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한 시국

나를 도둑맞다

김욱진 2020. 11. 8. 21:08

나를 도둑맞다

 

 

나는 어릴 적 나를 도둑맞았다

섣달에 태어난 것만도 서러운데, 일곱 살배기 꼬마가

외갓집 2층 다락방 곶감 훔쳐 먹고 내려오다 계단 굴러떨어져

하반신 깁스하고 근 2년 방구들 신세 지는 바람에

나도 아닌 나를 둘이나 더 먹고

아홉에야 겨우 학교 문 들어섰으니 말이다

 

그러고 반평생 훌쩍 지나

'58년 개띠'라는 시 한 편을 어느 지역 문학지에다 실었더니

생전 연락 한번 없던 고향 친구 녀석이 단톡에다

ㅎㅎ김 시인, 갑이네… 이제 갑질할 나도 됐지

그러면서 시비를 걸어오지 뭔가

나보다 두 살이나 어렸던 그 친구

난데없이 일가 항렬 따지더니 지가 할배뻘이라며

요것조것 잔심부름 다 시키고

나를 개 부려먹듯 끌고 다니던 그 친구

이름자만 떠올려도 나는 금세 을이 되어버린다

 

그래서일까, 나는

갑이 되도록

나라는 나를 열쇠로 꼭꼭 잠그기만 했지

나와 나 사이 벌어지는 틈새로

나의 비밀번호가 술술 새나간다는 걸

미처 눈치채지 못하고 산 을, 얼간이었다

 

나를 열 수 있는 열쇠는 나밖에 없다고

나 뒤에 숨어 여태껏 나라고 우겨댔었는데

며칠 전 지하철 화장실 거울 앞에서

아랫도리 지퍼가 다 열려 있는 나를 훔쳐본 순간

나는 또 나에게 나를 도둑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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