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한 시국

나는 찍혔다, 고로 존재한다

김욱진 2020. 11. 8. 21:02

나는 찍혔다, 고로 존재한다

 

 

그는 갑이고 나는 늘 을이다, 라는 생각

문득 아침밥 먹고 나서는 현관 지문인식기에 찍혔다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지하주차장에서도

심지어 집 앞 골목을 지날 때도 나는 찍혔다

차 안에서는 아예 동영상으로, 그것도 풀로 찍혔다

을인 척하며 졸졸 따라다니는 갑

이보다 더 얄미운 갑질 또 어디 있을까 싶다가도

나는 그를 상전처럼 모시고 다닌다

그는 항상 높은 곳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가는 곳마다 그의 눈도장을 찍고 눈치 봐야만 했다

나도 모르게 그래졌다, 마저 찍혔다

그는 본 대로 들은 대로

어딘가에 쏙쏙 다 일러바치는 전문 스파이 같다

땟거리 구하러 나온 고양이처럼 눈알 뱅글뱅글 돌리며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찍어댄다
출근 시간 쫓기다 찍히고 차 끼어들다 찍히고

나는 눈엣가시처럼 콕콕 찍혔다
점심때 자장면 시켜 먹고 이빨 새 낀 고춧가루도
퇴근 무렵 화장실 거울 앞에서 찍혔다
온종일 빈껍데기에 꺼달려 다니는 나는

찍혔다, 찍었다

‘찍혔다’와 ‘찍었다’ 사이

나는 다큐멘터리 한 편을 찍었다, 파노라마처럼

‘찍혔다’가 사라지고, ‘찍었다’가 등장하는 순간

졸지에 나는 갑, 그는 을

기분 좋은 하루였다
나는 찍혔다, 고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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