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은 없다
이승희
길도 집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문득 길 위에 서 있을때 들었습니다. 거울을 닦듯 이 길을 닦으면, 길은 어느새 목판화 속의 작은 집으로 나를 데려갑니다. 공기의 빈곳으로 가득히 연기를 채우며 꽃 피는 집은 또다른 꽃씨를 품고 있을 것입니다. 목판화 속의 집으로 들어갈 수는 없지만 목판화 속의 집을 불러낼 수는 있지요. 싸리나무 대문에 널린 옷을 보아도 알 수 있지요. 거기가 내 옛집이었음을, 그렇게 집은 구름이 뜨거나 지듯 아무데서나 불쑥 생기기도 하고, 다시 맑게 지워지기도 합니다.
집들은 불을 켜고 누군가를 기다립니다. 집은 그렇게 비로소 어둠속에서 제 기다림을 꺼내 보이는 것입니다. 들이 어둠속으로 잠기는 모습을 본 일이 있지요. 잠든 새들과, 잠든 나무와 풀의 씨앗을 품고 아무런 저항도 없이, 기꺼이.
아무 저항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 이처럼 아름다운 모습인 줄 몰랐습니다. 바람이 부는 대로 흔들리며 어머니 아직 거기 계신지요.
『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 이승희 , 창비, 2013(초판 3쇄), 40쪽
'♧...참한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녕 / 이승희 (0) | 2020.10.24 |
---|---|
갈현동 470-1 골목 / 이승희 (0) | 2020.10.24 |
가을 저녁의 시 / 김춘수 (0) | 2020.10.23 |
연애 외 1편 / 오탁번 (0) | 2020.10.20 |
설날 아침 외 2편 /오탁번 (0) | 2020.10.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