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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이와 빵이

얼이와 빵이 인천 차이나타운 공갈빵집 아르바이트하던 동갑내기 얼이와 빵이가 빵집을 개업했습니다 을이 갑이 된 기분으로 얼이는 빵이에게 얼을 심어주고 빵이는 얼이한테 빵을 먹여주겠다는 위대한 슬로건을 내걸고 얼빵이네 빵집이라는 간판을 달았습니다 오가는 사람들은 간을 보았습니다 성을 따 붙인 저 간판 이름 속에 무슨 꿍꿍이속이 숨겨져 있을 거라고 간까지 다 빼주는 얼간이와 속 텅 비우고 장사하는 얼빵이는 아닐 거라고 얼간이와 얼빵이, 성이 같은 게이일지도 모르지? 눈치도 없이 얼이는 빵이가 얼빵이라고 빵이는 얼이가 얼간이라고 서로 놀려대면서 얼이는 빵이 간干을 보고 빵이는 얼이 간肝을 보며 간보았다 그랬습니다 간干과 간肝사이 달을 보지 못한 사람들은 얼빵이네 빵집으로 몰려와 간을 간으로 간보는 얼간이만 찾으..

무료급식소

무료급식소 수성못 둑을 돌다 보면 둑 가에 죽 둘러서서 새우깡을 새우처럼 방생하는 이들이 있다 그 소문은 일파만파로 퍼져 눈치코치 없는 꼬맹이 물고기들도 다 안다 온종일 북적이는 무료급식소 새우깡 몇 물속으로 던져주면 금세 새우들은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고 어디선가 그 냄새 맡고 몰려온 물고기들은 새우 한 마리 먼저 낚아채려고 죽기 살기로 달려든다 개중엔 동네 건달 행세하며 떼 지어 몰려다니는 패거리족도 있고 새끼 입에 들어가는 새우 꼬리 깡 물고 뜯어먹는 얌체족도 있지만 그래도 부지기수는 자식새끼 먹여 살릴 땟거리 구하려고 한평생 헤엄치며 돌아다닌 나 많은 물고기들 물 한 모금으로 아침 때우고 오늘은 어딜 가서 밥값을 하나 허구한 날 고민했을 이상화 시비 앞에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귀동냥만 실컷 ..

쓰레기 분리수거

쓰레기 분리수거 출근하자마자 나는 교내 층층이 돌아다니며 쓰레기를 줍는다 매미 한 마리 5층 난간까지 날아와 살아 있는 듯 죽어 있다 울음소리는 누가 다 주워 담아 가고 나는 육신만 수습했다 매장할까 풍장을 할까 망설이다 그래, 북적거리는 쓰레기장으로 치러주자 아무 연고 없는 영혼 달래주듯 바람이 맨 먼저 문상을 다녀갔다 빈 병이 울었다 캔도 울었다 밤새 컵라면 국물 들이켠 비닐봉지도 따라 울었다 겹겹이 뒤엉킨 울음 부조 간신히 분리수거하고 교무실 컴퓨터 열어보는 아침 국정농단이니 국정원 댓글 부대니 갓난애 울음소리에 잠 못 잔다고 막무가내로 위층 올라와 살인을 저질렀다는 쓰레기 같은 뉴스들만 빼곡할 뿐 울도 담도 없는 철탑 꼭대기서 스무날 밤낮 매미처럼 속 끓다간 어느 해고 노동자 뒷얘기는 한 마디도 ..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툭하면 조류독감이라는 둥 살충제 계란이라는 둥 우리도 없이 사는 우리한테만 왜 자꾸 덮어씌우고 그러세요 주민번호마저 낱낱이 다 까발려진 이 마당 아들딸 맘 놓고 수북 낳아 키우고 싶어도 이젠 헌 달구가리 하나 없잖아요 아, 암탉이 우리에 올라앉아 볏 닿은 임 그림자 넘다 보며 숨바꼭질하는 둥 몇날 며칠 묵은 알 동동 굴리며 병아리 깔 궁리하는 둥 우리, 쏙 낳은 알 몰래 훔쳐 톡, 깨어 먹고 병아리 품은 척 뒷간에 앉아 용쓰던 어린 시절 어미는 구구구…, 나는 오늘 병아리 떼 삐악삐악 데리고 마당가 모이 주워 먹다 텅 빈 둥지로 날아오르는 꼬꼬댁 떠올리며 닭이 먼저냐 닭 알이 먼저냐 둥둥 떠 있는 보름달 입술 가에다 콕콕 쪼아보는 중이에요

용궁역

용궁역 용궁에도 기찻길이 있다는 사실 거북이 꾐에 속아 넘어간 토끼가 알면 기절초풍할 일이다 토끼 간 대신 토끼 간 빵을 파는 용궁역* 중앙선 완행열차를 타고 잡순대 사 먹으러 가는 척하며 용궁역 잠시 내려 보라 간담이 서늘해진다 토끼 간 빼물고 용궁으로 돌아온 간 큰 거북이 이젠 버젓이 용궁역 안에서 토끼 간 빵을 구워 팔고 있다 간도 쓸개도 다 빼먹는 세상 어디 용궁뿐이랴 * 용궁역 : 경북 점촌과 개포 사이에 있는 간이역

세상에 이런 일이

세상에 이런 일이 1킬로그램도 채 안 되는 저울 하나가 100배도 넘는 몸뚱어리 젖먹이 달래듯 어른다 세상에 이런 일이, 저 울藩에서만 벌어지는 건 아니다 무게가, 무게감이 뭔지도 모르는 할머니 폐휴지 1킬로그램에 100원 남짓 한다는 얘기 어데서 가볍게 주워듣고는 한평생 폐휴지만 주워 모았다는데 눈대중 하나로 무게를 달고 눈높이를 맞추고 눈길 주고받으며 살아온 팔순 할머니 폐휴지 주워 한 푼 두 푼 모은 돈 1억을 고아원 아이들 학비로 용돈으로 다 나눠주고 가셨다는데 이래저래 저울질당하며 자란 그 아이들 판사 되고 의사 되고 나 같은 비렁뱅이 시인도 되고 제 무게만큼 머물다 눈 깜빡할 사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눈금, 저 울의 경계가 지금, 눈시울이 붉다

너도나도풍란

너도나도풍란 시집간 후로 연락 한번 없던 고향 여자 친구 십 년 만에 꽃 활짝 피웠다는 풍란 한 컷 카톡으로 찍어 보냈다 난이란 난을 다 평정하는데, 십 년 딱 걸렸다며 그 난이 시집살이처럼 모진 바람 참고 견뎌낸 풍란이었다니 십 년 전 난 대궁을 허공에다 밀어 올릴 줄도 몰랐고 허우대만 멀쩡한 난 속에 숨어 난인 척 난이 아닌 군자란을 꿈꾸었는데 군자는 고사하고 아무런 색도 향도 없는 못난이였다 난시에, 난청에, 난독증까지 그러고도 버젓이 난이라고 우겨대며 살았으니, 참 난 아직 난을 보고도 무슨 난인지 몰라 난감할 때가 있는데 이 세상엔 꽃 한번 피워 보지 못하고 난, 난 그러기만 하다 이름도 못 짓고 떠난 난이 수없이 많다는 걸 난이란 난은 다 난세에 꽃을 피운다는 걸 난은 고요히 보여주고 들려주고..

외눈박이 사랑

외눈박이 사랑 지난해 겨울 섬나라 피지로 가족 여행을 다녀온 후 거실 한구석 빈 항아리에다 물고기 예닐곱 마리 입양했다 며칠이 지나도 낯설어하는 것 같아 벵가섬에서 주워 온 산호랑 조개 소라 전복 껍데기 어항 속에다 넣어주었더니 여기가 남태평양 바다인 줄 알고 제집처럼 드나들며 신나게 돌아다녔다 그날부터 한 가족이 된 우리는 매일 아침저녁 벵가섬 해변으로 산책을 나갔고 물고기들과 얼굴 마주 보며 오순도순 밥을 먹었다 뭍과 바다의 경계가 모호해진 사이 우리는 서로 닮아가기 시작했다 밤이면 이 방 저 방 숨바꼭질하다 우린 산호 근처 소라 방에 소복 모여 잠들 때도 있고 뜬눈으로 지새며 서로 입질할 때도 있었다 어린 것들이 살랑살랑 헤엄치고 다닐 때 우리 부부는 팔다리 엉덩이 요리조리 흔들며 지느러미 춤 따라..

교단 일기․1-거미

교단 일기․1 -거미 점심시간 6층 난간에 매달린 거미 줄도 없이 땅바닥으로 뛰어내리려는 순간 복도 배식 줄 서 있는 아이 서넛 엉겁결에 달려가 간신히 거미줄 잡고 거미를 타일렀습니다 거미야, 미안해 우리가 너의 밥줄 끊을 줄만 알았지 이토록 힘겨워하는 줄은 몰랐어 말문 굳게 닫은 거미 줄이 술렁였습니다 밥줄에 목숨을 건 아이들 눈빛 줄줄이 땅바닥으로 가닿았습니다 거미가 우울했다는 낌새 알아채고부터 전깃줄에 와 앉은 까마귀들도 줄지어 울어댔습니다 설마 산 입에 거미줄 치랴마는 저세상에 반쯤 내던진 몸 다시 추스르느라 거미는 참 혼란스러웠겠습니다 줄로 줄로 근근이 밥줄 잇고 살아온 거미 줄 하나가 오로지 이 세상 명줄이었을 터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