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찍혔다, 고로 존재한다
그는 갑이고 나는 늘 을이다, 라는 생각
문득 아침밥 먹고 나서는 현관 지문인식기에 찍혔다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지하주차장에서도
심지어 집 앞 골목을 지날 때도 나는 찍혔다
차 안에서는 아예 동영상으로, 그것도 풀로 찍혔다
을인 척하며 졸졸 따라다니는 갑
이보다 더 얄미운 갑질 또 어디 있을까 싶다가도
나는 그를 상전처럼 모시고 다닌다
그는 항상 높은 곳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가는 곳마다 그의 눈도장을 찍고 눈치 봐야만 했다
나도 모르게 그래졌다, 마저 찍혔다
그는 본 대로 들은 대로
어딘가에 쏙쏙 다 일러바치는 전문 스파이 같다
땟거리 구하러 나온 고양이처럼 눈알 뱅글뱅글 돌리며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찍어댄다
출근 시간 쫓기다 찍히고 차 끼어들다 찍히고
나는 눈엣가시처럼 콕콕 찍혔다
점심때 자장면 시켜 먹고 이빨 새 낀 고춧가루도
퇴근 무렵 화장실 거울 앞에서 찍혔다
온종일 빈껍데기에 꺼달려 다니는 나는
찍혔다, 찍었다
‘찍혔다’와 ‘찍었다’ 사이
나는 다큐멘터리 한 편을 찍었다, 파노라마처럼
‘찍혔다’가 사라지고, ‘찍었다’가 등장하는 순간
졸지에 나는 갑, 그는 을
기분 좋은 하루였다
나는 찍혔다, 고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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