로 읽었다 그 질로 눈먼 나의 시는 시시비비에 휩싸였다 밥때만 되면 그 흔해 빠진 상 하나 받지 못하냐고 구시렁거리는 마누라 말투가 수상쩍기 시작했다 죽은 시 끙끙 움켜쥐고 오락가락하다 들키는 바람에 이젠 원고 청탁조차 들어오지 않는다 시는 나를 세상 밖으로 내던졌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굶어 죽어도 시의 눈을 뜨고 죽어라 나는 아직 이토록 간절한 원고 청탁을 받아본 적이 없다 마누라는 늘 거시기 앞에서 죽는 시..

수상한 시국‧3-밥값

수상한 시국‧3 -밥값 동계 방학 자가 연수 중 코로난가 뭔가 불쑥 찾아와 현관 문고리 잡고 가는 바람에 우리 부부 자가 격리 중 이제 드디어 올 것이 왔구먼 그러잖아도 각방거처 선언할까 봐 조마조마했는데 눈칫밥 한 그릇 얻어먹고 살기도 쉽잖은 팔자인지 눈만 뜨면 손 씻고 입마개하고 한 끼 먹은 밥그릇 숟가락 젓가락 각자 설거지하고 소독하고 화장실 드나들 땐 변기 거울 빚 갚듯 반질반질 다 닦아 줘야 하고 온종일 건네는 말이라고는 밥 먹자, 라는 한 마디 그마저도 눈치 보며 주고받는 일상 지금, 여기, 나는 자가 수양 중이다 자가, 누구인지 자가, 왜 여기 머물고 있는지 자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나 혼자 조용히 묻고 있는 중

수상한 시국‧4

수상한 시국‧4 비슬산 도성암 성찬 큰스님은 살아생전 참과 거짓은 둘이 아니라 그러셨는데 사월만 되면 사람들은 비슬산 참꽃 피었는가 졌는가 내게 묻는다 참과 거짓 공방 뜨겁게 달아오르는 수상한 시국에, 참 꽃이 피었다 그래도 진짜 피었냐고 되물을 거고, 참 꽃이 졌다 그래도 언제 졌냐고 꼬치 꽃이 따질 거고 피고 진 것도 없는 나야, 참 꽃말이나 그저 한 아름 품어 안고 골골샅샅 꽃 소식 전해 드릴 따름

그 바람에

그 바람에 은행들이 다 털렸다 졸지에 알거지 신세가 되어버린 은행들은 길바닥에 나앉았고 그 소문은 일파만파로 번졌다 구린내가 났다 누구 소행인지 따져볼 겨를도 없이 줄도산 당한 은행들은 속수무책이었다 그 바람에 은행 주가는 폭락했고 빚쟁이들은 눈덩이처럼 불어난 빚 짓뭉개듯 은행 짓밟고 지나갔고 바람은 그냥 빚잔치 한 판 속 시원하게 벌인 듯 지나갔다 그 바람에 빚진 늦가을 바람은 큰길가 신호등 언저리 보도블록 위 은행 신용불량자 딱지처럼 딱 붙어있는 일수대출 광고지 직빵 전화번호부터 슬그머니 떼어내고 있었다

58년 개띠

58년 개띠 계급장 떨어질락 말락 하는 58년 개띠 동갑내기 계모임 자리에서 폭탄주가 계주하듯 몇 순배 돌고 오늘로 술술 소임을 다 마친 계주가 서운했던지 벌떡 일어나 마지막 건배를 한다며, '우리가' 그러자 걔들은 일제히 '축이다' 하고 짖어댔다 계파가 난무하는 세상 한 때, 나는 너의 축이었고 너는 나의 우리였다 나는 너를 주인처럼 섬겼고 너는 나를 종처럼 부려먹었다 나 속엔 늘 우리 속 개 한 마리 숨어 살고 있었다 내일 아침, 걔들이 없는 이 세상 조간신문 사회면 한구석엔 '각계각층에서 모인 개들은 몸부림쳤다'라는 기사 개 꼬리만 하게 날지도 모를 일이지만 나는 여태 걔를 나라고 여겼고 걔는 나의 축이었다 58년 개띠들은 우리의 한 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