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한詩

설날 아침 외 2편 /오탁번

김욱진 2020. 10. 20. 21:20

설날 아침

오탁번

 

 

마흔아홉 살에 꼭 죽을 줄만 알았다

내가 스무 살이었을 때도

서른 살까지 못살 줄 알았다

아들 낳고 딸 낳고 집장만하고

아내 모르게 슬금슬금 딴 여자도 보며 살던

서른 살의 꼭두새벽에 잠이 깨면

마흔 살까지는 정말 못 넘긴다는

조바심 때문에 목이 말랐다

마흔 살이 되어 한 예닐곱 해쯤

저승길 익히며 덤으로 사는 줄 알았다

흐흐흐 그런데

마흔아홉도 넘기고

오늘이 쉰 살 되는 설날 아침이다

나보다 키가 큰 아들 딸한테 세배받고

떡국 한 그릇 가볍게 비웠다

이 무수한 나날 앞에 놓고 보니

세뱃돈 많이 받은 아린아이처럼

까불고 싶다

고드름 하나 따서 창처럼 들고

골목골목 내달리면서

우리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노래하고 싶다

쉰 살이 된 설날 아침

나는 정말

두렵다

 

솔잎

 

추석 송편 솥에 넣을 솔잎을 따려고

땅거미가 질 때 발소리 죽이고

뒷산에 올라가는 할머니의 얼굴은

손자놈 콧물보다 더 진한 생애의 때

잿빛의 머리칼은 한줌도 안 되지만

소나무의 아픔은 옛 짐작만으로도 다 안다

해 넘어가고 첫잠 든 소나무가

은하수 멀리까지 단꿈을 꿀 때

살며시 솔잎을 따야 아프지 않고

솥에 들어가도 뜨거운지 모른다

말없이 솔잎이 숨 거둘 때마다

젊은 날의 사랑처럼 송편이 익는다

소나무의 슬픔과 솔잎의 아픔을

헤아리며 발소리 죽이는 할머니는

그 옛날 단군 할아버지의 예쁜 애인

노루피 조금 마시고도 시샘만 하여

큰 꿈 이루는 단군 할아버지 애태우다가

이제는 활활 타는 마음도 식은 재 되어

수숫대처럼 가벼운 사랑만 남아서

당신의 옛날 애인 제사상에 올릴

손가락 자국 선명한 그리움을 빚는다

가만가만 발소리 죽이며 솔잎이나 따는

다 저문 가을 들녘 홀로 바람에 흔들리는

수숫대 같은 서러움의 눈빛에는

푸르고 싱싱한 까칠까칠한 솔잎이

할아버지 한창 나이 때의 수염과도 같고

골이 나서 일어서던 비밀의 가장자리

서로 맞부비며 엉키던 그것과도 같아

 

슬픔의 잠

 

오른손 엄지손가락이 나를 거부한다

처음에는 어깨가 그냥 결리더니

팔꿈치가 저려오다가 어느 날 아침

오른손 엄지손가락이 말을 안듣는다

나를 배신한다 복종해 온 지 오십년쯤 되니

이제는 주인 말을 안듣고 제멋대로

쌀뒤주 열쇠도 챙기고 마나님 엉덩이도

모두모두 마음대로 만져도 된다는 뜻일까

오른손 높이 들어 콧구멍도 쑤시고

젊은 여자의 순결도 잘 익은 꽈리를 깨물듯

장난삼아 망가뜨리며 돌아다닐 때

나팔꽃보다 작은 우산 속으로 숨어도

가슴마다 피는 숯불 손톱 위의 반달모양

하얗게 죽으면서도 숨을 쉬었다

늦은 겨울 아침처럼 식어가는 손가락이

하늘 멀리 한점 그리움을 가리킬 때

손가락마다 민들레 씨앗 같은

금침 은침 맞으며 울고 있다

아직은 다 작별하지 못한 사랑도

어머니의 젖가슴으로 다가갈 수 있을까

이제는 저승의 이슬밭에서

뽀얀 젖 뚝뚝 흐르는 젖가슴 헤치고

탁번아 탁번아

막내를 부르고 계실

아아 나의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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