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아침
오탁번
마흔아홉 살에 꼭 죽을 줄만 알았다
내가 스무 살이었을 때도
서른 살까지 못살 줄 알았다
아들 낳고 딸 낳고 집장만하고
아내 모르게 슬금슬금 딴 여자도 보며 살던
서른 살의 꼭두새벽에 잠이 깨면
마흔 살까지는 정말 못 넘긴다는
조바심 때문에 목이 말랐다
마흔 살이 되어 한 예닐곱 해쯤
저승길 익히며 덤으로 사는 줄 알았다
흐흐흐 그런데
마흔아홉도 넘기고
오늘이 쉰 살 되는 설날 아침이다
나보다 키가 큰 아들 딸한테 세배받고
떡국 한 그릇 가볍게 비웠다
이 무수한 나날 앞에 놓고 보니
세뱃돈 많이 받은 아린아이처럼
까불고 싶다
고드름 하나 따서 창처럼 들고
골목골목 내달리면서
우리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노래하고 싶다
쉰 살이 된 설날 아침
나는 정말
두렵다
솔잎
추석 송편 솥에 넣을 솔잎을 따려고
땅거미가 질 때 발소리 죽이고
뒷산에 올라가는 할머니의 얼굴은
손자놈 콧물보다 더 진한 생애의 때
잿빛의 머리칼은 한줌도 안 되지만
소나무의 아픔은 옛 짐작만으로도 다 안다
해 넘어가고 첫잠 든 소나무가
은하수 멀리까지 단꿈을 꿀 때
살며시 솔잎을 따야 아프지 않고
솥에 들어가도 뜨거운지 모른다
말없이 솔잎이 숨 거둘 때마다
젊은 날의 사랑처럼 송편이 익는다
소나무의 슬픔과 솔잎의 아픔을
헤아리며 발소리 죽이는 할머니는
그 옛날 단군 할아버지의 예쁜 애인
노루피 조금 마시고도 시샘만 하여
큰 꿈 이루는 단군 할아버지 애태우다가
이제는 활활 타는 마음도 식은 재 되어
수숫대처럼 가벼운 사랑만 남아서
당신의 옛날 애인 제사상에 올릴
손가락 자국 선명한 그리움을 빚는다
가만가만 발소리 죽이며 솔잎이나 따는
다 저문 가을 들녘 홀로 바람에 흔들리는
수숫대 같은 서러움의 눈빛에는
푸르고 싱싱한 까칠까칠한 솔잎이
할아버지 한창 나이 때의 수염과도 같고
골이 나서 일어서던 비밀의 가장자리
서로 맞부비며 엉키던 그것과도 같아
슬픔의 잠
오른손 엄지손가락이 나를 거부한다
처음에는 어깨가 그냥 결리더니
팔꿈치가 저려오다가 어느 날 아침
오른손 엄지손가락이 말을 안듣는다
나를 배신한다 복종해 온 지 오십년쯤 되니
이제는 주인 말을 안듣고 제멋대로
쌀뒤주 열쇠도 챙기고 마나님 엉덩이도
모두모두 마음대로 만져도 된다는 뜻일까
오른손 높이 들어 콧구멍도 쑤시고
젊은 여자의 순결도 잘 익은 꽈리를 깨물듯
장난삼아 망가뜨리며 돌아다닐 때
나팔꽃보다 작은 우산 속으로 숨어도
가슴마다 피는 숯불 손톱 위의 반달모양
하얗게 죽으면서도 숨을 쉬었다
늦은 겨울 아침처럼 식어가는 손가락이
하늘 멀리 한점 그리움을 가리킬 때
손가락마다 민들레 씨앗 같은
금침 은침 맞으며 울고 있다
아직은 다 작별하지 못한 사랑도
어머니의 젖가슴으로 다가갈 수 있을까
이제는 저승의 이슬밭에서
뽀얀 젖 뚝뚝 흐르는 젖가슴 헤치고
탁번아 탁번아
막내를 부르고 계실
아아 나의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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