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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序

自序 십여 년 전 낸 첫 시집 속에 ‘시마’ 라는 시 한 편 실었다가 이게 무슨 ‘시마’ 냐고 눈 밝은 선승께 호되게 꾸지람들은 적 있다. 이렇게 들통 다나버린 나의 시 이번에는 정통 시산맥에서 시혼 담은 시집 한 채 지어준다기에 넙죽 손 내밀었다, 시답잖은 거야 어쩔 도리 없고 시라고는 무시밖에 모르시던 어머니 살아생전 시집 한 권 손에 들고 동네방네 돌아다니며 내 아들이 쓴 시라고 자랑자랑하시더니만 시상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게 시라는 소문만 무성 그래도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며칠 전 내 손 꼭 잡고 시가 좋다, 시가 좋다 나 돌아가는 시가, 참 좋다 나 죽고 나면, 니 시상 널브러지는 세상 올끼다 …… 삼가 어머님 영전에 이 시집을 받칩니다. 경자년 초가을 비슬산하 송림산방에서 김욱진 손모음

목차-64편

목차 1부 모과에 대한 단상 시,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씨/시, 앗! 누에씨 나를 도둑맞다 박달나무 눈 참, 밝다 나를 일깨워준 이 경계 非비 꿀밤을 맞았다 마음 녀석 여시아문如是我聞 환幻이라는 갑 고백 디스크 적선 암, 글쎄 2부 반딧불이 막장에서 만난 형 나는 찍혔다, 고로 존재한다 패 파 그 바람에 수상한 시국․1 수상한 시국․2 수상한 시국․3 수상한 시국․4 얼이와 빵이 58년 개띠 무료급식소 쓰레기 분리수거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카톡방 3부 용궁역 맨발로 너도나도 풍란 세상에 이런 일이 외눈박이 사랑 교단 일기․1 교단 일기․2 교단 일기․3 나가 뭐길래 풍문으로 들었소 감천 벽화마을 무섬마을 가는 길 글 도둑 도동서원 은행나무님의 말씀-속미인곡 풍으로 백일홍 辭說-병산서원 거울 보는 새..

모과에 대한 단상

모과에 대한 단상 방 한 모퉁이 책상 위엔 한 열흘 전쯤 고향 집에서 주워 온 모과 한 개 뎅그러니 놓여 있다 낯설이 해서 그런지 얼굴색이 노래지고 주근깨 같은 까만 점도 후벼 파주고 싶을 만큼 생겼다 그 단새 구멍 두어 군데 숭숭 나 있는 흠집 나의 귀지 같은 더께 덕지덕지 앉은 구멍 속 한참 들여다본다 흠집은 암갈색으로 점점이 번지는 중이다 더군다나 몸통은 밀가루 반죽 짓이겨놓은 듯 울퉁불퉁하다 과일 망신 다 시킨다는 그 모과 온몸 쥐어짠 기름 반들반들 내뿜으며 웅숭깊은 향 풍긴다 아, 저 향수 속으로 나를 찾아 나서면 언제쯤 그곳에 가닿을 수 있을까 못생긴 인형처럼 앙증맞은 한 개구쟁이가 내 맘을 온통 다 파먹어 들고 있다

시,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시,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시집 한 권 냈다고 팔십 평생 땅뙈기 일구고 산 오촌 당숙께 보내드렸더니 달포 만에 답이 왔다 까막눈한테 뭘 이래 마이 지어 보냈노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시를, 우린 시래기 국만 끓여 먹고 살아도 배부른데 허기야, 물 주고 거름 주고 애써 지은 거 아무 맛도 모르고 질겅질겅 씹어 봐도 그렇고 입맛 없을 때 한 이파리씩 넣고 푹 삶아 먹으면 좋것다 요즘은 시 나부랭이 같은 시래기가 금값 아이가 이전에 장날마다 약장수 영감 따라 와서 한 많은 대동강 한 가락 불러 넘기고 한바탕 이바구하던 그 여자 시방도 어데서 옷고름 풀듯 말듯 애간장 태우며 산삼뿌리 쏙 빼닮은 만병통치약 팔고 있나 모르것다 그나저나 니 지어 논 시 닭 모이 주듯 시답잖게 술술 읽어보이 청춘에 과부 되어 시집 안 ..

씨/시, 앗!

씨/시, 앗! 섣달 그믐밤 연탄 한 장 피워놓고 골방에 누워 감 홍시 하나 물컹 삼켰더니 고놈의 씨가 목구멍에 걸려 넘기지도 토하지도 못하고 밤새 끙끙거리다 시가 되어버렸다 것도 모르고 날로 꼴깍 삼킨 시 명치에 딱 걸려 오도 가도 못하고 고놈의 시를 살려봐야겠다고 용을 쓰고 있는데 새벽녘 안도현 씨가 씨익 웃으며 찾아와 감이 익으면 삼킬 것도 토할 것도 없이 다 시가 된다고 그러지 뭔가 씨가 시가 되는 건 감이라고 죽은 시를 살리는 것도 감 날로 삼킨 시를 푹 삭히는 것도 감 뭣이 죽은 듯 살아 있는 감이라고 설날 아침 제상 맨 앞줄 터줏대감처럼 앉아 절 받는 감 씨가 그랬다 너의 고조모는 성주 이씨, 증조모는 장수 황씨, 조모는 인천 채씨 씨가 뭔 줄도 모르고 시집와서 그냥 씨 뿌리고 산 것도 감이라..

누에씨

누에씨 시를 왜 짓는가, 라는 물음에 씨는 그냥 문득 떠오른 누에처럼 시를 짓는다고 실실 얼버무리자 누에는 금세 전생으로 돌아가 알을 슬었고 뭔가를 짓는다는 좁쌀만 한 생각으로 알은 꼬물꼬물 거리기 시작했다 까막눈으로 돌가루 종이 위에 뒹굴다가 평수 넓은 신문지로 이사 와서는 뽕잎처럼 잘게 쓴 시를 다문다문 읽는 기분으로 시상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한 줄 두 줄 행간이 생겼고, 거기에 누워 먹고 싸고 잠자면서도 온몸에 뭔가 허전한 구석이 늘 배어 있음을 절감하고부터 누에는 자나 깨나 오고 가는 길 묻고 물으며 잠잠히 시를 짓기 시작했다 한 잠을 자고 나서는 허기를 참지 못해 뽕잎에만 눈독을 들였다고 두 잠을 자고 나서는 뽕잎에 딸려온 오디 맛을 난생처음 보았고 어딘가에 뽕나무가 있을 거라는 상상을 하였다..

나를 도둑맞다

나를 도둑맞다 나는 어릴 적 나를 도둑맞았다 섣달에 태어난 것만도 서러운데, 일곱 살배기 꼬마가 외갓집 2층 다락방 곶감 훔쳐 먹고 내려오다 계단 굴러떨어져 하반신 깁스하고 근 2년 방구들 신세 지는 바람에 나도 아닌 나를 둘이나 더 먹고 아홉에야 겨우 학교 문 들어섰으니 말이다 그러고 반평생 훌쩍 지나 '58년 개띠'라는 시 한 편을 어느 지역 문학지에다 실었더니 생전 연락 한번 없던 고향 친구 녀석이 단톡에다 ㅎㅎ김 시인, 갑이네… 이제 갑질할 나도 됐지 그러면서 시비를 걸어오지 뭔가 나보다 두 살이나 어렸던 그 친구 난데없이 일가 항렬 따지더니 지가 할배뻘이라며 요것조것 잔심부름 다 시키고 나를 개 부려먹듯 끌고 다니던 그 친구 이름자만 떠올려도 나는 금세 을이 되어버린다 그래서일까, 나는 갑이 되..

박달나무 눈 참, 밝다

박달나무 눈 참, 밝다 문경새재 박달나무 한 그루 내 방 귀퉁이 옷걸이로 거듭났다 바람소리 물소리 새소리만 듣고 살다 이젠 내 잔소리까지 듣고 산다 나무가 옷 갈아입었다 옷이 나와 옷걸이 번갈아 입었다 낮에는 나를 입고 밤에는 옷걸이를 입었다 내가 옷걸이 옷을 입고 옷걸이가 내 옷을 입어도 옷은 걸림이 없다 팔다리 잘린 옷걸이 옷 걸쳐 입을 때마다 나의 팔다리는 떨어져 나갔고 해지고 터진 바짓가랑이 사이로 바람소리 물소리 새소리 들렸다 나무가 옷을 입었다 옷이 나를 걸쳐 입었다 나는 옷걸이에 걸렸다 품도 소매도 없는 옷걸이에 어깨만 걸친 옷 한 벌 걸렸다 눈 밝은 *달달박박 옷 갈아입은 듯 박달이 입은 옷, 걸림이 없다 바람소리 물소리 새소리, 경을 듣는(聞經) 새재의, 이 아침 *달달박박 : 통일신라시..

나를 일깨워준 이

나를 일깨워준 이 이 세상 엮여 살다 보면 나도 모르게 씹을 일도 참 많은데 씹는다는 걸 좀만 더 곱씹어 보면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갉는다는 것 건넛집 술주정뱅이 아재 싸움 말리다 스무 살배기 대문니 하나 애꿎게 한여름 밤 날아든 주먹에 맞아 죽었다 그날 밤새도록 나는 아재를 씹다가 그도 모자라 아재 주먹 질근질근 씹다가 새벽녘에는 입소문 듣고 줄줄이 달려온 이마저 바작바작 갈았다 그러자 어떤 이는 죽자고 울었고, 또 어떤 이는 히죽히죽 웃었다 입술 꽉 깨물고 서 있는 옆집 대문니 대문을 제아무리 걸어 잠그도 씹은 말은 술술 새나갔다 한솥밥 먹고 살다 헤어진 이들의 경계가 뚜렷해졌다 남 말하기 좋아하는 이들은 나를 안주처럼 씹어댔고 쉬이 씹어 넘기기엔 버겁다고 여긴 아재뻘 되는 이들은 이보다 한술 ..

경계

경계 대가야 무덤 앞에서 어디로 가야 하나, 고령高靈 닿은 인연 뿌리칠 수 없다는 한 생각 데리고 무덤 속으로 조용히 들어선다 가얏고 소리에 눈뜬 딸린 돌방 소녀 시선이 내게로 쏠린다 가시리 가시리잇고 나를 버리고 가시리잇고 옛 가사 한 구절 즈려밟고 지나간다 으뜸돌방 주인은 아직도 곤히 잠들어 있다 호롱불만 켜진 텅 빈 덧널 앞에서 한참 머문다 에라, 모르겠다 여기나 저기나 속 썩기는 마찬가질 터 고마, 여기 한 살림 차리고 속 편하게 드러누워 볼까 아이쿠, 고령高齡 대가야 고분 속에 너무 깊숙이 들어와 있다 해 저물기 전에 되돌아나갈 수 있을까 혹시, 저기 누워 있는 젊은 청년 벌떡 일어나 문이라도 닫아버리면 어쩌나 이럴 줄 알았으면 죽어도 이름 값하는 고령 한우 한 상 차려와 눈 뜨고 누워 계신 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